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인질테러로 본 아프간의 실체

미국 침공 7년을 맞은 오늘의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끝났지만 테러는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카불과 북부지역은 비교적 안정을 찾았으나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파키스탄 국경일대는 아직도 정부의 통제력이 미미한 실정이다. 무역센터가 무너지면서 이라크 전에 가리워 졌던 아프카니스탄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해보자.


삭막한 산악지대와 사막, 년 강수량 500미리도 안 되는 땅 아프가니스탄, 이 척박한 땅에 왜 열강들은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가졌을까? 서쪽제국에게는 인도로 가는 길목 이였으며 북쪽제국에게는 대양으로 진출하는 통로였다. 아프간은 오가는 길목에 있었을 뿐 아프간 땅 자체가 정복의 대상이 됐음은 아이러니하다. 페르시아 제국도, 알렉산더와 칭기즈칸, 티무르도, 그리고 근세에 와서 영국과 소련, 미국 등, 열강에 짓밟혀온 아프간의 시련은 땅 자체보다는 강대국들이 상충하는 중간지역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 이 아닐까 싶다. 그들의 역사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외세의 국민들을 인질로 테러의 수단으로 일삼는 아프간의 현실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종족간의 갈등
민족구성이 복잡한 아프간은 다른 다민족 국가에 비해 종족간의 갈등이 많은 나라이다. 한반도의 3배인 땅에 2,800만 명이 사는 곳, 유태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남쪽지방의 파슈툰 족(44%), 북동쪽에 사는 같은 이란 계 타지크 족(25%), 북쪽지방의 우즈벡 족(8%), 그리고 몽골의 후예인 중부산악지방의 하자라 족(10%), 기타 아이마크 키르키츠 등이 있다. 이 나라에 민족갈등이 많은 것은 대부분 섞여 살지 않고 각 각 역사적으로 연고를 둔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살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느 한 민족이 집권하여 카불(수도)에 입성하면 타 민족이 반기를 드는 악순환이 반복 되었으니 결국 내전이 많은 나라로 비쳐 진 게 어쩌면 당연하다. 다행인 것은 나라전체가 이슬람 교도여서 분파(수니파80%, 시아파19%, 기타1%)의 대립은 잠재해 있지만 종교분쟁은 없다는 것이다.

수난의 역사
지정학적으로 제국세력이 상충하는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그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픔 그 자체이다. 이웃 페르시아 제국에 병합되기를 반복하면서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 7세기 중엽에는 아랍의 침략으로 이슬람 화 하였다. 북방으로부터는 13세기 초에 몽골의 침입 그리고 14세기 말에는 사마르칸트 티무르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16세기 초에는 티무르의 6대손인 안디잔 태생의 바부르가 내려와 카불을 수도로 정하고 델리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1747년 이란계 파슈툰 족이 칸다하르에 듀라니(Durrani)왕조를 세워 번성하였으나 1838년부터 인도에 진출한 영국이 아프간에 개입하였다. 그 일로 영국은 중앙아시아에 진출해있던 러시아세력과 아프간의 지배권을 놓고 파워게임(Great Game이라 불렸음)을 벌이기도 했다. 아프간은 3차에 걸쳐 영국과의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1919년 반영독립파의 중심에 서있던 아마누라핸 국왕(1919~1929)이 주도한 3차 아프간전쟁에서 영국군을 격퇴, 승리로 이끌며 1919년 5월27일 독립을 이루었다.

