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분쟁의 역사(4)-르완다 내전

상상을 초월한 검은 대륙 최대의 대학살,신은 죽고 없었다

2006-08-01     임석빈 편집주간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는 유독 많은 분쟁이 발생했다. 그중 가장 비극적인 분쟁으로 기억되는 것이 있다. 열강들의 식민분리주의로 인한 종족간 대립이 이웃 부룬디와 구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로까지 파급되어 확대된 르완다 내전이다. 이렇게 해서 싹튼 르완다 두 부족 사이의 증오와 갈등은 오늘날 아프리카 최대의 재앙이며 인류가 저지른 상상을 초월한 죽음의 폭거와 대학살로 이어졌다 .


역사적 배경

르완다 내전의 뿌리는 1919년 콩고를 거점으로 한 벨기에 군대가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고 위임통치령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르완다는 14세기경 북방에서 이주해온 투치족이 후투족을 병합하여 왕국을 세우며 시작되었으나 벨기에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독립을 잃게 된다.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친다. 르완다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85%)을 고립시키고, 소수 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그들을 교육시켜 식민 통치의 말단 관료 집단으로 삼은 것이다. 1925년 벨기에는 통치기본법에 따라 국왕 및 추장에 의한 전통적 지배체제를 통해 식민지 통치체제의 상징적인 상부구조로 삼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프리카에서도 독립국가 건설이 붐을 이루자 1946년부터는 르완다도 벨기에 신탁통치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1956년에는 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지방 평의회가 설치되었지만 1959년 투치족의 왕이 죽자 투치족의 한 부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한다. 이에 반발한 후투족은 폭동을 일으켰고 지배세력이던 투치족 중심의 므와미 체제가 붕괴되면서 약 8만 명의 투치족이 국외로 추방되고 마지막 군주 키게리 1세도 망명길에 오른다. 1961년 6월, 유엔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시 하에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이 승리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였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이듬해 7월 르완다는 독립을 이룩하고‘그레구아르 카이반다(G. Kayibanda)’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 되면서 르완다는 평화의 길목으로 가는 듯 했었다.?

분쟁의 발발요인

독립 후 르완다 평화는 1963년부터 강제 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깨지고 만다. 후투족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63년 12월 약 2만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계기로 양대 부족간 갈등의 골은 점점 더 커지고 만다. 그 후 후투족 군부출신‘하비야리마나(J. Habyarimana)’소장이‘카이반다’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75년에‘국가발전혁명운동당(MRND)’를 설립,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한다. 그는 MRND 주도에 의해 '78,'83,'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3선을 거치면서 소수 투치족을 억압했다. '90년6월‘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주변국에 추방되어 난민 화 된 투치족이 RPF(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따라서 소수파의 지배계층이었던 투치족과 다수파의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으로 르완다 내전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암살, 결정적인 갈등으로

내전에 휘말린 르완다는 1993년 8월 UN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내전 종식과 과도연립정부를 구성하는‘아루샤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양 부족간에 구성된 잠정정부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UN은 동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2,500명의 평화유지군(UNAMIR)를 파견했다. 아루샤 협정조약은 연립정부 총리직에는 투치족을 임명하도록 약속했었다. 그러나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같은 후투족인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선임하자 투치족측은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며 정국은 불안해져가기 시작했다. 르완다 사태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테러 공격에 의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갈등은 폭발했다. 르완다 정부 방송은 대통령의 암살 배후로 투치족 게릴라들을 지목했던 것이다. 이에 대통령 경호원들이 중심이 된 극우 후투군 조직들이 4월7일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3명의 각료 및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후투족 정권은 다음날부터 소수 종족인 투치족에 대한 조직적이고도 무차별한 학살을 시작했다. 투치족이 무차별 학살하자 투치족 반군인 RPF(르완다 애국전선)는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했고 그로인해 부족간 항쟁은 일거에 불타올랐다. 정부군(후투족)과 반군(투치족)의 갈등은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까지 이어져 대량학살 및 탈출사태가 발생하였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단 3일간의 교전으로 약 2만명이 살해되는 끔찍한 만행이 자행되었다.

피의학살은 시작되고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투치족 무장반군(RPF)이 4월12일 수도 키갈리에 진입하자 정부군(후투족)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동부의 주요도시 및 국경지역에 거주하던 20만명의 투치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두 부족간의 내전이 치열해지자 1994년 4월30일 UN은 PKO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 270명의 평화유지군만 제외한 전 병력을 철수하였다. 투치족 난민 들은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로 필사적 탈출을 시도했다. 양 부족간의 보복살인이 지속되면서 사망자는 50만명이 넘어섰고, 난민은 250여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 난민 행렬은 인접국으로 난민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러자 UN은 사태의 악화에 따라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PKO의 재편을 추진하였으나 각국의 호응이 부진함에 따라 6월22일 2,500명을 파견하기로 한 프랑스의 독자 파병을 한시적으로 허용하였다.

