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자 김용과 김혜영,
“고향을 꿈에라도 잊을 수가 있나요”
가족과 친구들을 못 보는 슬픔, 고향을 버린 아픔

2005년 한 해가 가고, 2006년 병술(丙戌)년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도 예외 없이 귀성전쟁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을 것이다. 늘 너나 할 것 없이 치르는 홍역인 셈이다.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성길에 나설 것인가. 또한 이들의 긴 행렬을 부러움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향민과 탈북자들은 언제까지 가슴 아파해야 하나.

신성아 기자

새해가 되고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을 찾아볼 수 없는 슬픔과 조상의 묘를 돌보지 못하는 죄스러움, 차례조차 지낼 수 없는 안타까움은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겪는 아픔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귀순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마음속에 고향이 있다. 그것은 실향민과는 다르게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서 선택한 죄책감의 아픔이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과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은 무엇보다 명절이면 쓸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남한 사람들은 설 연휴가 오면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해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하지만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그들에게 설은 그 어느 때보다 고향 생각이 간절한 날이다.

성공한 사업가로의 변신 귀순가수 1호 김용,
혈혈단신 그는 명절 때 더욱 외롭고 아프다
[지나간 과거는 현재의 증명] 작고 둥그런 얼굴과 선량한 표정의 김용과의 만남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처럼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이었다. 그리고 오피스텔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김용의 모습에서 자신감과 함께 외로움이라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평안북도 강계 출생인 김용은 북한 자강도체육단의 빙상선수였고, 김정일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으며, 스위스에서 외화벌이담당 책임지도원으로 일하던 지난 1991년에 귀순하였다. 홀로 자유를 찾아 가족과 친구들을 북에 두고 온 그는 탈북자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졌다.“과거, 내가 귀순가수였고 CEO이고 주방장이었다면, 오늘날 나는 CEO를 고용하는 위치에 있다. 탈북자가 한국의 대기업에 있는 인재들을 쓰고 있는 것이다”라며 예전에 내 것이라는 개념에서 지금은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용이다. 그는 평양 옥류관 냉면의 맛을 살린 모란각 식당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란각, 모란각 물산, 인풍푸드, 오성푸드 등을 잇 따라 설립한 데 이어, 이들 회사의 지주회사인 오성에스에스의 회장을 맡아 의욕적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난 해 2005년에는 월남귀순용사선교회에서 겨레선교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의 총재를 맡기도 하였다. “탈북자들의 거는 기대로 어깨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강한 책임감을 엿볼 수 있었다.“현재 남한에는 7000여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그 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나에게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로 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물질적인 도움이 아닌 마음의 기둥이 되고 싶다”라면서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칠판에 낙서를 하면 깨끗이 지워지지 않고, 조금의 자국이 남는 것처럼 함부로 나서지 말고 조심히 행동해야 하는 것이 탈북자들의 현실이다”고 하면서 자유를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산다는 것은 가슴이 먹먹하다] 처음 남한에 와서 고향소식을 몰랐을 때,‘나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김용은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힘들었다며 대기업의 회장들의 자살을 이해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1998년 결혼한 재일교포 아내와 이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여러 번의 사기로 수억 원의 돈을 날리는 등의 힘든 과거를 보냈다.“남한에 온 지 10년이 넘은 지금, 이제는 부모와 형제, 가족의 얼굴이 자꾸 희미해져 가지만 그리움의 깊이는 더해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몸이 몹시 아프다가 새벽 2시쯤 혼자 TV앞에서 음식을 먹으려니 한 없이 작아지는 나를 보았다”며 안 먹고 사는 방법은 없냐고 나에게 물었다.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의 눈을 슬쩍 비껴갔다.“불 꺼진 집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을 때 나는 제일 초라하다. 이렇게 힘들고 외로울 때는 조용히 없어지고 싶었다”면서 오늘날 이렇게 당당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북에 남겨 둔 가족이라는 두 글자였다고 한다. 대학동기들이 북한의 주요 요직에 있고,‘북에서 제 3자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듣게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는“여기 와서 활력소가 되어준 건 어떤 위안이나 보약도 아니다. 내 가족이 나를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였다”고 말했다.
[나는 바란다] 내가 이번 설에는 어떻게 지낼 계획이냐고 묻자,“명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다. 그래서 그동안 새해가 되면 한국에 있고 싶지 않아 성탄절 즈음해서 조용히 미국에 가서 지냈다. TV 모든 매체에서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나에게는 어떠한 것도 해당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섭외가 들어오면 그것이 참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출연하지 않고 있다”고 답한다. 말을 바꾸어 새해 소망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하였다.“작년에는 남북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누가 뭐라든지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활성화되길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운영하는 회사가 대북관계를 위한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늘 바래왔고 꿈 꿔왔던 가족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고 말하는 김용에게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었다.

부칠 수 없는 편지를 간직한 김혜영,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는 상상 속에서 만나요”
한국정책방송 KTV 녹화장인 서강대학교 스튜디오에서‘국민이 대통령이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한 귀순배우 김혜영을 만났다. 통일부 장관 정동영 장관과의 토론회에 패널로 출연한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한 분위기로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국사회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드라마, 개그콘서트, MC, 가수 등 많은 활동을 해온 김혜영은 일본에서도 음반을 발표하여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는 뮤지컬과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곧 크랭크인 할 영화‘남북공동초등학교’의 주연배우로서 극중 역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는 그녀는 신년을 맞이해도 가족을 돌보지 못할 정도의 스케줄이 잡혀있었다. 혹시 남한에서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게 있냐는 내 말에“남한사회가 100배는 더 복잡한 것 같아요.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사람이나 일적인 부분 등에서 왠지 100% 믿음이 안 가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이같이 대답한 데에는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확실하게 관리해주기 때문에 걱정이 없지만 처음에 연예활동을 할 때, 이해부족으로 약간의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예인이기 때문에, 또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융화가 잘 안돼서 생활하기 어려웠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이다.
[그리움을 희망으로] 북한에서 영화‘여의사’와‘다시 돌아온 초소장’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연기활동을 하다 지난 98년 압록강을 건너 귀순한 김혜영은 그래도 다행인 게 가족 모두가 남한으로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향을 버리고, 친구들을 남겨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어“혼자 있으면 온갖 생각이 나요. 그래서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으려고 하죠” 그녀는 음식을 절대 남기는 법이 없다.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현실에서 밥알 한 개라도 남긴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규정짓는 그녀였다.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을 돕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 김혜영은 임진강에서 위령제를 수차례 지내기도 했으며, 2004년 추석 때는 진도 실향민을 만나서 성금과 떡을 해주는 등 북한이 고향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새해가 오고, 명절이 되면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부치지도 못하는 편지를 써 놓은 그녀는“인민학교나 대학교 친구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래서 친구들을 상상을 통해 만나기도 하고 그래요”라며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김혜영에게도 남한에 친구가 생겼다.“악극 여로와 아리랑 공연 할 때 이순재, 강부자, 전원주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노현희, 리포터 조영구, 하리수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꿈을 들어보았다.“점점 갈수록 북한의 상황은 어려워지고 있는데, 남한이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줬으면 해요. 더 나아가서는 통일문제에 대해서 한 단체의 리더로 활동해 보고 싶어요”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현실과 꿈이 적절히 혼합된 생명력이 넘쳐났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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