소련의 침공을 받다
1978년 4월 좌익 장교들이 중도파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서 발발했다. 지지기반이 약했던 새 정부는 소련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독실한 이슬람교도들과 많은 反공산주의적인 대중들로부터 원한을 샀다. 이로 인해 정부에 대항하는 이슬람교도 폭동이 일어났고 칼크당과 파르캄강 연립정부 내에서도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을 자극했고 마침내 1979년 아프간에 공산정권수립을 지원하고 12월 전격적으로 침공함으로서 한 세기 후에 뜻을 이루었다. 10만 명의 소련군은 대부분의 아프간 도시 및 주요 군사주둔지를 장악하고 상대적으로 무자헤딘이 시골지역으로 흩어짐으로서 빠르게 교착상태에 빠졌다. 소련군의 잔악행위는 극에 달해 주민들의 탈주를 불러 1982년까지 약 28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파키스탄 수용소로 도피했으며 150만 명이상이 이란으로 탈주했다. 그 후 1988년 미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소련사이에는 소련군이 철수 하고나면 아프가니스탄이 비동맹국가로 다시 복귀한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소련군은 이슬람 저항세력 무자헤딘의 게릴라 항전으로 고전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10년만인 1989년 철수 하였다.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1만5000명이 전사하고 4만 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아프가니스탄쪽 인명피해는 더욱 커, 국제적십자사에 의하면 100만 명이 넘을 것이라 추정했다. 소련이 패퇴하자 아프간 내 친소세력인 나지블라(Najibullah)정권은 축출되었고 랍바니(Rabbani)정권이 들어섰으나 종족간의 갈등으로 내전이 확산되면서 1996년 탈레반이 집권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란-아프가니스탄(탈레반 세력) 분쟁
이들 분쟁은 종교적 대립(시아파와 수니파)이 잠재해 있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이란 공관 외교관들을 감금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친구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 1996년부터 탈레반세력(수니파)이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이란은 종교적 뿌리가 같은 아프간의 시아파 이슬람세력을 지원, 탈레반 세력과 대립했다. 그러던 중 탈레반 세력은 1998년 8월초 반군세력 거점을 공격하면서 이란 공관을 점령, 외교관 11명을 인질로 감금하고 그 중 9명을 사살하는 사태를 발생시켜 양국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에 이란은 1998년 9월14일 탈레반에 대해 전쟁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전쟁 불사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란은 접경지역에 혁명수비대 병력 7만여 명을 집결시켰고 20만의 병력이 동원된 기동훈련까지 실시했다. 탈레반 정권도 이란과의 국경지역 남서부지방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양측 사이의 간헐적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이란의 적극적인 대응과 국경지대의 군사력 증강에 위협을 느낀 탈레반 세력은 이란과의 긴장 완화를 모색하여 이란인 전쟁 포로를 석방하고 1999년 2월 최초로 직접대화를 가진 바 있다. 같은 해 11월 마침내 양국의 국경이 재개방되어 긴장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를 통해서 이란으로 유입되는 마약밀매로 아프가니스탄 마약 밀매자와 이란 국경수비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 등 마약 밀수 문제는 두 나라간 심각한 문제로 번져갔다. 2000년 한 해 동안, 이란군은 아프간 국경에서 총 156회의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마약조직 125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국경지역에 전기담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이란에는 젊은층과 실업자를 중심으로 약 300만명의 마약중독자가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으로도 양국 간 분쟁은 언제든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아프간 국토(90%)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실상 아프간의 통치세력인 탈레반을 이란이 인정하지 않고 10%의 국토를 점령하고 있는 반 탈레반 연합세력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아프간정부의 탄생과 실태
2001년 9.11테러를 주도한‘알 카에다’조직과‘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던 탈레반 정권은 이들의 신변인도를 요구한 미국의 압박을 묵살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아프간을 침공,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아프간은 미국의 비호아래 현재 카르자이(Karzai)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안정을 꾀하고 있으나 정부의 행정력과 치안력은 수도인 카불 이외에는 미치지 못하고 지방은 군벌(軍閥)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군벌들은 카르자이 정권이 들어설 당시 정부의 통제를 받기로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부 결정에 따라 중앙정부를 벗어나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에 협력하고 충성을 다하기도 한다. 내전 당시 각종 인권 유린과 학살을 저지른 군벌이 국회로, 정부로 입성해 호령하고 있다. 무능한 중앙공무원과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반정부 인사들(탈레반세력 포함)은 현 카이자르 대통령을 미국의 하수인에 비유하며 쏟아지는 서구 문물에 대한 반감도 이슬람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국민들은 과거 공포정치를 자행한 탈레반 시절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탈레반 부활의 원인이다.

