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에 머물러 불가사의로 돌아온 제국

앙코르 왓! 그곳은 예술성과 웅장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신전과 로마의 콜로세움을 능가한다. 그저 캄보디아가 영화 ‘킬링필드’의 기억만이 전부라면 이제 눈과 귀를 닦고 그들 앙코르 제국의 찬란함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류역사를 보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불가사의한 것들이 꽤나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 어떤 도시보다도 과학적이고 정교하게 설계된 이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 후, 감춰진 역사를 들춰 보듯, 조심스럽게 그들의 옛 제국에 발을 들여놓는 우리 ‘이방인’들은 이제 그들 역사의 숨결을 듣는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한때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이 대제국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분분하다. 수백 년 간 전성기를 구가하던 크메르족들이 타이의 침략을 받고 급격히 무너졌거나, 또 ‘자야 바르만’ 7세의 과도한 개발정책에 주민들이 반발을 일으켰거나 거스를 수없는 전염질병 등 다양한 문제점들이 나타나면서 크메르인들이 그들의 고향을 버렸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신을 위한 위대한 도시

‘앙코르 왓’은 동남아를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 왕조가 12세기초에 건립한 사원이다. 캄보디아 내전으로 20여 년 동안 이방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앙코르 문화 유적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지난 93년부터이다. 그중 백미인 ‘앙코르 왓’은 씨엠립 시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다. 13세기경 크메르 왕국은 불교가 서서히 전파되어 토착 신앙과 적절히 융화되면서 새로운 문화 유적지를 만들게 되었다. 불교 사원의 정면 입구 건축물에서 힌두교 신의 부조물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앙코르(Ankor)'는 산스크리트어로 '도읍' 또는 '왕도'를 의미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사각형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도시와 사원을 건설했다. 워낙 규모가 방대해 관람하면서 앙코르 왓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정글 속에 묻혀 있었고 또 전쟁과 약탈로 유물의 70%가량이 훼손된 상태라 아쉬운 점도 많다. 그렇지만 거의 1천년전에 완성된 건축물 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회랑과 수많은 탑, 부조물 등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마저 든다.

캄보디아의 영원한 등불

앙코르 유적은 여행객에게는 볼거리이듯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자랑이요 희망이다. 그들은 국기와 화폐에 앙코르 와트를 새겨 넣었고, 이곳에서 인기 있는 맥주 상표 역시‘앙코르 비어’다. 이곳이 이토록 유명세를 타게 된 데에는 세부적인 조각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웅장한 규모(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의 터에 높이 65m의 중앙탑을 중심으로 지어진 웅장한 석조 건물)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큰 돌을 마치 주단처럼 깔아놓은 참배로에 들어서면 중앙사원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크메르 왕국이 9세기부터 6백여 년간이나 지속되었고 12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만큼 그 유적의 진귀함과 방대함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앙코르 왓’관람에 있어서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이 거대 사원의 출입구가 일반 사찰이나 신사들과는 달리 해가 떠오르는 동향이 아닌 서향으로 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한 사원임을 암시한다. 또한 사원 1층 회랑의 길이 7백50m(높이 2.85m로 총 면적 2천m2)에 이르는 벽면에는 매우 얕은 양각 모양으로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새겨 넣은 부조를 볼 수 있다. 힌두교 신화와 앙코르 제국의 승전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부조는 정교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변 여행지에서도 식지 않는 감탄사

‘앙코르 톰’은 제국의 또 다른 유적으로‘앙코르 왓’보다 훨씬 크다. 9세기 초 앙코르 왕조 시조인 수리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를 통일했다. 그는 자기를 힌두교의 비슈누 신왕(神王)이라고 일컬으며 앙코르 톰을 세우기 시작했다. 앙코르 톰은 쿨렌 고원과 톤레사프 호수 사이 120㎢의 기름진 평야에 세워졌는데 자그마치 300년이나 걸려 자야바르만 7세 때에야 완성되었다. ‘앙코르 왓’으로부터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앙코르 톰’은 ‘커다란 도시’라는 뜻으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 한 변의 길이가 3.2㎞인 네모꼴 도시인 이곳은 성벽을 높이 쌓고, 바깥에 해자(성 밖을 빙 두른 못)를 파서 악어를 길렀다. 이 저수지는 농수로를 통해 건기에 100km 밖 농경지에 물을 댔다는 기록도 있다. 앙코르 톰 한가운데에는 싸움터에서 죽은 용사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세워진‘바이욘 사원’이 있다. 중앙에 지름 25m, 높이 45m나 되는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또 다른 탑 54개에 관음상 216개가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사원에 쓰인 돌은 60만개. 1톤이 넘는 돌들은 거의 태국, 베트남에서 코끼리나 배로 실어 왔다. 앙코르 톰은 1177년 라오스 참족에게 약탈당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되찾았다. 그 뒤 다시 타일랜드 샴족과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처럼 거듭되는 외적의 침략으로 앙코르 톰은 점점 허물어져 갔고, 결국 1431년 타일랜드 아유타족에게 저수지가 파괴되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되었다. 1434년 크메르족은 끝내 도읍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때부터 500여년 세월을 앙코르 톰은 빈 도시로 버려진 채 밀림에 묻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타 프롬’ 사원에서는 문명을 거부하는 자연의 몸짓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의 축소판과도 같다. 오랜 세월 정글에 방치된 탓에, 거대한 나무뿌리가 사원 석조물 곳곳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이처럼 가공할 만한 자연의 파괴력으로 인해 그 웅장하던 사원이 서서히 폐허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이룬 찬란한 업적도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 앞에서는 새옹지마이자 인생무상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크메르인의 마음의 고향

