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으로 가는 길>의 도종환 시인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었다’

2006-06-02     임보연 기자
견딘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말의 다른 의미로 알고 살아왔다. 삶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다. 때문에 삶은 슬프고 또 아름다웠다. 슬퍼도 울 수 없었고 행복해도 웃을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비밀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어제를 견디고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꿈꾸었다.



대학로 학림에서 도종환 시인을 만났다. 4년 만에<해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표했다. 현재 속리산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인. 최근 문학나눔사업 추진위원회로부터 문학 집배원으로 위촉받아 1년간‘도종환의 시 배달’이라는 코너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 일로 서울에 잠시 들른다는 시인을 만났다. 얼마 전 시인을 인터뷰하기 위하여 여성지 기자가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집 앞의 부추 밭에서 일 좀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단다. 그의 집 앞 조그만 텃밭에는 부추를 비롯하여 상추니 아욱이니 파니 더덕 같은 것들이 심어져 있다고 한다. 흔쾌히 허락한 그 기자, 두 시간동안 일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시인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으면서 나도 속리산으로 찾아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 큰일 날 뻔 했군 이라는 생각이 반이다.


속리산의 초여름, 그 안의 도종환 시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산은 5월 요맘때가 가장 좋을 때라고 한다. 나뭇잎이 작게 돋아나 막 연두빛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란다. 온통 초록이 무성한 여름의 숲은 모두 같은 색을 띠지만 지금은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색을 가지고 있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4월 하순이 되면 산벚나무꽃이 참 예쁘다는 시인의 말을 들으니 문득 그 꽃이 보고 싶어졌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대학로의 가로수들을 보면서 그의 눈은 어느 새 속리산의 초여름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순천작가회의가 주관했던 시인의 <문학아카데미 시창작교실>의 풍경을 스케치한 기사를 접하고 그와의 인터뷰 장소로 향했던 터. 그가 청중들에게 던졌던“여러분은 왜 문학을 하세요?”라는 질문을 시인에게 가장 먼저 던진다.“나에게는 삶의 길이 되어준 게 문학이다. 이정표, 나침반이다. 갈등하고 고민할 때 길을 가르쳐준 것이 시고 문학이고 그랬다. 시가 가라는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그길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앞으로도 그 길을 계속 가야할 것 같다.” 이번 시집은 4년 만에 출간 된 것이다. 아플 때 1년 정도 못쓰다가 몸이 좋아지면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줄곧 놓지 않고 이어온 시 속의 화두는 무엇이었나.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바르게 사는 것인가 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다고 한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그것들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고도 할 수 있단다. 다시 말해 또 다른 길 찾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무엇인가?“삶에서 우러나서 삶을 바르게 가꾸는데 기여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우러나는 시, 그것이 도리어 삶을 바루게 가꾸도록 만드는 것이다.”그는 이야기한다. 사실 자신의 시가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시인들이 시를 쓸 때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서 다시 보면 내가 부족하구나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책장을 덮어버린 채 열어보지 않는 시집도 있단다. 아홉 번째 시집이지만 계속 그래왔단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하루도 시를 생각하지 않는 날은 없죠. 늘 뭔가를 읽고 쓰고... 제주화가 강요배은 밥 먹고 똥 싸는 것 외에는 늘 그림만 그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시집을 냈고 그 사이 참으로 좋은 시들이 많았지만 그리고 이번 시집 역시 참 좋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할 때 여전히<접시꽃 당신>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것이 시인에게 어떤 느낌일지, 그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느끼는 부담감은 없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시인의 아픈 곳일지도 모르지만 슬쩍 건드려 본다.“자기 업보다. 사실 폭넓게 이해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것 이상의 작품을 써야 하는데 라는 고민도 한다. 지금까지의 화두이기도 했다. 그걸 뛰어 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아직도 나는 못 뛰어 넘었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더 치열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접시꽃 당신>은 가장 애착이 가는 시집이고 뛰어 넘어야 할 시집이고 딛고 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쌓은 것임에도 내가 뛰어 넘어야 할 벽인 것이다.”그렇게 꽤 오랜 세월 시를 써 온 도종환 시인,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의 당신과 지금의 도종환 시인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옛날에는 지극히 낭만주의자였다. 급하고 격하고. 낭만주의의 특징이지 않은가. 그런 문학청년을 거쳐서 접시꽃 당신의 어려움, 해직 교사로서의 핍박, 병마와의 싸움, 그렇게 굽이굽이 삶을 거쳐 오면서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지고 순해지고 느려지고. 그렇게 변한 것 같다.”그런데 당신의 옛날 사진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쭉 훑어보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눈빛이다. 눈빛의 날카로움이랄까?(사실 그와 인터뷰 하면서 느꼈던 것인데, 마주하는 눈빛의 흔들림 없음이 조금은 두려웠다. 그리고 그 눈빛의 살아있음이 반가웠다.)“(웃음)사람들은 얘기해요. 눈에 힘이 많이 빠졌다고. 젊은 시절에는 눈을 이렇게 부릅뜨고 다녔는데(그는 이야기하면서 눈에 힘을 팍 주어보는 시늉을 한다), 지금은 힘이 많이 빠졌다고 얘기들 하죠.”


