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헤어짐, 이산가족 상봉

‘눈앞의 어머니 산소를 보며 건너지 못한 압록강’

2006-09-01     임보연 기자
이산가족 상봉은 어찌 보면 두 번의 헤어짐을 야기하는 아주 비정한 형태의 만남이다. 수십 년간 소식도 모르고 지내다 생존소식과 함께 단 몇 시간의 만남만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평생을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내 핏줄이 살아있음에 안도하며 그리움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산가족, 그들의 운명은 자신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잘못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 맞물린 채 형성되어 버린 하나의 눈물어린 가족형태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현대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라고.
1945년 해방 뒤 국토의 분단 상황과 6.25전쟁의 발발, 이후 이어진 냉전시대의 소산물의 하나로 생성된 것이 바로 이산가족이다. 남북의 분단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됨에 따라 가족과 헤어진 채로 나이가 들어가고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모른 채 눈을 감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더 큰 비극과 슬픔으로 우리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과 한숨 속에서 이산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먼저 살펴보게 될 것은 이산가족의 생성 배경이다. 한국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피해 혹은 극심한 생활고와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나 해외로 이주했던 사람들,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 등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이들의 경우 지금도 중국이나 소련, 일본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후 6.25 전쟁 당시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 강제로 납북된 사람들로 이산가족의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적십자 회담을 통해 여러 차례 거론, 1983년 2월,‘일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 위원회’가 결성되는 성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30일, KBS의‘천만 이산가족 찾기’생방송 프로그램이 전 국민의 관심 속에서 방영되었다. 이를 통하여 일부 이산가족들의 재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처음 기획 당시에는 95분으로 계획되었으나, 자신의 핏줄을 찾고자 하는 엄청난 신청자들로 인하여 방송시간이 연장, 사상 최대의 방송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려 138일 동안 총 453시간 45분이 방영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긴 방송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헤어져 그리움으로 눈물짓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으리라. 이 기간 신청접수만 하여도 10만 952건에 달했으며 이 중 5만 3,536건이 출현,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중 1만 189건의 상봉이 이루어져 19.03%의 상봉률을 기록하였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보며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산가족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의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결과에 따르면 새벽 1시까지 이 방송을 시청한 적이 있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53.9%에 달하였다는 것으로 관심의 정도를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이산가족 당사자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흰머리가 늘어가고 하나 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 다시 한 번 1983년 기획되었던 이산가족 찾기가 재현된다면 국민의 몇%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상봉 장면을 지켜보게 될까. 몇 년의 세월이 더 흐른다면 헤어진 가족을 찾겠다고 신청하는 이들의 수는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산가족이라는 단어는 역사책에 존재하는 아련함으로 남게 될 것이다 더 늦게 된다면 가슴의 한을 품고 눈물 흘리며 사라져갈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 상황에서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선언이라니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 아닌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노력

정부 역시 지속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기는 하였으나 사실 2000년 이전에는 단 한차례의 상봉을 가졌을 뿐 별다른 상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에 우선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생사 및 주소의 확인, 서신교환의 상시화, 상봉 정례화 등을 추진하면서 강한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는 남북 당국회담과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협의, 북측에 호응을 촉구해왔다. 그리고 2000년 6월 남북정상간의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제 3국을 통한 상봉 등 민간차원의 이
산가족 교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교류의 질적, 양적 확대를 유도하고 있는 중이다.
제 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는 우선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8.15즈음하여 이산가족방문단의 교환이 합의, 정부와 대한적십자사는 방문단을 선정하여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대한적십자사의 사무총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이북 5도 위원회, 이북도민연합회,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등 이산가족 유관단체와 정부관계자, 언론계, 학계, 여성계, 법조계 전문가 등 12명으로 인선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정 기준을 마련하는 등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2000년 6월 22일의 일이었다. 제 1차 적십자 회담을