이슬람 분파의 태동(수니파와 시아파)
딱딱하게 들리겠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이야기하자면 이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슬람은 수니(Sunni)파와 시아(Sii)파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프가니스탄은 수니파에 속한다. 두 파는 이슬람 창시자인 모하메드가 사망 후 칼리프(후계자)계승에 따른 견해차이로 분열되어 1,400년이 지나도록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슬람계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수니를 정통파라고 하는데 Sunni라는 말은‘모하메드의 말과 행동을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이슬람 공동체는 모하메드 사후 4명의 후계자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5대째부터 각 왕조가 생겨 10세기까지는‘샐축 투르크’가 이슬람을 통일하고,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그 후 1924년 칼리프제도가 폐지되고 오스만제국이 멸망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등장한 이슬람국가들은 칼리프대신 저명한 종교학자나 법학자들을 지도자로 선택하였는데 바로 이 형태의 국가가‘수니파’국가들이다. 반면 모하메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후계를 둘러싸고 대립하면서‘알리(모하메드의 사위)’추종자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시아파다. 이슬람신앙의 원칙인“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모하메드는 신의 사자이다. 그리고 알리는 신의사랑을 받은 자이며 친구이다”라고 믿으며 알리를 4번째 칼리프로 선출한 시아파에선 그 이전의 칼리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 종파 사이에는 몇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결국 수니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이는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일어난 싸움으로 종교분쟁으로 보지 않는다. 비록 파는 다르지만 공히 이슬람의 뿌리는 같기에 종교를 가지고 절대 싸우는 일은 없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수니파가 다수지만, 이란·이라크 는 시아파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또한 오늘의 이슬람국가에서는 수니파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시아파가 통치자로 있는 현상이 일고 있어 한층 복잡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슬람과 탈레반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는 다섯 가지 의무가 있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마호메트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고백(샤하다·shahaadah), 일정한 시간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예배(살라트·salaat), 일정량 이상의 재산을 내는 기부(자카트·zakaat), 일정 기간 식사를 하지 않는 단식(사움·sawm), 일생에 반드시 성지인 메카를 한 번 방문하는 순례(하지·hajj), 이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에겐 또 하나의 의무가 있다. 바로 성전(聖戰) 지하드 (jihad)이다. 탈레반이 지난 6년간 미군과 나토군을 비롯한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여온 것도 여섯 번째 의무인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이다. 탈레반에겐 아프간이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땅이라 믿고 있다. 때문에 탈레반은 아프간에 들어와 재건 사업을 돕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외국 민간인을 납치해 인질로 삼거나 살해하는 것을 지하드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엔 이들이 신성한 땅을 더럽히는 이교도로 느껴지는 것이다. 탈레반의 이런 사고방식은 최고지도자인‘물라 모하메드 오마르’로부터 비롯됐다. 오마르는 스스로를 ‘구도자’라는 뜻의 탈리브(talib)로 부르면서 추종자를 모아 탈레반을 만든 인물이다. 탈레반 전사들은 1996년 4월 그를 아미르 알-무미닌(충실한 신자의 사령관)이라는 칭호를 붙여 아프간의 최고통치자로 옹립했다.


‘탈레반’ 그들은 누구인가


탈레반 태동의 원인
주류 언론들은 탈레반을‘국제 사회를 위협하는 광신적 테러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탈레반은 열강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국제사회의 산물이다. 원래 이란 이슬람정권의 영향력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정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창조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돈으로 수백 개의 마드라사(종교 학교)가 설립됐고 소련 침략과 뒤이은 내전으로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고아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탈레반이 되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신봉하는 초보수적인 와하브파 이슬람 교리를 배웠다. 그들은 이제 막 자기 마을이 파괴당하고 난민 캠프에서 고통과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꼈고 종교가 유일한 안정을 제공했다. 1996년에 탈레반이 부패한 북부동맹 세력을 몰아내고 카불을 장악했을 때 미국 다국적 석유기업 유노칼은 탈레반과 협력해 석유 파이프라인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 지배자들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장을 바꿨다. 그들은 탈레반에게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비극의 책임을 떠넘겼다. 특히 탈레반의 여성 학대를 비난했다. 