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호] ‘경무대’ 그 후광 속에 얼룩진 권력비화 (2)

권력을 잘못 행사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힘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 자신의 정적을 숙청하고 나아가 국민을 핍박하는 안하무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듯, 삐뚤어진 권력욕에 빠져 인생의 종지부를 비참하게 찍은 권력자들을 보면 짐작이 갈만하다. 그들이 한 일 모두가 그릇 된 것만은 아닐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얼굴에 독재자나 독재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등 지울 수 없는 오명이 따르는 이유는 무었일까? 잘못 먹으면 마약과도 같은 권력욕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가난이 가져다준 두가지 유산
박마리아, 그녀는 강원도 강릉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생계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던 그녀는 어린 시절 남의 집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고 때로는 밭에 나가 일을 해준 품삯으로 궁핍한 생활고를 해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시절의 경험은 그녀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증오에 가까울 만큼 가난에 대한 혐오였다. 때문에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끈질긴 그녀의 집념 역시 암울한 유년기를 겪으면서 다져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비 독재자들과의 만남
이화여전 졸업후 호수돈여고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녀는 선교사 아펜젤레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마운티홀리옥 대학과 테네시주 스카릿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피바디(Peabody)사범대학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2년 귀국한 그녀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수신(修身)과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1935년 이기붕과 결혼 후 그녀는 학교를 사임하고, YW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된다. 남편 이기붕은 충북 괴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 역시 넉넉지 못한 환경이었으나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일본을 거쳐 도미하여 아이오와 주 데이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李承萬)을 만났고, 허정(許政)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승만과의 이 같은 인연은 해방 후 독재 정권의 최고 권력자와 2인자로서의 운명적인 관계로 이어진다. 일제 말기 국일관 지배인의 부인에 불과했던 박마리아 에게 해방 직후 정계의 핵심으로 등장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그들에게 권력을 담보해줄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해방 후 그녀는 YWCA를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과 이화여대 교수로서의 호라동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놀랄 만큼 수직 상승을 한 박마리아의 사회적 지위는 남편 이기붕의 정치적 입지 강화 및 프란체스카와의 돈독한 관계에 근거한 것이었다. 1945년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기붕은 이승만의 서무담당 비서로 일하게 되었고 박마리아 역시 YWCA 문화부장을 맡는 한편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기붕이 이승만정권의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기붕의 행정적인 자질도 기인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박마리아가 공식, 비공식적으로 프란체스카와 맺고 있던 특이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보다 늦게 남한에 들어온 프란체스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때까지 이승만을 수발하던 임영신(任永信)과 윤치영(尹致映)의 부인을 돈암장(敦岩壯)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이승만과 임영신의 관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온 프란체스카에게 비서 이기붕의 부인이자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박마리아는 좋은 한국어 선생이자 개인비서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프란체스카는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에 이승만과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영어를 모르는 사람과는 좀처럼 접촉을 안했다고 한다. 이런 요인으로 박마리아는 경무대에 쉬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역시 권력에 이르는 지름길을 발견하고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개인적 유대를 발판삼아 밀착된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곳, 나아가 남편 이기붕의 정치적 입신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남편간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부인들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정비례하게 된 것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형성된 특성인 셈이다.

                                                            ▲ 이화여대 부총장시절의 박마리아 여사
여(女) 대통령, 여(女) 부통령
1948년 7월24일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는 등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이에 정비례해 박마리아의 위치역시 여성계와 정계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한부인회 서울시본부 창립식에 창설 위원으로 참가해 스스로 부회장을 자천해 선출되기도 했다. 박마리아는 1952년 4월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에 취임, 같은 해 자신이 식민지 시절부터 몸담아온 YWCA의 회장이 될 수 있었다. 1954년 명실상부한 권력의 제2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 이기붕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한 세칭‘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의 날치기 통과를 주도했다. 박마리아는 같은 해 9월 대한부인회 전국 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어 4백만 회원을 가진 여성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기붕은 1951년 5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을 수습했고, 이로부터 본격적인 독재 정권의 철저한 하수인이 되어 나갔다. 이기붕은 1951년 12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조선민족청년당(이하 족청)계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해 발췌개헌안 통과에 일익을 담당했다. 1953년 9월부터는 사용용도가 없게 된 족청계 숙청에 나서 자유당 총무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됨으로써 자유당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1954년 3월의 자유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는 자신의 반대파인 배은희(裵恩希), 이갑성(李甲成)을 축출하고 당 조직을 장악, 5·2선거에서 승리했다. 이기붕은 이승만이 한민당, 족청 등을 적절히 활용하다 용도 폐기하는, 즉 이승만의 장기인 ‘쓰고 버리는 카드’를 주의 깊게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었다.

