가족애를 조금은 더 깊게 간직하며…
떠나온 내 고향 삼천포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둘째아들 진동이의 결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평생을 바다와 함께 하신 아버님께서는 어머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시간들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저희들만큼은 가족과 떨어져 살지 않게 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시다가 36년 전 어머님과 함께 목선 1척을 인수하여 예인사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회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도 존경하지만 사회의 선배이자 해양업계 원로이며 우리나라 해양발전에 초석이 되신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지금 현재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버님의 자식에 대한 집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은 자식으로서 배워야할 부부애(夫婦愛)의 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그런 모습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근본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시는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은 자식으로서는 물론 회사구성원의 하나로서도 늘 깊이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은 깊어가면서도 공연히 멋쩍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본 적은 없지만 진심으로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또한 사회의 선배로서 사업장의 리더로서 아버님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선사업의 구성 관리를 비롯하여 선반건조와 관리 등에 대하여 너무나 세밀하고 정확히 알려주시기 때문에 저는 해양대학교 교수님 출신이신 아버님의 제자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거친 바다와 싸우시던 아버님께서 섬세할 정도로 가르쳐주신 덕에 별로 꼼꼼하지 못한 제 성격이 이제는 무슨 일을 하던지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조금은 꼼꼼한 성격이 된 것 같습니다. 남들은 은퇴하였어도 벌써 은퇴하였을 연세인데도 아직도 저희 곁에서 건강하신 모습으로 챙겨주시니 혹간 우리를 못 믿으시는 것인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각종 업무에서 아버님의 명쾌한 결단과 업무처리 방식을 보면서 아직도 더 배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지금 쓰고 계신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회고록을 계기로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신 모습으로 저희 곁에서 가르쳐 주시고 저희들을 지켜봐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여 주십시오. 형님가족과 저희가족의 부모님으로서 사랑하는 선배로서 아버님과 어머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올립니다. - 아들 김진동 올림
몇 마디 쓰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감정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나도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주었지만 아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감격스러웠고 애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평소 성격이 좀 급하고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결혼식도 하지 않고 며느리(한혜숙)와 살림을 차려서 나를 당황하게 하였지만 젊은이의 철없는 불장난은 아니었기에 1981년 2월 7일 막내 경희와 함께 합동 결혼식을 치렀다.
막내딸 경희의 결혼식
학위수여
주피터호의 진수식
1994년 1월 12일 국내예선으로는 거의 초창기 건조로 기억되는 주피터(2900HP)의 진수식을 하였다. 주피터는 우레ㆍ폭풍 등 기상의 지배자로 여겨 왔고 인간의 운명조차도 좌우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하늘의 신으로서 그는 여러 가지의 칭호를 가지며 지선지고(至善至高)의 주피터, 승리의 주피터 등으로 불려진다. 바다는 기상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비와 바람은 아무리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배일지라도 항해에 지장을 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배의 이름을 기상을 주관한다는 주피터로 하고 삼광조선에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진수식을 하였다.