투치족 반군의 승리

투치족 반군이 수도 키가리를 장악하고, 프랑스군이 서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하는 등 승리함에 따라 투치족 난민은 르완다로 귀환을 개시하였다. 1994년 7월23일 정권을 잡은 투치족 반군은 르완다 신정부를 출범시키는 한편 부족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후투족 온건파인‘비지뭉구’와‘트와기라뭉구’를 각각 대통령 및 총리에 임명한다. 투치족 신정부는 카가메 중장이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정치적 안정의 유지를 꾀하는 한편, 이웃 인접국 등과 난민문제 협상, 후투족 구 정부군의 무장해제 및 난민귀환 등을 협의하였다. 한편 구 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사 및 구 정부군 3만명은 자이르의 고마 지역에 피신하면서 고마 난민촌을 장악하고 일본 자위대 수송차량을 공격하는 등 무력충돌을 선동하며 난민촌 내 치안불안을 야기 시키고 있었다. 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사및 정부군은 난민촌에서 신디쿠브와브 전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후투족 난민들을 구 정부군 출신 게릴라에 편입시키는 등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후투족 구 정부군은 망명지인 자이르에서 다시 르완다로 월경하여 1995년 남서부지역인 냐마새크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였다. 이후에도 후투족 강경파 무장세력은 우간다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에서 게릴라를 형성하여 정부군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97,'98년에도 비교적 격렬한 충돌은 계속됐다. 그러나 1998년 3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국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를 공식 방문하였다. 클린턴은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동 분쟁의 확산을 좌시하지 않겠다는'엔테베 선언'을 통해 비극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내전의 강도는 주춤했고 2000년에 접어들면서 르완다는 전반적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 난민 구호책

UN은 세계보건기구(WHO), 아동기금(UNISEF) 등 11개 UN 산하기구를 통합 조정하는 공동구호대책을 마련, 1994년 7월부터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UN은 난민구호 등을 목적으로 1994년 프랑스군과 미군 등 총 3,300명의 병력을 긴급 투입하여 난민의 대량희생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유엔은 사태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악화되자 결국 1996년 철수를 개시하여, 2년 반에 걸친 활동은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투치족 신정부는 1994년부터 주변국에 자국 난민의 귀환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후투족에 대해서도 국가 재건에 동참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투치족의 보복이 두려워 귀국을 회피함에 따라 르완다 난민사태는 장기화되어갔다. 국제사회도 구호식량, 의약품 보급 및 야전병원 설립 등 구호활동을 전개했으나, 소말리아 사태에서의 실패 경험 등의 부담으로 직접적인 개입을 회피하면서 당사자 간의 자구 노력을 유도하고 아프리카 국가의 참여를 통한 장기적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수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재정지원에는 국제사회의 구호활동도 한계가 있어 난민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150만 학살, 250만 난민발생, 신은 죽고 없었다.

불안정한 국내정세로 주변국을 떠돌며 귀국을 거부한 르완다 난민의수는 수백만에 육박했다. 내전의 멍에를 고스란히 안은 수백만의 난민들은 자이르,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등 인접국의 난민수용소로 분산수용 되었으나, 그들은 기아와 콜레라 등 질병에 시달리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자이르 고마 난민촌에서는 1994년 7월 한 달 동안 43,000명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엉뚱한 곳에서도 피를 헌납해야했다. 르완다 난민의 대량 유입에 의해 주변국 부룬디와 자이르의 내전이 악화되면서 해당 국가들은 르완다 난민의 축출을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난민들은 피난국의 내전에 휩쓸려 수십만이 학살되는 등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이 속출했다. 난민의 피란 및 이동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던 것이다. 1997년에는 자이르에서 귀환 중이던 르완다 난민 20만명이 행방불명되는 최악의 사태도 발생했었다. 1990년 이후 1994년 분쟁 까지만 르완다는 국민 814만 명중 약 150만 명이 학살되는 끔찍한 희생을 치러야했다. 또한 250여만명의 국민들은 난민이 되어 변방을 떠돌며 기아와 질병에 고통 받거나 죽어가야 했다. 신은 죽고 없었다.