그러나 탈레반의 여성 학대는 부시 정부가 동맹으로 여기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교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2001년 9·11 이후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고 탈레반을 변방으로 몰아냈다. 탈레반 대신에 부패한 북부동맹이 돌아오고 전 CIA 첩자인 카르자이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이들의 인권유린은 탈레반을 능가했고 결국 6년 후 탈레반은 다시 부활했다. 미국 정부 씽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최근 보고서에서 “나토와 미국의 군사 작전으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차라리 탈레반과 협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아프가니스탄인들의 60퍼센트가 미국이 지지하는 카르자이 정부가 탈레반보다 더 부패하고 형편없다고 답했다. 2001년에 탈레반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아무리 끔찍한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탈레반이 미국이주도하는 제국주의 점령에 맞서 무장저항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점 대담하게 자행하고 있는 테러사태(인질극포함)를 빼고만 본다면 무턱대고 탈레반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과거의 탈레반
탈레반은 무슨 뜻인가? 아랍어로 ‘학생’ ‘구도자’를 뜻한다.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물라 모하메드 오마르(Omar)’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슬람 수니(Sunni)파 근본주의 성향의 학생무장정치세력이 그 시작이다. 1994년 10월 2만5000여명의 무슬림 학생이 결성됐고, 불과 4개월여 만에 아프간 국토의 80%를 장악하며 맹위를 떨쳤다. 1996년에는 수도 카불까지 점령하며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무자헤딘 권력 투쟁을 끝냈다. 그때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 통치세력이었다. 이들은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내 반군 조직을 무장 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 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 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를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 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 텔레비전 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 학대 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르고, 간통을 저지를 경우 남녀 구분 없이 카불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AK소총으로 머리를 쏘아 죽이는 공개처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수천 명씩 모여 공개처형을 지켜봤는데, 이것은 로마시대 검투사의 대결처럼 당시 아프간 주민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였다. 파키스탄을 통해 인도의 불법 비디오를 시청할 수도 있었지만 들키면 투옥은 물론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과 불상들을 부수는 등 유례없는 유적 파괴 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발생한 미국9·11테러가 이들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가 됐다. 미국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 중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 조직인‘알카에다’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으나 탈레반이 이를 거부, 같은 해 10월7일 미·영국군의 아프간공습으로 침공 두 달 만에 탈레반 세력은 거의 대부분 와해되고 말았다.

-탈레반 지원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토후국연합 등은 중동의 패권을 노리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수니파 이슬람세력인 탈레반을 지원.
-반 탈레반 지원국: 이란은 종교적 뿌리(시아파 이슬람)가 같은 아프가니스탄 내 반군을 통해 탈레반 세력과 대결. 러시아는 표면적으로 반군을 지원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정권 안정 시 자국 내 이슬람세력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우려, 탈레반과 반군 간 내전 지속 희망.


네오 탈레반(neo-Taleban)
과거와 는 달리‘네오 탈레반’으로 불리며 새롭게 등장한 이들은 과연 어떤 세력일까? 아프간침공으로 탈레반 세력축출에 성공한 미국은‘하미드 카르자이’를 내세워 과도정부를 세우고 선거를 통해 지금의 아프간 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재건사업이 몇 년 동안 계속됐지만 그러나 경제사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서방의 많은 경제원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삶의 수준자체가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극심한 경제난과 카르자이정부의 부정부패로 정부에 대한 불신은 날로 커져 민심은 급속히 돌아섰다. 그런 불만의 틈에 탈레반이 파고든 것이다. 자포자기한 주민들도 치안이라도 보장되던 옛 탈레반 시절이 그래도 좋았음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탈레반은 과거의 탈레반이 아닌‘네오 탈레반(neo-Taleban)’으로 다시금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나토(NATO) 및 미군과 국지전을 벌이며 투쟁을 계속해왔지만 최근 1~2년 사이에는 자살폭탄테러와 외국인은 물론 자국인 납치 등 게릴라전으로 투쟁방법이 급속히 바뀌었다. 과거 탈레반의 수장 오마르가 역시 이들을 이끌며 이들의 목표는 아프간에서의 재집권,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이다.