예인사업과 안전
2013년 12월 현재 평택에 11척 인천에 9척의 배를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 2004년대 처음 투입한 평택 사업장은 현대제철의 철강원료 및 제품의 수출입과 기아, 현대 자동차의 수출입차량을 운반하는 선박이 늘어가면서 이제는 인천보다도 더 많은 예선을 필요로 할 만큼 입항선박이 많아졌다. 인천의 보조항 정도였던 평택항이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발전하여 나가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지만 13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천항의 물동량 감소는 국제경기의 쇠태로 인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다른 항과 비교해 국가의 지원이 너무 작은 탓도 있어 보인다. 또한 날로 발전하는 중국의 해양강국화와 현대식시설을 갖추고 방대한 배후 부지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항만과의 경쟁에 뒤처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천항이 동북아 거점 항만으로 다시 일어서고 인천공항과 더불어 세계물류의 거점항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나를 비롯한 항만관계자들은 보다 혁신적인 항만운영계획을 세우고 정부에서도 더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평택의 대륙상운은 둘째인 진동이가 맡아하고 있다. 학교시절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경영능력이 제법 탁월하여 믿고 맡겨 놓고 있다. 예선업을 하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작업을 많이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인천대학교 공사 중 거제도와 중국에서부터 상판을 운반한 것이다. 대현선박의 예인이나 조그만 바지선의 예인이나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인천대교의 경우에는 나를 포함하여 해상근무자와 사무실 직원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자부심과 철저하고 안전한 작업을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임했었다. 모든 현장 작업이 다 안전을 담보하여야 하지만 해상작업은 특히 더 주의하여야 한다. 아무리 작업 일정이 바빠도 날씨가 나쁘면 절대로 무리하게 작업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문기술과 철저한 안전관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인데 전문성이 결여된 안이한 태도나 타성에 젖은 작업은 대단히 위험하다. 수시로 안전점검과 교육이 필요하며 작업자들은 스스로도 자칫 해이해지지 않도록 긴장을 하여야 한다. 겉보기에는 밧줄에 배나 바지선을 끌고 가지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그 배나 바지선을 안전하게 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상상태를 파악하여 작업을 언제 할 것인지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또한 엔진의 출력을 점검하고 와이어의 상태와 크레인의 점검은 필수적이며 운항 중 예인선과 피 예인선을 계속 관찰하며 조그만 이상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 견시를 절대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 작업반경 내에 타 선박의 접근은 물론 이물질이나 어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도 주의를 하여야 한다. 내 나름 무슨 일에 있어서든 철저한 준비와 점검을 통해 위험을 배제하며 살았기 때문에 35년간 예인업을 하는 동안 몇 번의 작은 사고는 있었지만 큰 과오는 없었는데 해양대학교 시절 교수로서 항해학을 가르치면서 안전을 특히 강조하였고 오랜 선장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허베이스트리트호와 해상 크레인의 충돌 사건이다. 누군가의 잠깐 실수로 빚어진 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귀중한 자연환경을 파괴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와이어를 철저히 점검하고 예인 중 끊임없이 관찰하고 견시만 확실하게 하며 운항을 하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천항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는 광복 후 지금까지 자유경제체제를 지향해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인한 생산설비와 지하자원의 부족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60달러 정도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2000년대 초 1만불을 넘어 2만불의 국민소득으로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수년 내에 3만불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향상이 국민 개개인에데 모두 경제적 이익을 주거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실질적인 빈곤층이 있고 비정상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층은 늘어가고 있다. 그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소외된 국민들의 의욕상실은 경제발전 에너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이라고 대답한다. 사회가 변하여 이제는 가족 간의 화목이나 친구의 우정보다는 거래관계자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자신의 노력에 의한 나름대로의 성공 목표달성보다는 우연한 기회포착이나 복권주의 같은 예기치 않은 순간의 망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인천항의 미래를 생각하면 심각함을 감추기 어렵다. 인천항의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실적위주의 행정으로 관련부처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원동력으로 100여년을 넘게 기여하고 있는 인천항을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위락시설을 만들 계획인가 본데 그래가지고 과연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인천항은 살아남고 국가경쟁력은 커질지 의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잠시 경제적 침체기에 있고 다른 항에 비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갑문이용에 불편이 있다고 해서 신항으로 모든 것을 내보내고 내항을 점차적으로 위락시설화하거나 주거지로 만든다면 단기간에는 경제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현직관리의 치적 쌓기에 도움을 줄지언정 인천지역경제나 국가기반산업의 활성화에는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인천신항이 계획도 세워지기 전에 중국에서는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 태평양을 포함하는 허브항으로의 발돋움을 하기 위해 천진항이나 양산항의 낮은 수심을 보완하도록 외항에 인공섬을 만들어 2000년대 이후 까지 바라보는 거대항만을 조성하여 이미 운영을 하고 있는데 이에 맞설 항만개발을 하기는커녕 있는 항만도 없애고 관광자원화하려 하는 것은 결코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 관선시장과 민선시장 관계없이 인천항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수차례에 걸쳐 충언하였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는 비전이 없다고 하였다. 