통하여 방문단의 교환 일정이 확정된 후 인선위원회를 개최, 공정성과 투명성, 신뢰성을 원칙으로 하여 연령, 가족관계, 과거 신청여부 등을 기준으로 1차 후보자 400명을 컴퓨터로 공개 추첨하였다. 이들 중 사망한 사람이나 건강진단 결과 부적격자를 가려내고 북측에 생사ㆍ주소확인을 의뢰할 후보자 200명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생사ㆍ주소확인 후보자 200명의 명단은 남북 연락관 접촉을 통해 교환(7.16)하였다. 우리 측은 북측이 의뢰한 200명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여 단시일 내에 198명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하였으며, 북측도 우리 측 의뢰자 200명 중 138명의 생사ㆍ주소를 확인하였다. 우리 측은 북측으로부터 통보된 확인 결과를 토대로 이산가족의 연령과 가족관계를 기준으로 최종방문자 100명을 선정하였으며, 2000년 8월 8일 남북 쌍방은 최종 방문자 명단을 교환함으로써 제 1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지난 6월 19일부터 30일까지 금강산에서 제 14차 이산가족 상봉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남북 각 200명의 가족들이 만남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아직도 만나지 못한 채 한숨과 눈물로 살아가는 이들이 10만 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만남의 기쁨으로 달래기에는 너무 큰 숫자가 아닌가.
또한 신청대기자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더욱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지난 5월 말의 집계에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2만 5천 627명 가운데 2만 8천 994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기다림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사라져간 것이 안타까움을 더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 측이 이산가족 상봉 중단을 선언한 날, 북쪽 가족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던 전남 화순의 김기황 씨의 장례가 치루어 지고 있었다. 99세의 생을 마감하던 그 날 들려오던 이산가족 중단 소식은 그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했을까.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8월 15일 화상상봉의 예비 순번자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99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한 것은 만남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싶어 마음이 더 아파온다.

상봉중단 소식에 무너지는 가슴

지난 7월 19일 북한의 남북 이산가족 중단이 선언되었다. 이 선언에 가슴이 무너지는 이산가족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정부에서는 이들 선언을 북한식 상호주의로 판단하였다. 즉 제 19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남한이 미사일 발사와 인도주의적 지원문제를 연계, 쌀 차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작용으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남북 관계의 판깨기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지만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8월 8일부터 삼일 간 예정된 화상상봉 중단의 배경이 남한의 쌀과 비료 제공 보류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었다. 북측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쌀 차관 50만 톤을 요청하였으나 남측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6자 회담의 복귀로 의제를 한정지어 북측의 제한을 수락하지 않았다. 남측 수석대표 이종석 통일부장관은 그 자리에서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할 때까지 쌀과 비료의 지원을 유보할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어 북한이 짐을 싸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회담은 조기종결 되었다. 남측의 쌀과 비료 지원 보류에 북측에서도 인도적 사안으로 분류되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면회소 중단이라는 카드를 내놓은 것이라 판단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측이 쌀과 비료의 지원을 재개한다면 이산가족의 상봉 역시 재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주고받기 식의 형태가 옳은 것인가 의문을 품게 한다. 하지만 이산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해보면 주고받기 식의 형태라도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상봉의 재개가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 사례를 살펴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2001년 10월로 예정되었다 6개월만인 2002년 4월 다시 열린 상봉의 지연은 북한이 9.11테러이후 강화된 우리 측의 경계태세 강화를 문제 삼으면서 야기되었다. 그리고 당시 청와대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가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이번 상봉 중단 사태는 어떤 방법으로 또 한 번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될지 주목되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입장에서도 식량 문제 해소와 경제 재건 등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남북관계의 완전한 단절은 부담스러운 입장이다.