재미보다 큰 것을 얻은 그 곳

그는 지금 속리산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의 속리산에서의 생활이 궁금하다.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에서 홀로 지내는 그의 생활이 궁금하다.“재미를 찾아 간 것이 아니었다. 심심하고 외롭고 무섭고 그랬던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소중하고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복된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사유하고, 쓰고, 그것만 할 수 있는 시간을 작가가 갖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실 글도 쓰지만 일도 많다. 이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지나버렸다면... 글쎄... 사유안하고 실천안하는 것도 지식인의 잘못이다. 그 시간이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재미없었다. 그러나 재미보다 훨씬 큰 것을 얻었다. 계속 그곳에 머물 생각이다.”
그는 그동안 아는 것보다 가르친 게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사유한 것보다 떠든 게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많이 생각하고 적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아파서 속리산으로 들어간 시인의 건강은 이제 괜찮은 걸까? 다행스럽게도 이제 괜찮단다. 그날은 시인이 쓰러지던 날은 많은 일들에 쫓겼었단다. 플러그에 너무 많은 전기코드를 꽂아두었던 것이란다. 그렇게 되면 과부화로 전기가 나가는 원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해야 하는 거였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스스로를 놓아버린 거란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짐 지고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라는 책에서 말하길 급한 마음은 병든 마음이라더라. 느린 마음은 건강한 마음이고.”
그러더니 기자에게 묻는다.“건강하세요?”그 물음이 왜 이리 짠하고 고마운지 갑자기 가슴 속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요즘 사람들은 멀티테스킹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일을 다 잘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원히 유능할 순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니까 말이다. 단 1분이든 10초든 잠시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늘 자기가 자기를 불러들여야 한다.”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이번에 도종환 시인이 발표한 시집의 제목은<해인으로 가는 길>이다. 이번 시집에 그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제목의 해인이란 불교용어이다. 불교 용어는 깊은 생각을 압축한다. 그리고 시도 압축이다. 불교적 상징과 시적 상징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해인이라는 것이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해인사라고 하는 절은 익숙하게 들어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절 이름의 해인과 같은 의미이다. 바다의 풍랑이 멎어 하늘의 모습마저도 다 비칠 정도로 맑고 고요한 상태가 해인인 것이다.”시인이 사는 곳은 워낙에 동네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 곳에 가는 길이 해인으로 가는 길과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전에 시인은 화엄(어울림, 조화, 나눔)을 이루고자 바쁘게 움직이고 뛰어다녔다. 화엄이라는 숲에서 지내던 생활이 병을 통하여 해인을 찾아가고 있었던 거란다. 하지만 그가 지금 해인으로 가는 길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고요하고 깊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어야 한다. 사유와 실천이 별개가 아니다. 두 개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 생각을 불교적으로 압축된 용어에 담아온 것이다. 과거에 화엄 쪽으로 치우쳐 있던 내가 지금은 해인 쪽으로 와있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깨달음을 얻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다. 큰 깨달음이라는 것은 전 생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란다.“조주선사의 말씀이 적어도 정말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면 작게 깨달은 뒤에 30년 정도를 참선해야 한다고 했다. 재참선 30년이라는 것이다. 스님들도 그런다는데 세속의 글쟁이가 그걸 보여주겠다고 하면 맞는다.”시인은 그 과정으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창밖을 바라보던 시인이 대학로의 가로수를 보며 도시로 불려나온 나무가 참 순하게도 큰다고 이야기하며 신기하게 바라본다. 기자는 또 시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창밖의 나무들을 한 번 바라본다. 바쁘게 지나쳐 다닐 때는 미처 몰랐었던 것을 시인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는 이야기한다.“번뇌의 물결을 제대로 가라앉히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까지 비춘다.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 이루지 못하지만 해인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거다.”
그리고 시인은 속리산에서의 생활을 산문으로 풀어써볼 계획이란다. 다람쥐가 들마루에 앉아 시인이 준 밤을 까먹는 이야기며 그 곳에서 자연물이 그에게 준 다양한 이야기들을 산문으로 풀어갈 생각이란다.


