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에 잠들어있던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수다 떨기
-「붉은 리본」으로 시간의 표식을 깊게 새긴 작가 전경린
2006-07-01 임보연 기자
무의식적으로 전철을 타고 보니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데 문득 가로수의 녹음이 시야를 밝히고 소나기를 내리는 고즈넉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던 아름다운 것들인데 미처 알아주지 못했다. 갑자기 작가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일부의 문장이 생각났다.
‘집을 떠난 지 불과 삼십여 분만에, 내 의식은 그 옛날 고향을 떠나 하루 삼십 리 길을 걷는 무명의 나그네만큼이나, 훌쩍 먼 곳에 이른다. 걷다가 신발들이 현관을 가득 채운 길갓집의 빠듯한 살림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높은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짧은 말 몇 마디로 사람살이의 정황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른 외침과 대답을 우연히 들으며 모르는 사람의 이름 하나를 알기도 한다. 가다 보면 약수터를 만나 목을 축이기도 하고 졸음에 겨우면 늙은 나무에 얼굴을 대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 때 문득 삶이 내게 허용해 줄 절대량을 알 것 같고 머릿속이 맑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어떻게 행복해져야 할지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내 곁의 아주 먼 곳」중에서 일부)
그녀의 붉은 작품들
전경린 작가의 첫 번째(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산문집 제목은「붉은 리본」이다. 왜?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그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제게 이 글들은 마치 십년이라는 숲의 미로를 지나오는 동안 굽어지는 길과 갈라지는 길마다 나뭇가지에 하나씩 묶였던 붉은 리본들 같습니다. 더러는 오래되어 자줏빛으로, 보랏빛으로 바래기도 했겠지요. 그 길을 내가 되돌아갈 리야 없겠지만, 누군가 해 질 무렵 그 숲을 헤맬 때 나뭇가지에 묶인 묽은 길 표식 리본을 발견하고 어떤 모험가가 지나간 길인 것에 안도하고 공감하고 용기를 내기를 바라봅니다.’이것이 그녀의 붉은 리본인 것이다. 그동안 수십 번은 족히 들었을 것 같은 질문임에도 작가는 성실히 대답을 해 준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을 차근차근 풀어내어 준다. 소설가들을 만나면 신선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이다. 문자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익숙한 이들이 말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을 이야기하는 순간이다.“등산로를 가다보면 붉은 색 리본으로 길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붉은 리본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녀는 붉다는 색에서 언어가 주는 주술적인 힘과 강렬함을 전하고 싶었다고도 한다. 그녀는 문장이 붉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언어가 가지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의미가 주는 힘도 있지만 언어 자체에서 전하는 힘이 있다는 것.
그런데 책이 나올 즈음 텔레비전을 보는데‘아차!’싶었다고 한다.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요즘, 붉은 악마들이 떠오르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들의 붉은 리본도 함께 떠올랐으니 말이다. 월드컵 응원을 위한 붉은 리본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단다.‘난 망했어.’그런데 그녀의 산문집을 읽다보니 붉은 리본이라는 제목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동안 전경린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묘하게 붉은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열정의 습관」에서의 선홍색 핏빛 욕망이나「황진이」의 매혹적인 붉은 자태가 그러했다.「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에서의 어찌 멈출 수 없어 가볼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색채도 붉었다. 때문에 그녀가 지은「붉은 리본」이라는 제목은 타당했다.