달라진 활동
과거 탈레반은 자국민을 서방세계와 절대적으로 차단하려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했다. 여성이 외출하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가까운 남자가족을 대동해야만 했다.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발표된 16가지 칙령은 음악을 듣거나 TV 시청을 금지했고, 춤을 추지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결혼식장에 가는 것과 여자들은 학교를 다닐 수도,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남자들은 꽉 쥔 주먹의 길이만큼 수염을 길러야 했다. 사진 촬영도 금했다.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기초로 탈레반이 만든 칙령이 발표된 뒤 국민은 절망에 빠졌다. 암흑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네오 탈레반은 본질적 부분에서는 비슷하지만 몇 가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TV 이용을 철저하게 금지하던 것과는 달리‘네오 탈레반’은 자신들의 훈련 장면이나 납치자 처형 모습을 비디오로 녹화해서 언론에 배포한다. 자체 웹사이트를 운영할 정도로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다. 자국 및 서방언론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그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과거의 관습까지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네오 탈레반’이다. 2001년 탈레반을 소탕하던 미군들은 깜짝 놀랐다. ‘존 워커 린드’라는 미국인 탈레반 때문이었다. 린드는 아프간 북부동맹군에 맞서 싸우다 그 해 11월 마자리샤리프에서 미군에 체포됐다. 미국은 경악했다. 또한 탈레반에 가담한 한 호주인은 관타나모에 수감되기도 했다. 현지 탈레반 중에서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전사가 있지만 이렇게 파키스탄과 아랍에서 유입된 외국인 출신 탈레반은 아프간 탈레반보다 학력 수준이 높아 중요한 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구체적으로 인적사항을 파악할 순 없지만 탈레반 역시‘다국적군’이 되고 있다는 증거다. 종교적 신념, 반미, 반서구 성향이 이들을 탈레반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탈레반 양성소
이슬람 종교학교인 마드라사(madrassa)를 일컫는 말이다. 마드라사는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일종의 교육기관이다. 이곳에서 이슬람 청년들은 물라(mullah)라는 종교지도자가 되기 위해 코란을 외우며 학습한다. 젊은이들이라 이슬람 근본주의에 쉽게 심취하는데 이들 중 일부가 탈레반에 합류하는 것이다. 일부 아프간 전문가는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벌이며 파키스탄에 원조하는 지원금이 파키스탄에 있는 마드라사로 흘러들어가 폭탄테러범을 키운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것이 마드라사가 ‘탈레반 양성소’라고도 불리는 주된 이유다. 탈레반은 대부분 파슈툰족으로, 아프간출신과 파키스탄출신 파슈툰족이 섞여 있다. 파슈툰족은 두란드 라인(Durand Line)이라고 해서 영국인들이 마음대로 갈라놓은 국경 탓에 나뉘어졌다. 종족과 사는 곳은 그대로인데, 인위적인 선 하나로 그렇게 나뉜 것이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탈레반의 배후가 파키스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슬람의 무장단체에 소속되면 대원들은 이슬람 전사(戰士)로 양성되어진다. 산속이나 계곡의 캠프에서 집단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다. 기본적인 총기 사용법과 수류탄 투척방법 같은 것이다. 샤히드(shahid·순교자)로 불리는 자살폭탄전사는 폭탄벨트 제조방법을 훈련 받는다. 일제 도요타 차량에 폭발물을 다량 탑재한 뒤 카불 인근의 잘랄라바드 로드를 지나는 ISAF(국제안보지원군)차량 행렬을 향해 돌진하는 방법이 보편화된 테러방법이다. 특수임무를 띤 대원은 비행훈련도 받는다고 한다. 대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다. 그들이 항상 집단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단체생활을 하는 전사도 있고 평소에는 가족들과 생활하다 필요할 때 투입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탈레반의 간부급들은 예외 없이 단체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오랜 내전을 겪으며 그러한 문화와 삶에 익숙해져 있다.