두 개의 경무대(?)
이기붕이 경무대 주인의 후광을 업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 서울 하늘엔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 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하나는 실제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요 또 하나는 당시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살고 있는 서대문 관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는 프란체스카가 휘두르고 서대문 경무대는 박마리아가 휘두른다는 말이었다. “암탉이 울면 세상이 망한다는데 이래서야 나라꼴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자유당은 두 가지 암(癌)으로 죽어갔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 마리아 암이었다.”유행가처럼 세간에 울려 퍼진 이런 말들은 이승만 정권 시절 박마리아의 행적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경무대 안주인이던 프란체스카 여사와 충직한 상하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 외부활동에 더욱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 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이기붕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박마리아는 여성으로선 보기 드문 고속질주를 계속했다. 당대 최고의 조직력을 갖는 대한부인회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부총장이 되었고, 한편으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당시 이대총장은 김활란으로 이대에만 40여년 봉직했지만, 정작 명예박사 학위는 박마리아 보다 10년이나 늦게 받았다. 때문에 당시 박마리아가 부총장이 되면서 명예박사를 받은 사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박마리아는 이 무렵부터 본인스스로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1954년 5·20선거 때 전북 무주군 출마를 강력히 희망한 바 있었던 박마리에게 민주적 절차에 의한 과정이나 민의는 사소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1952년 YWCA회장으로 당선된 이래 그녀는 정치, 종교, 교육, 여성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 때문일까 박마리아가 살던 서대문집은‘서대문 경무대’로 불리기 시작했고, 어용 문인들이 나서서 이기붕을 치켜 올리면서 소위 '만송족(晩松族)'까지 출현할 지경이 되었다.

자식까지 권력의 제물로 바친 권력욕
박마리아 권력욕의 최고정점은 아마도 아들 이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보낸 사건일 것이다. 박마리아와 이기붕 사이엔 장녀인 강희,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세명의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장녀 강희가 이화여중 재학당시 요절했기 때문에 아들만 둘이 있던 셈이었다. 둘 다 재혼이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사이에 소생이 없었던 것도 우리에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승만에겐 전처인 박승선(朴承善)과의 사이에 봉수란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중에 병사했으며 이승만은 그 아들을 늘 잊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 이강석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애정이 박마리아의 권력욕과 손바닥을 마주치듯 일치한 것이 바로 이강석의 양자 입적이었다. 박마리아는 1957년 3월26일 이승만의 생일에 맞춰 장남 이강석을 정식으로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양자 입적 후 이강석과 관련된 추문들이 들끓었다. 가짜 이강석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는 촌극이 발생하는 한편, 교육계의 아부꾼들은 이강석을 서울대 법대에 부정 입학시킴으로써 서울대 법대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딸들이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던 박마리아가 이제는 자식을 권력의 담보로 경무대 주인에게 바치게 되는 희한한 시대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박마리아에게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1959년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재선된 그녀는 모든 간부진을 장·차관 부인들과 친여(親與) 성향의 기업체 사장 부인들로 채움으로써 대한부인회를 손아귀에 넣고 완전한 정치 도구로 삼는데 성공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부통령 선거가 결정되고,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박마리아의 정치활동은 더욱더 노골화되었다.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張勉)에게 패배했던 전철이 있었던지라 이기붕은 경찰 행정조직과 정치깡패를 동원해 광범위한 부정 선거를 계획했고, 박마리아 역시 치안국장 과 장관들에게까지 강력한 부정선거 압력을 행사했다. 또한 대한부인회 총본부, 지방시도 본부장, 시·군 지부장들은 자유당 중앙위원 상임위원으로 채워졌다. 나아가 최인규내무장관의 부인 강인하를 대한부인회 서울시 본부장에, 김법린의 부인 박덕순을 대한여자청년단체장에, 쌍용그룹 김성곤의 부인 김미희를 부단장에 임명하는 등 여성단체를 선거전에 이용하기 위한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59년 7월 대한부인회 전국 대회에선 자유당의 정·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이기붕을 전면 지지한다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박마리아의 정치영욕은 최고조를 이루었다. 한편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와 대한여자청년단의 이름으로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임영신의 출마는 반동 행위이다"는 성명을 신문에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로 결국 이기붕은 제5대 부통령으로 당선하는데 성공한다.