인류의 뛰어난 문화유산인 앙코르 유적은 크메르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이곳이 발견된 때로부터 1972년까지 캄보디아 정부는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밀림을 벗겨내고 자동차 길을 닦아 앙코르를 되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1972년 이후 크메르를 침공한 베트남군과 크메르 루주 게릴라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앙코르 와트는 많이 파괴되었다. 2,000개나 되던 불상이 겨우 37개 남았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캄푸치아 정권은 앙코르 와트를 버려두다시피 했다. 다행히 일본정부와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바이욘사원’과 ‘앙코르 왓’ 일부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유적이 제대로 복원되려면 100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눈부신 도시와 사원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왓’을 건설한 크메르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왜 한 줄 기록도 남기지 않고 100만이 넘던 대제국인들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그 찬란했던 역사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NP


1850년 6월, 캄보디아 톤레사프 호수북쪽,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 뷰오와 4명의 캄보디아 원주민이 선교를 떠났다가 닷새째 길을 잃고 밀림 속을 헤매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 앞에 언뜻 환한 하늘이 보였다. 뷰오 신부는 구세주를 만난 듯 언덕으로 올라갔다. 순간 신부는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은 큰 얼굴조각상이 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자, 뷰오 일행은 눈 아래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경악했다. 수없이 많은 탑들이 늘어서 있고, 거대한 왕궁을 감싼 도시가 밀림에 뒤덮인 채 저녁놀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밀림 속 사라졌던 앙코르왕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뷰오 신부는 밀림 속 도시를 사람들에게 얘기했지만 이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년 후 1855년, 프랑스의 탐험가이며 생물학자인 ‘앙리 무어’ 박사는 우연히 ‘진랍 풍토기’라는 중국 사람이 쓴 인도차이나반도의 고서(古書)한 권을 손에 넣게 된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캄보디아는 2,000년 전 세워진 나라로서 899년에 나라가 크게 부흥했었다. 그때의 나라 이름은 ‘진랍’이었고, 크메르족이 나라를 다스렸다. 진랍 왕국은 타일랜드·버마·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 거의 모두를 다스렸다. 도읍을 왕국의 한가운데 언덕인 앙코르에 세우고‘앙코르 톰’이라고 불렀다. 그 도시의 뒤편에 어마어마한 절을 지었으니 그 이름이‘앙코르 왓’이다. 그러나 이 왕국은 13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아주 없어져 버렸다.”책을 읽던 무어는 문득 5년 전 화제를 모은 뷰오 신부의 ‘밀림 속 도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토록 강성했던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캄보디아 역사책에 왜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을까? 혹시 신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이 앙코르 왕국이 아닐까?’1861년 1월9일 무어는 마침내 탐험대를 이끌고 사라진 앙코르제국을 찾아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메콩 강의 샛강을 거슬러 올라 톤레사프 호수를 건넌 뒤 한 마을에 도착했다. 무어는 그곳에서 ‘창’이라는 젊은이에게 숲속 도시에 얽힌 전설을 들었다. “머리 일곱 달린 뱀이 밀림을 다스리고 있을 때 거인들이 그 성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돌로 산 같은 성벽을 쌓고, 온 세상을 내려다볼 탑들을 수없이 세웠죠. 그러나 거인들이 너무 잘난 체 뽐내자, 신이 그들을 잠재우고 성에 저주를 내려 숲으로 뒤덮었어요. 그곳은 수백 년 동안 신의 저주가 내려져 있습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오. 우리 할아버지도 그곳에 다녀온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무어가 밀림 속 도시를 찾아간다고 하자 창이 말렸다. 무어는 창의 말을 뒤로하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1861년 1월13일, 마침내 탐험대는 밀림 속에 묻혀있는 앙코르제국을 찾아냈다. 무어 박사의 눈앞에는 허깨비가 아닌 진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탐험대에 의해 기나긴 은둔의 마침표를 찍고 앙코르유적은 세상에 그 화려했던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무어가 프랑스로 써 보낸 ‘문명 세계에 보내는 미개지 탐험 보고서’가 잡지에 실리자 탐험대들이 줄을 이어 앙코르 유적을 찾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무어’박사는 몇 달 뒤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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