탈레반을 지탱하는 돈줄 과 정보력
탈레반의 기본적인 자금조달의 중심에는 아편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재배 할 수 있는 양귀비이기에 아프간의 양귀비 재배 인구는 300여 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세계 아편 생산량의 90%를 차지 한다는 말도 있다. 지난날 골든트라이앵글(인도차이나 국가인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국경이 상충하는 양귀비 재배지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태국정부의 단속에 쇠퇴해지자 정부통제력이 적은 아프간이 아편 생산지를 대신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아프간 정부군이 대대적인 양귀비 제거작전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지만 생계를 이을 뚜렷한 대체 농작물이 없는 농민의 반발만 초래하고 있다. 단속을 피하려 정부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던 농민이 이젠 탈레반에 보호를 요청한다. 세계 무슬림국가의 지원자금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자금력으로 아프간에서 정부 관리를 매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보니, 곳곳에 심어놓은 스파이가 이들 정보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밀리에 바그람에 온 체니 미 부통령을 겨냥한 자살폭탄테러 감행과 아프간 경찰청 본부 옆을 지나던 경찰수송버스를 폭파한 예는 자금력에 의한 정보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형편없는 유선통신망보다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110% 활용해 정보전에서 앞서가고 있다. 한국인들 납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탈레반 전사들의 급여는 월 200달러 정도라고 한다. 아프간경찰이나 정부군이 처음 받는 급여가 월 60달러 정도라고 하니 젊은이들은 명분을 떠나 탈레반전사가 되려는 유혹을 떨칠 수 없다. 가족인 형과 아우가 명분을 쫒아 정부군과 탈레반으로 총을 맞대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들에게 자살폭탄테러는 성전을 행한 영원히 이슬람전사로 남는 영광을 준다. 남겨진 가족에 대해 탈레반이 평생 금전적·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탈레반대원이 되는 데는 나이 제한은 없다. 최근 와지리스탄에서 14살짜리 어린소년이 직접 참수형을 집행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외세에 대한 탈레반의 적대감
탈레반은 한때 자신들을 권좌에서 축출시킨 장본인이라는 시각에서 미국과 서방을 보는 적대감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비단 그 적개심은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4~5년 전, 아프간의 국영 항공사인 아리아나항공이 중국의 우루무치와 카불을 연결하는 직항 편을 운행했다. 당시 대거 유입된 중국 매춘부들은 외국인 근로자와 호기심 많은 아프간 남성들을 대상으로 매춘 활동을 벌였는데 이슬람문화에서는 상상도할 수없는 일이기에 당연히 그들의 분노를 샀다. 이후 동양인들의 외모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은, 한국, 일본, 필리핀 여성들까지 모두 매춘부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2006년 5월 수도카불에서 미군차량이 아프간인을 치어 숨지게 하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불똥은 중국인 여성들의 성매매업소로 번져 방화사태가 잇따랐고, 이후 중국인들은 출국조치까지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내전과 탈레반 철권통치를 거친 아프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통념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 예측불허의 영역에서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탈레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참수형을 행하고, 그것도 어린소년을 내세워 참수의 강도를 극대화시켜 내외에 과시하는 집단이다. 그런 땅에 우리 기독교인이 자원봉사를 갔던 것이다. 현실을 너무 모른, 목숨을 담보한 무모한 행위였다고 본다. 작년 8월 초, 한 기독교 단체가 카불의 한 운동장에서 평화집회를 벌이려했던 일이 있었다. 2,000여명이 참석하려던 행사는 무산됐지만, 현지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집회가 예정된 장소는 탈레반이 공개처형을 집행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한국인은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다. 최근 피살된 탈레반 최고 사령관‘물라 다둘라’는 인질 참수형 전략을 시작해 공포심을 심어주기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탈레반은 다둘라 피살 이후 내부 동요를 가라앉히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카불에서 대규모로 움직이던 한국인 의료·봉사단원을 노렸을 것으로 본다. 피랍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이슬람 성전’이라는 대의명분을 더욱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용했었을 것이다.

국제정세를 외면한 무모한 자원봉사
인간의 자유를 착취하며 악용하는 테러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인간 행위가 바로 인질테러이다. 어려운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자는 봉사활동의 근본은 그 대상이 누구든, 또 어느 인종이건 성역이 있을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러 떠났다 피랍된 우리의 젊은 자원봉사단원들은 그 자체로 분명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번 인질사태발생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들의 무모함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이 가야만했던 과정의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피랍된 인질들이 무사히 풀려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바램이다. 국적이 어떻든 봉사의 명분을 띤 민간인신분을 테러 한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고 이슬람 교리에도 어긋나는, 그 어떤 명분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번 피랍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논란이 인질들의 생명을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만 아프가니스탄행에 몸을 싣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결코 고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요약된다.
