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ME STORY Ⅰ >한국적인 것들의 존재이유

‘추억의 한 편으로 밀리지 말아야 할 것’

2006-09-01     임보연 기자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국적인 것과 고전적이라는 단어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 동일시에는 사전적인 해석을 제외하고 한국적이라는 것이 예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스럽다는 것은 이미 동시대의 것을 논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한국적이라는 것이 지나간 세월만을 추억한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시작은 한국적인 것이 추억의 한 편으로 밀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들을 고찰함에 따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게 된다. 추억의 한 자리만을 차지하기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고 강한 것이 또 한국적인 것들이 그리고 우리들, 한국인이 가지는 힘이라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은 그렇게 아름답고도 강하게 우리들을 지탱하고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우리들만의 건축양식 처마: 작은 생명까지 수용하는 따뜻함

우리의 건축물에는 서양건축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가 있다. 바로 처마이다. 처마는 건물의 기둥이나 벽체의 바깥으로 내민 지붕을 일컫는다. 이는 여름철 높게 뜬 해가 방과 마루를 길게 비추는 것을 막아주어 실내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겨울에는 이와 반대로 실내를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비가 내리는 날이면 효과적으로 막아주기도 한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마저 피하는 공간인 처마.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들던 공간도 처마 밑이었으며 강남 갔던 제비가 따뜻한 봄이 되면 돌아오는 곳도 처마였으리라. 처마를 찾아들었던 제비는 그 안에 제 집을 짓는다. 사람들은 제 집을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새들을 쫓지 않고 더불어 살았다. 오히려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오는 3월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연관이 그대로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적인 자연관, 자연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며 그들을 닮아가고 어느 순간 동화되어가는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건축 양식이 점점 서양의 것을 닮아가면서 처마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이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한다.


恨의 정서, 살풀이의 마주함

내가 한국 사람임을 강조하는 일이 글로벌이니 세계화니 하는 단어에 역행하는 촌스러운 행위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으나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거의 무지의 상태로 전통이라는 것을 마주하였음에도 가슴 속에 무언가가 뜨거움을 토하게 되는 것. 살풀이라는 춤사위를 눈앞에 마주하던 순간 역시 그러했다. 고작 삼십년도 못 채운 나이에 가슴 속에 무슨 한이 있을까. 그런 기자가 살풀이라는 춤사위를 마주했을 때 느끼던 뜨거움이란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작년 여름 한혜경 교수의 공연을 보기 위하여 찾았던 공연장. 그녀의 무대는 보는 이의 숨을 턱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얀 한복을 입은 그녀가 어두운 무대 위로 등장했을 때, 이미 굉장한 것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살풀이’라는 이름의 춤사위는 조용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공기를 파괴해나가고 있었다. 마치 한을 털어버리고 날아오르려는 듯 그녀의 움직임은 서글프고 애잔했으며 한편으로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단호함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막이 열리고 불 꺼진 무대 위에 실핏줄 같은 여린 조명이 한줄기 비쳤다. 그리고 하얀 한복을 입은 춤꾼이 등장했다. 흑과 백의 명확한 대비, 그리고 살풀이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얀 소매 끝 맵시 있는 손놀림과 살짝 들어올린 치마 끝에 비치는 버선코가 아련했다. 맺힌 것을 풀어내기 위함에도 여전히 속을 감추고, 여전히 조금씩 참으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 순간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놓쳐버릴까 하여 자세도 꼿꼿이 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 움직임에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춤의 공기에 휩싸였다. 그런 멋진 기분을 선사하는 춤꾼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라의 명맥을 잇다: 옥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오던 하나의 존재로 설명되는 옥새. 그것은 나라의 상징이었다. 황제나 임금의 상징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옥새는 그것을 소유한 이만이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제작하는 방식도 철저하게 비밀리에 계승되어졌다. 즉 옥새는 왕가의 비기(秘器)로 제작기법 역시 비전(秘傳)으로 전수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 비기를 계승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민홍규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국새를 만든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에 의하여 이어지던 명맥이 민홍규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기호 선생은 민홍규를 옥새전각전수자로 인정하면서 세불이라는 아호를 정하여 주었다. 그가 전수받은 것은 옥새와 동장으로 동양 3국 가운데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계승되고 있는 전통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76년부터 정기호 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던 그. 현재까지 30여 년이라는 세월을 옥새와 함께 한 것이다. 스승이 그에게 항상 강조하던 것은‘정신이 있는 가운데 기교가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이었다. 늘 깨어있는 정신을 강조했던 것. 심지어 예전에 옥새나 동장을 임금님 앞에서 직접 새기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일점의 실수가 있더라도 왕을 희롱하였다 하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했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과거 임금의 비기로 전해지던 옥새나 동장은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동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민홍규는 당시 두 전직 대통령에게 동장을 만들어주며 절대로 욕심이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바 우리 최초의 고대국가는 하늘의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 국가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옥새는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탄생하고 인(印)이라는 용어가 쓰이면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상징물인 것이다. 조선시대 나라 안으로는 왕권의 상징이자, 나라 밖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던 옥새.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함께 하던 그 존재의 혼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나라의 명맥을 공고히 하는 것은 아닐까?
옥새전각전수자인 민홍규는 전통의 모습을 이어가는 장인의 그림자가 깃들어있다.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응축과 한 우물을 파는 고집스러움이 필요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에 어지러움이 느껴지기까지 한 요즘이기에 그의 모습에 더욱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가 만들고 있는 옥새는 단순히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있는 혼을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그리고 국가적 자존심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리라.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