치적도 좋지만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 치적을 만들라고 말하여 주고 싶다. 순간의 판단 실수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 치적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떠들썩하게 홍보하고 대단한 기적이 일어날 것처럼 파헤친 경인아라뱃길의 경우 겨울에 얼고 여름에는 부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내항의 재개발 운운하는 것은 많은 항만인들을 당혹하게 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로 멀쩡한 항만을 유원지로 만들고 지역 경제를 마비시킬 것인데 상황을 모르는 일부 동조자들은 항만산업을 사양 산업이니 공해 유발 산업이나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물질문명의 각종 혜택은 받으면서 살아도 그것을 생성하는 과정은 거부하는 것과 같으며 밥은 먹으면서도 쓰레기처리는 더럽다거나 자동차는 타고 다니면서 공해를 배출하는 나쁜 운송수단으로 정의하는 것과 다름없다.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설비가 중요하듯 물류도 중요하다. 대단위 물류의 중심지 그곳이 바로 경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가스해운
1998년 LNG인수기지가 평택에 만들어진 후 인천기지가 들어서면서 LNG운반선의 예선만을 전담하는 한국가스해운설립 당시 기존의 평택 업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인천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당시 인천 업체는 참여를 요구 지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당시 가스공사 사장을 면담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지역 국회의원을 통해 참여의 길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당시 지역 국회의원이던 S의원이 가스공사 사장과 협의하려 하였지만‘국회의원은 국정에만 신경 쓰고 우리의 일에는 참견말라’는 쓴소리만 듣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의 경제인으로서 그대로 물러나 타지역의 업자가 들어와 내 눈앞의 바다에서 작업을 하데 놔둘 수는 없었다. 지속적인 관계자와의 면담과 다양한 경로의 압력으로 결국 25%의 지분참여만 가능해졌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통령에게 까지 보고되고 국영기업체나 대기업의 횡포로 중소기업영역을 빼앗는 것은 안 되며 국가경제의 원활하고 단단한 성장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설자리 만들어줘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전달되어 관계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전체지분을 인천업체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인천업체 75% 평택업체 25%로 해서 가스해운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총 20척의 예인선을 보유하고 예선업계에서 나름 이름 있는 회사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전 사업자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아 어려운 가운데 인수하거나 양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포 큰 나의 아내가 빚을 내어 [대륙호]를 인수하였고 또 대륙호가 좌초되었을 때 나의 폐선 의견에 굴하지 않고 수리를 강행하여 작업을 한 것이 가장 큰 공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비교적 오랜 시간 국제적인 경기의 불황으로 인천항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어려운 가운데도 최선을 다하며 회사의 안정을 꾀하고 있는 아들들을 믿는다.
맺는 말
맺는 말
62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편과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우누 일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들 둘, 딸 둘을 아무 탈 없이 키워내고 남편의 해상생활을 뒷바라지하며 혹시라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엄마의 사랑보다는 엄격함으로 키운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잘 살아주고 있는 것에 부모로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가정에서의 일과는 달리 내 인생 80여 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1977년 봄 안개로 인한 대륙호의 좌초는 나에게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게 하였다. 먼 바다도 아닌 눈앞의 작약도 앞바다에서 전복한 대륙호는 나의 전 재산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였다. 모래펄에 벌렁 누운 대륙호의 배 밑바닥을 두드리며 통곡하던 그날은 험난했던 시집살이 때보다도 더 암담하였다. 때마침 아파서 쉬고 있던 남편은 2차 오염으로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폐선하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마련한 배인데 폐선을 한다는 말인가. 남편에게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고 하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황망한 중에 부산의 전구식 기관장을 불러올리고 수소문하여 배를 고칠 사람을 불러 모아 10여일 만에 대륙호를 살려낸 것은 아마도 지금의 대륙상운그룹 탄생을 위한 시험이었던 것 같다. 이제 20여 척의 예인선과 120여 명의 사원을 거느린 대륙상운은 인천항과 평택항의 예인업계를 리드하면서 대한민국 항만산업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나갈 것을 생각하니 지난날의 고생은 사라지고 흐뭇한 마음이다. - 갑오년 4월 곽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