욕망에 대한 기억
전경린 작가는 서른다섯이 되던 해 일월에 등단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다소 늦은 나이지만 그녀는 빠르다와 늦었다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다. 서른셋 봄, 문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전경린 작가에게 글쓰기라는 행위는‘나 자신과 삶을 일치시키는 방법’이었으며‘내가 살아가는 방법 찾기’였다고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흘러와서 마침내 도달한 것이 글쓰기라는 종착점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먼 남쪽지방 소흡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그 먼 곳에서는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가슴 깊이 숨기고 묻어둔 것이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욕망이었다고 한다. 바로 옆 사람에게조차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번 넘어보겠다고 결심한 과정이 평생을 가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단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했다고. 결국 그녀는 작가가 되어 십여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그 동안 그녀의 문학노트에 잠들어있던 이야기들을 산문집으로 묶어낸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에 대하여 글은 항상 진심을 담는다
10년 동안 문학노트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라. 그것을 끄집어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 이야기들이 이렇게 책이라는 형태로 묶여져 눈앞에 있다. 그것을 보는 그녀의 기분이 어떨까?“크게 테마를 잡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과감하게 빼버린 이야기도 있고 새로 쓴 이야기도 있다. 그 중에는 작년에 쓴 것도 있으며 8년 전에 쓴 것도 있다. 그걸 다시 읽어보고 수정을 했다. 새 작업을 하는 셈이었다. 정말이지 1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결정체들이 만들어져 있었다.”고마운 기분이 들었단다.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글은 언제나 진심을 담는다고 이야기한다. 단편, 단편이 진심의 힘을 담고 있는 것이란다. 산문집에 실린 글들에 대하여 그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이 글들은 그야말로 순정의 자세로 쓴 것들이다.”
그런데 산문집이라는 것이 소설보다는 훨씬 더 사적인 이야기들이 아닌가?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 왠지 은밀한 느낌이 든다.“그렇지 않다. 소설은 나를 요리조리 숨기면서 쓸 수 있는 충분한 장치가 있다. 그런데 에세이라는 것은 숨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니어서 오히려 사적인 모습을 피해서 썼다. 물론 곳곳에서 내 생각이 선명하게 묻어나기는 하지만 말이다.”기자의 선입견 때문일까, 글을 읽는 내내 그녀의 일기장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끄적거려 놓은 단상들이나(여기서 아무 생각 없었다는 것은 책으로 펴낼 의도라든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보이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인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문자로 옮겨 간직하고 있던 것이니 만큼 이 글들은 오롯이 그녀 자신이 아니겠는가. 작가가 이야기했던 숨을 수 있는 소설의 장치도 없으니 말이다.“정말 그렇다. 어떤 것들은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이야기라든가 스치는 생각을 적어두었던 메모에서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그녀의 글쓰기에는 낭만이 보인다
이제는 독자들이 전경린 작가의 소설에 가지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일정량의 기대치가 있다. 전경린의 소설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기대치 말이다. 그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지 묻는다.“글쎄... 나는 지금까지 굉장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흘러왔던 것 같다. 10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궁금해질 게 없는데, 어쨌든 나는 계속 쓸 거고 그들은 읽을 거다. 물론 부담감은 있다. 작가들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주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거다. 심화시켜나가고. 그런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런 점을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그 반복을 좋아한다. 어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그가 자주 사용하는 어투나 단어,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에서 보이는 작가만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 작가의 책을 펼쳤을 때만 느껴지는 그 무엇이 좋다. 그런데 반복을 용납하지 못하고 변화를 원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나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강박을 가진다. 나 같은 작가의 경우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겠다는 욕망보다는 쓰려고 하는 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소설을 썼다. 그래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것 같다.(웃음)”
물론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항상 심각하게 한다. 전경린이라는 색채를 가지고 나로부터 떠나는 소재를 택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그런데 힘껏 옮겨도 많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삶의 온갖 것들’에 대하여
그녀가 지금까지 쥐고 놓지 않는 화두는 과연 무엇인가?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는 그 무엇이 그녀를 지금까지 오게 했으려니 생각하며 물었다.“누구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삶의 온갖 것들’저마다 다른 시각에서 자기가 존재하는 위치에서 삶에 대한 질감을 이야기할 것이다.”외부에서 말하기를 그녀는 여성성에 정착하고 있는 작가란다. 그녀, 이야기한다.“나는 그것에 대해 쓰고 있다. 주체가 여성적이다. 그래서 결국 삶에 대한 것, 여성에 대한 것을 쓰게 된다. 그러다보니 여성적이라는 것이 뭔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어떤 출구들이 있는가를 보게 된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우리 사회에 세 가지의 성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가. 여성, 남성 그리고 아줌마. 그런데 내가 접하는 아줌마들이야말로 가장 암컷다운 존재였다. 자기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성이 아니겠는가? 그 저변에 깔린 것들을 살피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성과 남성, 아줌마라는 세 가지 성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의 구분법은‘사회문화적 성(性)’이라는 것이다. 남성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보다 먼저 사회문화적 남성이 되었다. 그런데‘아줌마’는 사회문화적 성(性)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성(性)이다. 젊은 여성은 항상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큰 의미가 들어있다. 이제 사회문화적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할 것 같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성취향도 다양해지고 변화된 모습들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파고들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맞벌이 부부들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6배나 더 많이 일한다고 하더라. 애 낳고 가사일도 해야 하고 사회적인 위치에서의 일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국에서 결혼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결혼 안하고 산다는 것은 또 피폐하다.”