아픔은 치유될까

"왜 아이들도 죽였죠?""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기 전에 아예 씨를 말리려 한 거죠. 인종청소를 하려 한 것입니다.""지금은 어떻습니까.""지금은 갈등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화해했습니다.""부모와 형제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고 잊을 수 있습니까.""쉽지는 않죠. 그러나 우리는 갈등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좋지 않은 것이죠. 힘들지만 잊을 수 있습니다."[무다히과 앤드류(32),루하샤 에마뉘엘(32)]
벨기에 식민통치 기간의 이른바 ‘분리통치’로 만들어진 부족간의 갈등은, 벨기에 식민당국의 무책임한 독립 선포 이후 급조된 국가 안에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벨기에로부터 이 지역에 대한 패권을 물려받은 프랑스로서도, 개입을 손쉽게 해주는 내부의 갈등을 해결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갈수록 증폭돼 왔던 갈등이 폭발하려고 할 무렵, 이 사태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방지능력을 가지고 있던‘평화의 사도’미국이 나섰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르완다는 미국이 탐낼 만한 ‘전략적 가치’나 ‘전략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건은 벌어졌고 ‘지상의 생지옥’이 연출됐다. 르완다는 지금 대학살의 아픔을 딛고 화합과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의 의지가 드높다.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국가를 재건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로 변모했고 이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찰스 무리간데 외교부장관은 말했다. 실제로 르완다는 세계은행이 지난 2005년 보고서에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 선정(善政)과 경제개혁 측면에서 대표적인 모범국가로 선정됐었다. 대학살을 저지른 후투족 정권을 내몰고 내전끝에 안정을 회복시킨 카가메 대통령은 외국인투자가들 앞에서 1995-2005년 르완다는 평균 7%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마음까지 가난해선 안된다"는 카가메 대통령의 통치철학이 르완다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 아름다운 강과 숲을 가진 이 나라를 한때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렀었다.NP

식민분리주의에 희생된 피의 내전

인류 최대의 재앙이며 상상을 초월한 죽음의 폭거. 하지만 전 세계 대중매체들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마도 못살고 무지한 사람들이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서 그들끼리 치고 박은 종족투쟁쯤으로 아는 것 같다. 아니다. 150만명의 죽음은 서방 제국주의의 오래된 분리주의 식민정책의 결과임을 인식해야 한다. 벨기에는 1916년부터 1962년까지 40년 가까이 르완다를 지배하면서 철저히 종족 분리정책을 했다. 소수인 투치족에게 종족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종족의 실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그들에게 더 나은 정치, 경제, 교육의 특혜를 베풀고 그 대신 후투족에 대한 통제권을 대신 행사하도록 했다. 벨기에는 한쪽에만 특혜를 베풀면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반목을 키워갔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이미 영국에 의해 정착된 다단계 식민지배 정책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종족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다수 후투족의 반발과 분노가 커가는 것은 너무 당연했지만 서방 제국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르완다 종족 간 내부 반목을 확대 조명함으로써 식민 지배의 합리화 명분을 국제사회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투족의 사회적 분노는 투치족 2만명이 살해된 1959년 대규모 항쟁 이후 끊임없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4년 4월 하바리마나 대통령 암살 사건 직후 순식간에 르완다 전국은 킬링필드로 변했다. 이후 프랑스는 과거사를 묻지 않은 채 당시 암살사건 책임을 현 대통령에 전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벨기에는 일체의 간섭을 회피했으며, 당시 유엔 안보리는 150만명이 죽어가는 현장을 옆에 두고서도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대학살 사태의 이면에는 서방의 분리주의 식민정책이 역사적 원인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역사적 피폐는 르완다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친미국가였던 라이베리아 역시 찰스 테일러 대통령이 1989년 집권한 뒤 지금까지 50만명이 죽었다. 미국은 아프리카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대신에 그들의 독재정권을 눈감아 주었다. 서방세계는 라이베리아 내전을 그들만의 종교전쟁이라며 무관심으로 일관하지만, 그들의 필요성이 있는 이라크에서는 엄청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미국의 양면성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라이베리아 내전은 이미 시에라리온, 기니, 코트디부아르에 영향을 주어 그곳에서도 무고한 민중들이 죽었고 평화로웠던 콩고민주공화국도 역시 내전을 겪었다. 소말리아 이후 중서부 아프리카에서만 지금껏 내전으로 400만여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들은 전쟁만이 아닌 기아와 에이즈에 방치된 채 끝없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강대국들의 자기중심적 오만과 분리주의 식민정책의 결과가 오늘의 중동지역 및 아프리카의 불행을 낳은 것임을 처절히 인식해야 한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