첫째로, 수차례 정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 이를 무시하고 유서까지 써놓고 아프가니스탄 봉사를 강행한 점. 둘째로, 선택의 자유라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현지의 자세한 이해 없이 위험한 치안상태를 과소평가, 안전이 불투명하고 종교성이 다른 그곳으로 굳이 보낼 필요가 있었냐는 점. 셋째, 이번사태로 인해 국익의 선택기로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대한민국정부의 난처한 입장을 제공한 점 등이다. 우리의 자원봉사를 매우 뜻 깊은 일로 반기는 현지인들도 있지만 탈레반에겐 한국인 의료봉사단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슬람 성전, 지하드를 정당화시키려는 탈레반에게 딱 떨어지는 조건과 명분을 준 것이다. 한국군이 아프간에 파병된 상태에서 탈레반이 한국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최고의 기회를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으로 볼 때는 봉사지만 이슬람 문화로 바라본다면 종교의 침해이자 기독교의 포교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 국가정책에 혼선을 주면서까지 봉사활동을 강행 하는 일은 앞으로 심사숙고해야할 필요가 있다. 인질의 귀환을 위해 그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은 당연히 우리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관계를 생각해 볼 때 무작정 그들의 원하는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제정세를 너무 모른 자원봉사의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프간과 같은 치안이 열악한 위험국에는 출국 자제를 부탁한다는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것부터가 정부의 충고를 너무 가볍게 받아들인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이슬람의 성지로 생각하는 그들 땅에서 타 종교의 활동은 이슬람인들 관점에서는 다분히 종교적 폭력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들은 이번 피랍사건을 성전(지하드)로 생각하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번사태가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NP
◆자료참조; 한국국방연구원(www.kida.re.kr )

아프가니스탄의 두 거물
아프간의 지난날엔 극명하게 대립된 두 인물이 있다. 열강의 침략에 성전으로 맞서는 목적은 같았으나 성전을 행하는 방법에선 수단을 달리했던 인물이다. 테러리즘,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
탈레반의 수장은 ‘오마르’다. 파키스탄 산악지대에 칩거하며 그때그때 명령을 하달하며 숨어 지낸다는 정보가 있으나 확실치 않고 현재 생존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오마르(1959년생)가 태어난 곳은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인근 마을이다. 이슬람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에 심취해오다 1980년 구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총을 들었다. 그는 무자헤딘(이슬람 4대 무장단체중 하나)에서 소련에 맞서 전사로 활동하다 파편을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 후 파키스탄 퀘타의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고, 1989년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92년, 친소정권 붕괴를 틈타 군벌 간 권력 장악을 위한 무장투쟁이 벌어져 아프간은 혼란에 빠졌다. 1994년, 소녀 두 명이 지역 군벌에게 납치·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오마르는 다시 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학생과 청년들을 이끌고 소녀를 구출했다. 그의 정의로움은 사방에 알려졌고,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마르는 이들을 규합해 단체를 조직했다. 바로‘탈레반’이다. 그가 게릴라 수준인 탈레반을 이끌고 지역 군벌을 패배시키고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게 된 것은 국민의 지지 때문이었다. 탈레반은 아프간 다수 종족인 파슈툰의 정통성을 계승한 데다 특히 오마르는 욕심만 챙기던 지역 군벌과는 달리 코란에 근거한 깨끗한 정치지도자로 인식됐다. 그는 별도의 정부기구를 만들지 않고, 대신 지역을 부족들이 통치하도록 맡겼으며 수도 카불 대신 칸다하르에 칩거한 채 국가 이름도‘아프가니스탄 이슬람연방’으로 바꿔 모하메드가 이룬 신정(神政)일치의 초기 이슬람공동체복원을 꿈꿨다. 오마르의 이런 행동을 두고 그의 비호를 받던 알카에다의 우두머리‘오사마 빈 라덴’도“칼리프(모하메드 후계자)의 시대가 아프간부터 시작됐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하지만 과도한 이슬람식처벌제도와 9·11 테러 는 탈레반의 붕괴를 가져왔고 오마르와 핵심조직원은 아프간 접경산악지대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 후 오마르는 9·11 테러 발생 1주년 때“아프가니스탄이 해방되고 이슬람의 가르침이 재수립될 때까지 미국에 대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탈레반의 재기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한과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를 탈레반 지역 책임자들에게 비밀리에 전달, 성전을 촉구했다. 이후 탈레반은 외국 민간인을 납치, 인질로 잡고 외국 군대의 철수 등을 요구하는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1,0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오마르의 신변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그는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전사들을 모집, 최고 의결기구인‘지도자 위원회’를 구성, 탈레반 전사를 지휘했다. 