작품의 화두에 대한 이야기, 삶의 온갖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 우리사회의 성에 대한 것으로 흘러오며 그녀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사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우리사회의 성(性)에 대하여 논하기를 꺼린다. 페미니즘 작가라는 굴레가 씌워질까 두려워서이다. 그런데 전경린 작가, 이에 대해서 너무나도 술술 이야기를 잘 풀어놓고 있지 않은가. 신기하다.“오히려 이 같은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은 방어적인 자세일 수 있다.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비단 여성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함께 풀고 상승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잘못 이해되어 페미니즘 작가로 불릴까봐 몸을 사리게 될 수도 있다. 외국의 경우 페미니즘이라고 하여도 다양한 갈래로 나뉘지만 우리의 경우, 대표적인 페미니즘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는가. 나 역시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의 틀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가전제품을 설치할 때에도 수평을 유지하라고 하는데...(웃음)”
작가 5년차, 쓰고 싶은 것 다 쓰다
“소설과 함께 삶이 많이 변해왔다. 소설을 타고 달렸던 이고 왔던 두려움 없이 멀리 이동해온 것 같다.”
전경린 작가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생각한 것은 소설과 흘러가면 어디로 흘러가던 두렵지 않을 것이란 거였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에서 글 쓰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겠다 싶다. 소설을 빼고 당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겠다 싶다. 아닌가?“아니다. 한 3년 정도 일체 글을 안 쓰고 잔잔한 바닷가에서 살아보고 싶다. 등단 이후 거의 매년 책을 냈다. 두 권을 발표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작업량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허용된다면 3년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문득 이 사람에게 시비가 걸어보고 싶어졌다. 작가라는 업을 가진 이들은 매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쯤은 자유로운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허용되면’3년쯤 쉬고 싶다니, 언제든‘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죠. 선택이죠. 그런데 때를 기다리고 조정을 해야 한다. 인생에 있어 핵심적인 단어는‘인내’가 아닌가 싶기도 한다. 지금 쓰고 싶은 글을 당장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글을 완성해야 비로소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작가가 아닌 다른 일을 선택했다면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가게를 냈다면 분명 망했을 것이다. 사람들이‘재능’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재능은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거다. 때문에 훨씬 집중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보통 사람처럼 이것도 할 줄 알고 저것도 할 줄 안다면 아마 글을 못 썼을 것이다. 나는 글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 글을 쓸 수밖에.”
그래도 글을 쓴다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은가보다. 사실은 힘든 작업이라고 털어놓는다.“글을 쓴지 5년 정도 되었을 때, 이미 쓰고 싶은 이야기를 다 썼다.”그래서 작가들에게 두려운 것이‘고갈, 소진’과 같은 단어란다. 그래도 전경린 작가, 십여 년을 써왔다. 그것도 꾸준하게. 그렇다면 글쓰기의 고충에 대하여 조금 더 들어보자.“글을 쓴다는 것은 계속 쓴다고 해서 더 잘 쓰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어렵다.”이제는 글을 쓰는 것이 일로 생각된다고 이야기한다.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도 필요하단다. 그동안 너무 즐기는 것을 써왔다면서 말이다.
