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호랑이, 산을 내려오다
정치계의 지각을 변동시킨 조순형
조순형이 정치적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다. 민주당 분당되기 직전까지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 과정에 참여했지만 결국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민주당의 당대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탄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의 탄핵 추진은 민주당의 몰락을 초래한‘정치적 오판’이었다.
윤양래 기자 tuksyom@
이러한 민주당에 있어서 조순형의 당선은 단순한 1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에 대해 서강대학교의 손호철 교수는‘탄핵 주도세력의 정치적 복권’이라고 해석했다. 민심은 현직대통령 탄핵이라는‘헌정사상 초유’의 합법적 쿠데타(?)에 대해 일정부분 수긍한다는 의미이고 당시의 세력을 심판하지 않겠다며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논의의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이 정도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선거였다.
최우수 의원에서 실패한 리더로
인간 조순형
조순형은 충남 천안에서 조 박사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돈암초등학교, 서울중,고등학교를 나와 54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58년 미국으로 유학갔다. 60년 부친의 타계 소식에 귀국, 64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친구들과 무역회사를 차렸으나 실패하고 66년 삼성물산에 들어가 79년 부장으로 퇴직할때까지 13년간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지냈다. 조순형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81년 5공의 정치규제에 묶인 형 고(故)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이 선거를 불과 이주일 남긴 시점에서 그에게 출마를 강권했던 때문이었다. 독재정권 밑에서 무슨 정치냐고 따지는 조순형에게“독재정권 아래라도 누군가 항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강권했다고 한다. 당시는 야당도 관제야당과 다름없는 식물 야당이었던 때라 무소속으로 조윤형의 지역구에서 당선한다. 이때 그의 나이 47이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이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47년동안 인생에서 내가 내 자신말고, 내 가정 말고, 내 주변 말고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한 것이 있나 반성을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 번 해야겠다. 어렵지만은 한번 해야겠다.”그의 시작이 이랬다. 과정도 한결같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스터 앤 미시즈 쓴소리
김대중 정부 시절, 사직동팀 해체를 주장하거나‘1인 지배 정치의 산물’이라며 여야 영수회담 반대에 목청을 높인 것은‘쓴소리’의 유명한 일화다. 또한 2000년 소장파들이 정풍운동을 벌이며 당시 실세그룹이던 동교동계와 대립했을 때, 조순형은 중진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소장파 쪽의 손을 들어준 혁신적 면모도 보였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쓴소리는 이어졌다. 물론 열린우리당과의 분당 전의 일들이다. 노 대통령이“대통령직 못 해먹겠다”고 하자, 그는“대통령이 의연하게 대처해야지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고 비판한 일도 있었다. 또한 송두율 교수 사건 당시에는“노 대통령이 마치 송씨 변호사 같다”고 비판하는 등‘여당내 야당’같은 존재였다. 조순형은 이같은 자신의 행보의 원천을 부친 조박사의‘정신’에서 찾곤 했다. 지난 60년 대선 직전 암으로 타계한 부친 조 박사는‘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라는 말을 즐겨해 왔다고 한다. 조순형은 과거에“국회에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자평한 적이 있다. 부패와 무능, 오만으로 뒤얽힌 정치판에 여전히 조순형의 품성은 후배 의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여지가 많다. 그의 쓴소리는 그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연극배우로 유명한 부인 김금지는 2004년 당시 대표 퇴진 압력이 빗발쳤을 때 김상현 의원에게“남자답지 못하다”, “민주당 남자들 비겁하다”, “추미애 의원은 대표자격 없다” 라며 쓴소리를 퍼부었다. 쓴소리의 안주인으로서 격에 맞는 언사였다. 집에서는 누가 더 쓴소리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집에서는 쓴소리를 제가 더 많이 해요. 그런데 이번 선거 때는 쓴소리 하나도 안했어요. 약한 입장이니까 용기만 줬어요. 젊어 보인다는 둥 좋은 소리만 하고….”아내의 사랑은 이로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남편이 또 다시 선거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거 유세를 지켜보면서 남편을 더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원래 정치인들이 카메라(언론)를 좋아하잖아요. 기자들이 없으면 국회에서 자리도 잘 안 지키고 그런다던데. 그런데 함승희 씨가 이번에 지원 유세를 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남편은 기자들이 있건 없건 항상 5분 전에 법사위에 미리 나와 있고 늘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남편 하나는 끝내주게 잘 만났구나….” 조순형의 성실함과 높은 도덕성의 원천은 그의 가풍과 타고난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통큰 여자’김금지가 그의 아내이기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조순형 정치’의 가장 큰 업적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며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일을 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 운동을 하다 실패한 뒤 동교동계(평민당 창당)를 떠나 한겨레민주당 창당을 택했으며, 그 결과 이듬해 총선에서 고배를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저한테는 큰 시련이었지만 불이익이 있더라도 소신과 원칙을 택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사에‘천연기념물’정도로 희귀한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여기에 높은 도덕성까지 겸비한 정치인. 그의 정치적 소신만큼만 우리의 정치가 바뀌어 지는 날 우리는 세계사에 이름을 떨칠 나라가 될 것이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