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 지는 것이다. ‘청와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은 곳, 우리의 대통령이 사는 관저이다. 한번쯤은 막연히 그곳의 주인이 되어 보고픈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곳은 하늘의 선택을 받는다고 들어왔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吉地)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진 곳, 그곳의 탄생배경에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유구한 청와대의 역사를 살펴본다.

조선의 정궁
청와대가 위치한 세종로 1번지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때인 1104년경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이궁이란 임금이 국도(國都)의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으로 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피서(避暑)·피한(避寒)·요양(療養)을 위해 짓거나 경승지(景勝地)에 짓기도 하였지만, 통치력의 효과적인 파급을 위해 지방의 요지에 이궁을 지어 돌아가면서 머물기도 하던 곳이다. 특히 고려 때에 이궁, 행궁이라는 이름의 별궁을 서경(평양)·남경(서울)·동경(경주) 등 3경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지었는데, 이는 도참사상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과 동경(경주)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는데 숙종때 동경대신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으로 삼았다. 숙종 이후 예종, 인종때까지 번성했던 이곳은 충렬왕때 삼경제 폐지로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역사에 청와대의 자리가 다시금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자는 중론이 본격화 되면서 부터였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째인 1394년 한양 천도를 위해‘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물색하게 했는데 고려숙종 때의 이궁 터는 협소해서 새 궁궐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하여 좀 더 남쪽으로 위치를 옮겨 궁궐을 짓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 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궁궐을 짓기로 한 것이다. 태조는 그해 12월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중책을 맡겨 태조 4년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의 정궁인 지금의 경복궁이다.

경복궁 후원 터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됐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등 각종 정각, 누각과 함께 연무장(鍊武場)과 과거시험장이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경복궁과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경복궁과 그 후원인 청와대 일대는 그런 상태로 273년간 방치되었다가 고종 5년인 1868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에 의해 복원되었다. 고종은 현재 청와대 지역인 신무문 밖 후원을 북원(北苑)이라 이름짓고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춘안당(春安堂) 등을 세웠다. 또한 이와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景武臺)를 두었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잇게 되었다. 그 후 일제의 만행으로 인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난 뒤인 1896년(건양 1)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면서 경복궁은 급속히 쇠락해 갔다. 일제는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총독부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새 청사 부지를 물색하던 중 새로운 총독부 자리로 경복궁내(內)후원 터를 부지로 정하고 1916년 공사에 들어가 경복궁의 융성문 등을 허물고 착공한지 10년만인 1926년 10월 마침내 조선총독부청사가 완공되었다. 이로써 조선 건국의 중심이요 상징이던 왕궁은 그들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또한 1927년 9월15일에는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을 북쪽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경복궁을 유린하는 한편 1926년에는 총독 관저마저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물색 하던 중 일제는 경복궁보다 지대가 높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관저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북쪽의 높은 땅에 총독 관저를 지어 남쪽에 있는 총독부 건물과 함께, 조선왕조의 상징이며 우리민족의 혼이 담겨져 있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에워싸 민족의 혼을 완벽하게 말살시켜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또 풍수지리상 용맥(龍脈)에 해당하는 자리를 끊어 보겠다는 속셈과 과거 조선의 관리를 뽑던 과거장을 차지해 버림으로써 우리나라의 정기를 단번에 끊어 버리겠다는 야욕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내몰렸던 조선의 풍수사들은 일제 식민지하의 설움과 그들의 만행을 그대로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고의적으로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들뿐 아니라 그 후에 이곳을 거쳐간 대통령까지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고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추측은 90년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 중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청와대 건물 뒤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1937년 4월2일 총독관저 택지 결정을 계기로 신축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3월 22일 기공식, 같은 해 10월 12일에는 지진제(地鎭祭)가 열렸다. 당시 부지의 총면적은 야산을 포함해 5만2천평, 관저 면적은 연면적 563.06평이었다.1938년에는 정초식(定礎式)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13일에는 상량식(上樑式)까지 했으나 9월 2일 중·일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다. 7개월 후인 1939년 4월 5일 공사가 재개되어 그해 7월 25일 약 2년여의 공사 끝에 준공되어 9월 20일 낙성식을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미나미 총독과 비서진은 당시 서대문에 있었던 임시 관저에서 새 관저로 거처를 옮겼다. 미나미는 옛 이름을 살려 총독부 관저를 그냥 경무대라고 불렀다. 그는 1942년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경무대에 기거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경무대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냥 총독관저라는 딱딱한 이름이 사용되었다. 8대 총독 고니소는 1942년 5월 29일 부임해 44년 7월 22일까지 총독관저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태평양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때인 만큼 관저의 신, 증축이 금지되었다. 또 관저 북쪽 산기슭에는 지하벙커까지 만들었다. 마지막 총독인 9대 아베는 1944년 7월 25일 부임해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관저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8월 15일 일본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자 주요문서를 불태우고 건물의 일부마저 파괴했다고 한다.

