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호랑이, 산을 내려오다

정치계의 지각을 변동시킨 조순형

2006-09-01     뉴스피플

조순형이 정치적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다. 민주당 분당되기 직전까지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 과정에 참여했지만 결국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민주당의 당대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탄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의 탄핵 추진은 민주당의 몰락을 초래한‘정치적 오판’이었다.

윤양래 기자 tuksyom@

이러한 민주당에 있어서 조순형의 당선은 단순한 1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에 대해 서강대학교의 손호철 교수는‘탄핵 주도세력의 정치적 복권’이라고 해석했다. 민심은 현직대통령 탄핵이라는‘헌정사상 초유’의 합법적 쿠데타(?)에 대해 일정부분 수긍한다는 의미이고 당시의 세력을 심판하지 않겠다며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논의의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이 정도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선거였다.

최우수 의원에서 실패한 리더로

조순형은 2003년 민주당 분당 이전까지는 누구보다 좋은 정치적 이미지를 쌓았다. 한때 그의 국회 상임위 발언 속기록이 초선 의원들의 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의정활동의 모범 사례로 꼽혔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율사 출신이 아니면서도 모범적인 의정활동으로 호평받았고, 국회 교육위원장 시절에도 교육 현안을 두루 꿰어 교육부 관료들을 놀라게 했다. 조순형은 정치권에서 매우 독특한 사람이다. 한 기자는‘이상한 정치인, 섬 같은 국회의원,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자’라고 쓸 정도였다. 술과 골프를 하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11대부터 정치를 해오면서도 줄서기, 계보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13대 총선 때는 재야 출신 중심의 한겨레 민주당에 합류했다가 낙선해 6선 경력에서 유일하게 공백기로 남아 있다. 그의 무기는 의정 활동이었다. 장외정치가 중심이던 시절 그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4대 국회 이후 정치판에서 원내 활동 비중이 커지면서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에서 14~15대 국회 시절 훌륭한 의정활동을 편 의원들을 상임위마다 1명 씩‘올해의 선량’으로 엄선해 매년 10여명을 소개했는데 조순형은 93년과 94년, 96년 세차례나 선정됐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또한 시민단체가 뽑은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4년 연속 뽑혔으며‘백봉신사상’을 4년 연속 수상했다. 5선 의원을 하는 동안 법정선거 비용을 한 번도 넘긴 적이 없고 후원회는 단 2번만 할 정도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비주류에, 소수파였다. 동교동계와도 거리를 두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엔 여당 속의 야당이었다. 그 무렵 김대중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들이 그에게‘미스터 쓴소리’란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탁월한 의정활동엔 무관심했던 언론들이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말 한마디마다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정권 비판의 좋은 소재를 그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돈도 없고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친화력도 약한 그가 정치 일선에 있었던 16대 국회 시절, 회식이나 술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치가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안면을 익히고 후원금을 모으고 절대적 지지자들을 확보하는데 그는 달랐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저녁 7시에는 귀가해 저녁 식사는 가족들과 함께 하곤 했다고 한다. 국회에서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의원회관 아니면 국회도서관이었다. 언론 인터뷰도 사람들 내왕이 적은 국회도서관에서 잡는 일이 허다했다. 그것도 방송 노출이나 사진촬영 등은‘쇼’로 비칠 것이라는 우려때문에 피하기 일쑤였다. 높은 도덕성을 몸으로 실천한 그였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의원들조차 농담조‘식사 한번 함께 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평했다. 조순형 스스로도“사람들과 잘 어울리거나 사귀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결점으로 꼽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정치적 리더십과 거리를 두게 하는 요인이었다. 2003년 11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기 전까지 그는 5선의 관록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당직을 맡은 일이 없었다. 2004년 4.15 총선 패배 직후까지 처음으로 당 대표를 역임했지만 그를 중심에 두고 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마찰들은 그의 개인적 성격, 정치스타일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한화갑 의원이 그에게 "총선을 앞둔 정당대표가 저녁 6시에 퇴근하면 당을 어떻게 이끌 수 있겠느냐"고 면박을 준 일도 있다고 한다. 결국 탄핵 역풍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조순형 리더십’은 실패로 귀결됐다.