  이산가족 상봉의 민간차원 교류

이 같은 상황에서 민간차원의 교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당국 차원의 교류 추진과 병행하여 개별 이산가족 교류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제 3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민간차원의 교류는 실질적으로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민간차원의 남북 이산가족의 교류는 어떤 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선 이산가족이 민간차원의 경로를 통하여 접촉을 하고자 할 때에는‘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통일부 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접촉이라 함은 남한과 북한의 주민이 서로 정보나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의사교환의 방법과 수단, 장소 등을 불문하고 어떤 형태로든 특정 내용의 의사가 교환되었다면 접촉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생사가 확인되어 교류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한반도 내에서 교류, 접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나 현재까지 남북 당국간의 합의에 의한 공식적인 이산가족 교류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을 감안하여 제 3국을 통한 교류와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제 3국인이 북한 주민과 연락을 통해 주소와 생사를 확인하거나 제 3국인이 직접 북한을 방문, 탐문하는 방법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제 3국인인 친척이 재북 가족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게 되며, 이는 주로 중국 조선족의 중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제 3국에서의 가족 상봉은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것은 물론 재북가족이 정식 여권을 발급받지 않고 나오는 경우 신변상의 불이익 등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산가족 교류의 주선은 비영리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북이산가족은 민족적 수난에 의해 발생하게 된 것이며 이산가족의 재회와 재결합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자비에 의한 교류와 왕래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소요 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남 법령에 의거하여 지원받을 수 있는 경비는 남북한 왕래에 필요한 숙식비, 교통비 등의 기본적 경비와 왕래에 소요되는 경비 중 개인별 부담이 적절하지 않은 경비 등으로서 소요된 경비의 범위 내에서 지원되며 지원 금액 생사 확인 80만원, 상봉 180만원, 교류 지속 40만원이며 각 경우 1회에 한정하고 있다. 또한 납북자 가족, 국군포로 가족, 생활보호대상자, 의료보호 대상자, 70세 이상의 경로 연금 수령자 등의 특별 지원 대상자에게는 2배 범위 내에서 소요 경비를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산가족 교류경비를 지원받으려면 전국 264개 이산가족 민원창구에 교류가 성사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지원금 신청서, 북한 주민 접촉 결과 보고서 등 관련 서류를 제출하여 대한적십자사의 접수, 심사를 거쳐 심사일로부터 20일 이내에 원화로 지급한다.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하는 민간단체인 남북이산가족협의회 심구섭 회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8월 중순 이산가족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출국했었기 때문에 그 이후 인터뷰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이번 출국은 북한에 있는 여동생과 남한의 오빠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4년 전 남동생을 찾은 것을 계기로 하여 이번에는 여동생과의 눈물어린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이번 상봉에서 함께 울어야만 했다. 어머니의 산소를 눈앞에 두고 찾지 못하는 가슴 아픈 장면 때문이었다. 북한의 어머니 산소가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는 현실에 그들 모두 안타까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결국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차례상을 차리고 절을 올려야만 했다. 56년 만에 그들 남매는 부둥켜안고 울 수 있었으며 혈육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의 산소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사진4, 5, 6첨부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절을 올리는 모습과 여동생과 재회한 모습: 여동생의 모습은 필히 모자이크 처리 요망)
중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심 회장은 여전히 이산가족 상봉 문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탈북 국군 포로와 가족의 만남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현재 탈북 하여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국군 포로의 행방을 찾아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심 회장이 메일로 전한 소식에 따르면 국군 포로 가족들은 8월 20일 한국의 작은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가 세 가족과 상봉을 하게 되며 안전한 장소에서 머무르게 된다고 전했다.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영사관에 들어와 안전하게 한국으로 오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산가족들의 상황도 천차만별이었다. 남한에서 의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오빠를 찾은 북쪽의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쪽 오빠의 부인은 그들의 만남을 강하게 거부했다. 경제적인 손실을 이유로 들며 왜 이제 와서 그들이 만나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상봉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의 여동생은 쓸쓸하게 돌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이 많은 노부부와 아들의 만남을 주선했던 경우를 전해 들으며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이들 노부부는 6.25당시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아들 한 명은 남겨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을 찾고자 도움을 요청하여 수소문 끝에 생사를 확인하고 상봉을 추진하게 되었다. 심 회장의 경험상 어머니의 경우 만남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졸도 혹은 실신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았기 때문에 상봉 전에 진정제를 먹게 한다고 했다. 그 날도 노모에게 진정제를 먹이고 상봉 장소로 향하였으나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아들과의 만남에서 오열을 하며 부둥켜안고 결국은 졸도를 거듭하고 말았다고 한다. 가슴 속의 아픔과 그리움은 진정제로도 어찌 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몇 번의 졸도 끝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아들을 품에 안은 그들을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심 회장은 이 같은 상봉을 함께 하며 울고 웃고 그렇게 9년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 98년부터 본격적으로 상봉을 주선하고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만남의 자리에 함께 했으니 말이다. 그는 현재 73세의 적지 않은 나이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찬 것은 아직도 만나야 할 이산가족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슬픈 상처

이산가족은 우리 역사의 슬픈 상처이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 아물고 단단하게 여물어 흉터가 된다. 그리고 흉터를 볼 때마다 그 상처가 떠올라 아파하게 만든다. 이산가족이라는 역사가 만든 상처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다 감은 순간에도 그들이 눈물로 지새운 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투명하지만 그 안에는 고통으로 물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