시집에서 읽어낸 두 가지, 시인에게 묻다

기자는 <해인으로 가는 길>에서 두 가지를 읽어냈다. 삶과 죽음의 그 묘한 경계에서 대해서 그리고 자연에 동화되어가는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가? 맞게 본 것인가?“맞게 보았다. 우선 자연에의 동화와 조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고 있으면 그들이 주는 깨우침이 참으로 크다.‘두 시간’이라는 시를 보면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먹고 명상하고 짐승들과 어울려 지내는 등의 일들이 자연 속에 있으면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서의 두 시간에는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대립과 경쟁, 지배, 억압, 강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소통과 어울림, 화해. 이런 삶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나는 마치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논어에서 말하길 군자는 和而不同이고 소인은 同而不和라고 했다. 여기에서 和의 논리는 조화, 소통, 화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同 의 논리는 강요와 지배,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和는 관계의 논리를 중시하는 것인 반면에 同은 힘의 논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같아지기를 강요하는 것은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관계의 논리를 끊임없이 설명한다. 사실 자연에서 생존의 제1법칙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존의 제1법칙이 약육강식이라고 착각을 한다. 자연에서 나무는 옆의 나무를 지배하지 않는다. 대추나무는 아직도 이파리조차 안 내밀었다. 그래도 먼저 잎을 내민 나무들이 대추나무를 얕보지 않는다. 그리고 대추나무도 자학하지 않는다. 그게 대추의 개성인 것이다. 그렇게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누구나 소중하고 작은 우주인데 말이다. 한 예로 사람들은 뱀끼리 싸우게 되면 독을 뿜으며 싸울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같은 종족끼리 싸울 때는 절대로 치명적인 독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의 논리라는 것이다. 책상에서 공부만 한 학자들은 자연을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공존과 공생을 이야기한다.”그러더니 갑자기 속리산에 있는 시인의 집이야기를 잠시 한다. 집 바로 옆에 있는 계곡의 이야기, 그 곳에서 뛰노는 짐승들의 이야기, 밤에만 물을 마시러 내려오던 동물들이 이제는 낮에도 물을 마시러 온다는 이야기. 그러더니 그 짐승들이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 같다며 시인이 웃는다. 그리고는 또 시인이 키우는 토끼이야기를 한다. 사실은 산토끼인데 그의 집에 찾아와서 먹이를 주며 키웠더니 이제는 강아지처럼 졸졸 그의 뒤를 따라다닌단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해서도 유연해져 있었다.“내 몸에 들어있는 건 모두 친구처럼 받아들이고 가까워져야 한다. 특히 죽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주어진 삶인 만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게 되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어쩌면 삶도 죽음도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속리산에서 몸을 추스르고 사유해가면서 버리고 또 무언가를 얻기도 했나보다. 기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 전까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조금씩 건강해지고 주어진 시간에 충실히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단다. 그리고 그가 한 생각이‘내게 온 아픔도 고통도 다 축복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씌어진 시가 이번 시집에 실린<축복>이라는 시라고 한다.
‘이른 봄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중략)...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축복」중 일부
시인은 말한다. 생명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게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이고 그것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외로움의 공간으로 돌아가던 그의 뒷모습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그곳에서 오로지 자연물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에서 그는 외롭지 않았을까?“외롭지 않을 수 없죠. 눈물도 나고 그러죠. 산 속에 혼자 들어가면서 마음이 아팠고 외로웠고 그랬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마당의 나무도 혼자고 고라니도 혼자고 산등성이에 피어있는 제비꽃도 혼자였다. 생명을 가진 것 중에 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만 혼자 외로운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생각하면 산벚나무도 같이 있는 거고, 제비꽃도 같이 있는 거였다. 내가 숲의 배꼽에 있는 거고 그 숲이 숨쉬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호흡한 탁한 것을 또 숲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외로움만이 아니라 고요하고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롭지만 함께 있는 거였다.”
속리산의 깊은 산중에는 오로지 시인의 집만이 있다. 그래서 깊은 산에 밤이 찾아오고 시인이 불을 끄면 깊은 적막과 어둠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조금씩 주위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단다. 어둠에 적응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집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통유리로 된 창 얘기를 꺼낸다. 밤이 되면 그 유리창바깥으로 별이 하늘 가득 떠 있었단다. 그리고 그 광경은 설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다가 눈을 뜨면 군청색의 하늘에 초승달이 홀연히 떠 있는 광경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시인은 잠을 자다가 자꾸만 깼다고 말한다. 지금쯤은 별이 어떻게 떠 있을까 궁금해서 말이다. 어제는 별빛 보고 자고, 오늘은 달빛 보고 잔단다.“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산 속은 새벽아침이 참 좋다. 그 새벽아침을 생각하며 또 밤을 보내기도 한다.”
인터뷰를 마친 시인은 다시 속리산에 자리 잡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쯤 더 머물면서 지인들과 술 한 잔을 더 기울여도 좋을 텐데,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좋을 텐데 그는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는 시인의 뒷모습은 또 수만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밤 시인은 또 창밖의 군청색 하늘을 보며 별빛과 달빛을 보며 잠을 설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