인간 조순형

조순형은 충남 천안에서 조 박사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돈암초등학교, 서울중,고등학교를 나와 54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58년 미국으로 유학갔다. 60년 부친의 타계 소식에 귀국, 64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친구들과 무역회사를 차렸으나 실패하고 66년 삼성물산에 들어가 79년 부장으로 퇴직할때까지 13년간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지냈다. 조순형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81년 5공의 정치규제에 묶인 형 고(故)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이 선거를 불과 이주일 남긴 시점에서 그에게 출마를 강권했던 때문이었다. 독재정권 밑에서 무슨 정치냐고 따지는 조순형에게“독재정권 아래라도 누군가 항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강권했다고 한다. 당시는 야당도 관제야당과 다름없는 식물 야당이었던 때라 무소속으로 조윤형의 지역구에서 당선한다. 이때 그의 나이 47이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이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47년동안 인생에서 내가 내 자신말고, 내 가정 말고, 내 주변 말고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한 것이 있나 반성을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 번 해야겠다. 어렵지만은 한번 해야겠다.”그의 시작이 이랬다. 과정도 한결같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스터 앤 미시즈 쓴소리

김대중 정부 시절, 사직동팀 해체를 주장하거나‘1인 지배 정치의 산물’이라며 여야 영수회담 반대에 목청을 높인 것은‘쓴소리’의 유명한 일화다. 또한 2000년 소장파들이 정풍운동을 벌이며 당시 실세그룹이던 동교동계와 대립했을 때, 조순형은 중진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소장파 쪽의 손을 들어준 혁신적 면모도 보였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쓴소리는 이어졌다. 물론 열린우리당과의 분당 전의 일들이다. 노 대통령이“대통령직 못 해먹겠다”고 하자, 그는“대통령이 의연하게 대처해야지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고 비판한 일도 있었다. 또한 송두율 교수 사건 당시에는“노 대통령이 마치 송씨 변호사 같다”고 비판하는 등‘여당내 야당’같은 존재였다. 조순형은 이같은 자신의 행보의 원천을 부친 조박사의‘정신’에서 찾곤 했다. 지난 60년 대선 직전 암으로 타계한 부친 조 박사는‘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라는 말을 즐겨해 왔다고 한다. 조순형은 과거에“국회에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자평한 적이 있다. 부패와 무능, 오만으로 뒤얽힌 정치판에 여전히 조순형의 품성은 후배 의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여지가 많다. 그의 쓴소리는 그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연극배우로 유명한 부인 김금지는 2004년 당시 대표 퇴진 압력이 빗발쳤을 때 김상현 의원에게“남자답지 못하다”, “민주당 남자들 비겁하다”, “추미애 의원은 대표자격 없다” 라며 쓴소리를 퍼부었다. 쓴소리의 안주인으로서 격에 맞는 언사였다. 집에서는 누가 더 쓴소리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집에서는 쓴소리를 제가 더 많이 해요. 그런데 이번 선거 때는 쓴소리 하나도 안했어요. 약한 입장이니까 용기만 줬어요. 젊어 보인다는 둥 좋은 소리만 하고….”아내의 사랑은 이로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남편이 또 다시 선거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거 유세를 지켜보면서 남편을 더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원래 정치인들이 카메라(언론)를 좋아하잖아요. 기자들이 없으면 국회에서 자리도 잘 안 지키고 그런다던데. 그런데 함승희 씨가 이번에 지원 유세를 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남편은 기자들이 있건 없건 항상 5분 전에 법사위에 미리 나와 있고 늘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남편 하나는 끝내주게 잘 만났구나….” 조순형의 성실함과 높은 도덕성의 원천은 그의 가풍과 타고난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통큰 여자’김금지가 그의 아내이기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조순형 정치’의 가장 큰 업적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며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일을 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 운동을 하다 실패한 뒤 동교동계(평민당 창당)를 떠나 한겨레민주당 창당을 택했으며, 그 결과 이듬해 총선에서 고배를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저한테는 큰 시련이었지만 불이익이 있더라도 소신과 원칙을 택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사에‘천연기념물’정도로 희귀한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여기에 높은 도덕성까지 겸비한 정치인. 그의 정치적 소신만큼만 우리의 정치가 바뀌어 지는 날 우리는 세계사에 이름을 떨칠 나라가 될 것이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