오마르는 자신의 행적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최 측근을 통해서만 연락하고 측근은 다시 각 주의 현장 전투지휘관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탈레반은 지난해 미군과 나토군 등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다 전사 3000여명이 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모든 아프간인은 외국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싸움을 할 의무가 있다”며 성전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수도 카불을 향해 점점 세를 넓혀 미국의 꼭두각시로 인식되는 현 아프간정부를 전복시키고 외세를 신의 성지에서 영원히 내쫓으려는 의지에 불타고 있다. 아프간을‘이슬람 성전을 위한 기지’로 삼자는‘지하디스탄’, 이것이 현재 ‘네오 텔레반’을 이끄는 최고지도자‘오마르’가 꿈꾸는 궁극적 목표다. 테러에 의한 그의 지하드가 탈레반과 척박한 땅 아프간에 어떤 평화를 가져다 줄 지 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아프간의 체게바라 ‘마수드’ 장군>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ed Shah Massoud)”, 지금도 아프간인 들의 가슴속에‘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되어지는 인물이다. 한 자루의 총과 한 권의 시집을 들고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 아프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살다간 한 유목민 전사, 그는 천부적인 전략가, 탁월한 군사 전문가로 소련과의 10년 전쟁(1979-1988)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를 따르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프간인 들에겐<판지셰르의 사자>로 일컬어진다. 판지셰르는 계곡으로 마수드 장군의 군대 본거지였다. 그곳에서 러시아 붉은 군대는 최신 전투 장비를 지닌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총 한 자루를 들고 싸운 이 초라한 아프간 게릴라들에게 전멸 당했다. 그 후 사람들은 마수드를‘판지셰르의 사자’라 불렀다. 그는 10년을 소련의 붉은 군대와, 다음 10년은 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테러세력 탈레반과 싸웠다. 그에게도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소련과 미국, 이 둘 중 한곳만 선택하면 열강이 만든 성곽 속에서 굴욕적이지만 평온한 평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가장 나쁜 삶은 가난한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다.”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의 삶에는 잠시 평화가 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아프간 내부의 또 다른 적, 탈레반과 다시 전쟁을 해야 했다. 마수드는 테러리즘을 싫어했다. 평생 아프간의 사막과 거친 계곡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한 번도 테러리즘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릴라전은 빈자(貧者)들의 전쟁이지만 테러는 전쟁이 아니라 협박이었기에 마수드는 소련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 불리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자신의 정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는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마수드가 탈레반에 맞선 이유고 오마르와 다른 점이다. 마수드는 한때 수도 카불에 입성해 정권을 장악했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폭격한다고 협박하자 탈레반에게 무혈로 카불을 넘겨주고 다시 판지셰르로 돌아간다. 카불의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카불은 결국 탈레반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1993년, 프랑스의 기자 퐁피이는 폐허가 된 카불의 거리에서 울고 있는 마수드를 발견했다. 기자는 “그때가 그가 우는 것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라고 회고했다. 9.11 테러 이틀 전, 마수드는 탈레반이 보낸 자살 폭탄 테러단에게 암살당했다. 탈레반은 9.11전에 왜 마수드를 먼저 죽여야 했을까? 마수드는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미국 본토에 심각한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고 누차 경고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특히 미국은 마수드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미국에게 마수드는 외적으로 너무 불편한 적이었고 탈레반 입장에서는 내적으로 강력한 적이었다.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이틀 후 세계무역센타는 거짓말처럼 영화같이 무너져 내렸다. 미국의 CIA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탈레반과 빈 라덴은 마수드의 살해로 부담스러운 적을 제거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의 심장을 터트렸다.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군 지휘관인‘사예드 지아 아흐마드’는 프랑스<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마수드 암살을 직접 지시한 인물로 오사마 빈라덴을 지목했다. 놀랍게도 빈 라덴은 마수드와 함께 6년 동안 소련군에 맞서 싸웠던 옛 전우였다는 사실이다. 무장 게릴라 지도자였지만, 테러리즘을 누구보다 혐오했으며 아프간의 미래를 위해 진실과 원칙을 고수한 마수드, 빈 라덴과 알카에다라 조직이 일으킨 9.11의 검은 연기는 이슬람 형제였던 이 아프간 전사의 진실을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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