                                                       ▲ 옛 경무대모습
국민의 원성을 샀던 ‘경무대(景武臺)’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미 극동군 사령관이던 J.R.하지중장이 남한 주둔군 사령관으로 서울에 오게 된다. 미군정 하에서 사실상 우리나라의 통수권자 역할을 했던 하지중장은 한국에 진주한 후 몇 달간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오가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총독관저로 거처를 옮겼고 1948년 8월 24일 그가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이 관저에서 거주했는데 하지 중장이 이 집에 들어와 생활을 하면서 그때부터 경무대란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화장(梨花莊)에서 기거를 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집의 주인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옮겨오면서 경무대란 이름이 비로소 일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KMD'란 영문 이니셜로도 종종 사용되었다. 경무대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의 옛 명칭으로 속칭 '효자동 1번지'라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1층은 집무실로 2층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주변에서는 우중충한 경무대를 개조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고 건물의 치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가 심해감에 따라 경무대라는 이름은 점점 국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게 되고 그해 4월 28일 이 집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은 경무대라 불려졌다. 1960년 8월 윤보선씨가 2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국민의 원성을 샀던 경무대의 이름을 고쳐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경무대라는 이름을 존속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이름을 바꿔야 하느냐 그리고 바꾼다면 어떤 이름이 좋은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윤대통령이 개명에 동의하자 이름을 물색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개월간의 물색작업 끝에 경무대로 불려간 사람은 당시 서울시사편찬위원 이었던 김영상(金永上) 씨였다. 김씨는 경무대라는 이름이 일제 총독이나 이승만 박사가 지은 것이 아님을 들어 개명에 반대했으나 윤보선 대통령의 간청으로 두 가지 이름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화령대(和寧臺)였고 또 하나가 청와대였다. 화령이라는 이름이 제시된 것은 조선창건 당시 태조가 ‘조선’과 ‘화령’이라는 이름을 명나라에 제시한 뒤 두 가지 중 좋은 것을 골라달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또 하나의 이름인 청와대는 관저의 기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 빛깔이라는 데 착안한 것이었다. 학창시절 고고학을 전공한 윤보선대통령은 청기와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재인 만큼 고유한 전통을 지닌 집이라는 뜻에서「청와대」가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이 이름이 미국의 ‘화이트 하우스’와 대조적인 ‘블루 하우스’란 뜻에서도 대통령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황와대(黃瓦臺)로의 개명 주장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도 윤보선 대통령은 얼마간 청와대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1962년 3월 정치정화법이 발표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년 7개월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났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청와대는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된다. 청와대는 협소했던 구관이 크게 보수, 증축되었고 지하실 증축을 시작으로 집무실, 가족공관 및 소연회실 등이 개수, 확장되었다. 그 외에도 부분적 내부개수를 실시하여 대접견실과 대식당을 보수하였으나 2층의 서재와 거실만은 부분적으로 수리하여 별 변동 없이 그대로 사용하였다. 73년 8월에는 경호원을 위한 숙소와 기물보관창고를 별도의 2층 건물로 신축하였다. 1977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식인 상춘실(常春室)을 철거하고 22평 규모의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 건물인 상춘재(常春齋)를 착공해 78년 3월에 완공하였다.1978년 12월에는 각종 의전행사 및 기자회견장으로 영빈관이 신축되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직후 또다시 이름을 고치라는 요청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예로부터 황색은 천자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때문에 청(靑)보다는 황(黃)이 더 존귀함을 뜻하는 것이므로 "황와대"(黃瓦臺)라 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일축해 버렸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서 청와대의 이름을 또 다시 바꾼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논리였고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 역시 개명에 반대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와대를 영어로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가를 놓고 문제가 생겼다. 육 여사는 청와대를 ‘블루하우스’라고 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육 여사는 대외용 봉투나 타이프 용지에 ‘Chong Wa Dae’ 라고 표기하라 했는데 고유명사인 청와대를 ‘블루하우스’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까지 영어로 표기해야 하느냐고 주장했다 한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청와대의 주인으로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생활이 길었던 만큼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고 10·26사태 이후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순으로 청와대는 또다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다.