                         ▲ 경무대에서,왼쪽부터 이기붕,프란체스카여사,이승만대통령,이강석,박마리아
권력욕의 종말 그것은 ‘신의섭리’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대통령과 부통령자리를 모두 차지한 자유당정권, 다름 아닌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점으로 한 부정 선거의 수혜자들은, 십여 년 넘게 지속된 독재정권을 향한 민중의 분노에 결국 부딪혀야 했다. 절망과 빈곤의 악순환, 그리고 선거를 치루면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자유당정권의 파렴치한 부정선거의 작태를 본 국민들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간의 기본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4·19혁명은 그 시발점이 어디였든 간에 용암처럼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3월15일 마산을 필두로 항쟁은 전국적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지만, 박마리아는 태연했다. 권력을 향유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이끌 수 있는 자질이나 판단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결국 분노한 민중들의 걷잡을 수 없는 대폭발은 박마리아의 이대 부총장 사임과 모든 공직 사퇴, 이기붕의 부통령 사퇴를 가져왔고, 나아가 독재정권의 수장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독재자는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었지만 그 하수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서울 근교를 배회하던 박마리아의 일가는 1960년 4월28일 자신들의 막강한 정치권력을 비호해주던 경무대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했다.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박마리아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신 역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고 끝을 맺었다. 박마리아 일가의 자살은 이강석이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됨으로 타살의 의문을 남겼지만, 자유당 독재 정권의 몰락과 함께 영원히 역사 속으로 묻혀 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박마리아가 자신의 친일행각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일제 식민지 시대 박마리아의 어떤 활동에서도 항일, 애국, 민족, 투쟁 등의 예를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기독교도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대세에 순응해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같은 개인적 합리화가 그 당시 자신에게 처해진 시대적 환경의 무게를 방어해 낼 수는 없었다. 물론 해방 후에도 반성의 기회를 만들지 않았고, 때문에 박마리아는 반민주적 독재 정권 하에서 식민지시대 이후 줄곧 고통받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권력욕을 서슴없이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항쟁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신의 섭리에 복종시키기 위해선 종교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는 박마리아의 사상적 이론, 이런 의식의 소유자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지도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에 진정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에서 교육 받은 극소수의 여성 지식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면서 친일과 반민족·반민주의 길을 걸었던 박마리아, 그녀의 최후는 그 자신이 신봉하고 있던 대로 신의 섭리이자 역사의 섭리였다. 그리고 박마리아와 영욕을 함께 했고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던 그 집만이 4·19의거 학생 도서관이 됨으로써 우리들에게 잊혀 지지 않는 씁쓸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NP

<참고문헌>
박용만, ≪경무대 비화≫, 한국정경사, 1965.  
≪만송 리기붕 선생≫, 국제시보사, 1960.  
≪친일파 군상≫, 국제시보사, 1960.  
≪한국 YWCA 반백년≫ ≪한국 여성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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