글쓰기 작업은 일상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당신의 글쓰기는 어떤 작업일까? 힘들지, 고통일지, 즐거운지, 그리고 일상인지 특별함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인지 묻고 싶다.“신발장수가 헌 신 신는다고 하더라. 일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만은 없다. 작가들끼리 이런 농담을 하기도 한다. 소설가는 너무 좋은데, 소설만 안 썼으면 좋겠다고...하하하... 많이 써도 여전이 새롭게 어렵고 힘들다. 쓴다는 것은 말하는 것과 다르다. 존 버그라는 사진작가는 이런 말을 하더라.‘세상의 풍경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다’라고 말이다. 진실은 언제나 숨어있는 것이다. 숨겨져 있다. 가려져 있는 커튼을 젖히고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 글쓰기이다.”
기자는 그녀의 이번 산문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았다. 전경린이라는 작가가 행복해지고 싶어 하고 행복을 동경하는 듯이 보였다. 물론 인간이라면 행복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적어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일상에 꿋꿋이 발을 디디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찾았다. 이런 내 감상을 전하자, 작가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내가 행복을 동경하는 사람은 아닌데 라며 말이다. 그리고‘내가 일상에 꿋꿋이 발을 디디고 있었구나.’라는 말을 되뇌이며 말이다.“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남다르게 읽어낸 것 같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이 일상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책에서 그녀는‘일상이란 핵과 같은 상처를 감싸고 입을 꼭 다문 조개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경린 작가의 입을 빌어 보자면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짧은 일탈에 불과한 것이란다.“암에 걸려서 3개월 뒤에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3개월 뒤에 죽는다고 해서 일상을 폐기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으로 가지고 살 수 있다면‘행복’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일상에 사랑이 없다면 참 무의미할 것이다. 바로 일상을 유지시키는 힘이 사랑이다. 하다못해 자기애라도 있어야 한다.”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전경린 작가는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느낀다고 한다. 물론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여행을 가서 일주일만 지나도‘내가 먹던 그저 그런 밥’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꽃구경도 멀리 안 간단다.“우리 동네 꽃이 제일 예쁘더라.”면서 말이다. 일상에서의 행복을 느끼려면 감각기관, 온몸의 촉수를 세워야한다고 하는 그녀, 스스로를 참으로 피폐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글을 쓰다보면 5~6개월씩 매달리게 되고 삶이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상에 나가보면 새롭고 낯설고 심지어는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고 한다. 어쩌면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기에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때문에 글을 쓰는 건 어떤 면에서 보면 이중으로 사는 것이고 자기 현실에서 실종되는 것이다. 동시에 글을 쓴다는 행위는 살아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변화
그녀의 이번 산문집을 읽으면서 앞으로 뭔가 변화할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당신의「붉은 리본」은 회고록인 듯도 하고 한 번의 정리과정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이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글을 쓸 때, 빠지는 깊이를 조절하고 싶었다. 이제 내 인생의 서사는 최소한만 만들고 싶다. 젊은 시절에는 내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싶어 했다. 젊었을 때에는 실존을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보니 사물의 존재, 배경의 존재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재미있는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 10년 동안 쓴 글을 보니 너무 심각했다. 이번 산문집에서 쓴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재미있다고들 하더라. 웃게 해 주는 게 좋았다. 변하는 것은 과정이고 시기의 문제인 것 같다.”
처음에는 실마리만 보이면 붙잡고 쓰기 시작했지만 지금의 작가는 붙들고 있다가 끝까지 보여야 비로소 쓰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렇게 조금씩 그러나 분명 변해가는 것이 또 사람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변하지 않아도 혹은 변해도‘전경린’작가 안에서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나는 소설이란 세상에 발붙일 곳을 잃고 떠도는 영혼에게 여태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운명의 자리 하나를 창조하여 마련해주는 작업이라는 말에 공감을 느낍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를 하나 창조해내는 일, 인생에 새로운 길 하나를 틔우는 일, 여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인물 하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전경린의「나의 글쓰기」중에서)
그녀는 분명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쓰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는 더욱 붉게 도발하게 될 것이다. 가끔 하나의 문학 작품은 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글을 쓰는 내내 피어날 듯 말듯 은근한 향기를 뿜으며 일상을 포기한 채 오로지 자신에게만 매달리게 하며 작가를 희롱하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장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망설임 없이 꽃잎을 활짝 벌리는 야비한 꽃. 그러나 그 꽃은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결코 뿌리칠 수가 없다. 아무리 일상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할지라도.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