노태우정권 시절 건물 신개축
프레스센터로 사용되는 춘추관과 대통령관저, 그리고 대통령 집무실인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시절인 6공화국에 들어와 새로 신축한 것이다. 구청와대 본관은 1989년 2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수행원들이 대기할 장소가 마땅치 않을 만큼 협소해 내방객을 맞기에 곤란을 겪었다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청와대 신축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관저의 경우 일제 때인 1939년 미나미 총독이 들어온 이래 본관 내에 관저가 있었는데 1990년 10월25일 새 관저가 완공됨에 따라 대통령 집무실과 살림집이 분리되었다. 대통령 관저는 1989년 8월 28일 착공됐으며 대지면적 1천2백60평, 본채 2백44평, 별채 1백58평 기타 부속시설을 포함한 연건평 8백12평의 1층 건물로 건설되었다. 신축 공사 중이던 1990년 2월 20일에는 관저공사장 바로 뒤에 있는 바위에서‘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 표석은 암벽 전면이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한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만든 이 표석은 가로 2m 50cm, 세로1m 20cm 크기에 글씨 크기는 세로 가로 50cm씩 이었으며 획의 평균길이는 9cm이다. 글씨체는 해서체였고 낙관자리에는 연릉 오거(延陵 吳据)라는 글을 쓴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이름까지 있다. 이 표석이 발견되자 당시 청와대에서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라는 임창순(任昌淳)옹을 초청해 자문을 구했는데 임옹이 내린 결론은 글이 약 3백∼4백년전인 조선조 중기 것으로 보이며 글씨체는 중국 청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은 관저가 완성되기 한 달여 전인 9월 29일 완공되었다. 1989년 5월10일 착공된 춘추관은 삼청동쪽 청와대 경내 입구에 세워졌으며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1천 28평의 건물이다. 대통령이 집무를 하는 청와대 본관은 1989년 7월 22일 착공된 뒤 만 2년 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옛 기맥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북악산정(山頂), 경복궁, 광화문, 관악산을 잇는 축선에 세워진 신축관은 지하1층, 지상2층의 대형 청기와 집으로 건물의 연면적은 1층 1천2백2평, 2층 4백58평, 지하층 4백96평등 총 2천5백64평이다. 이 건물을 만드는데 든 청기와 양은 총 15만장으로 1백년이 지나도 변치않는 강도를 지닌 것이라 한다. 1층에는 중앙홀, 대회의실, 대식당, 영부인 접견실, 2층에는 집무실, 접견실, 회의실, 소 식당이 마련돼 있고 , 지하층에는 기관실, 전기실, 공조실이 설치돼 있다. 민주정부이후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과거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이 살던 구관은 철거되고 1995년 해방5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조선총독부건물도 철거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현재까지 푸른 기와집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 안산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통과해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곳, 청와대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 속에 그 운명을 달리하며 조금씩 변해갔다. 건물과 주인이 그러했고 주인의 삶 또한 그러했다. 축복과 불행의 사이에서 대한의 역사를 잉태하고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지도자들의 과거,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같이할 지도자들 역시 청와대는 영원히 함께 숨 쉴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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