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쪽방촌을 찾아가다

지난 2007년 11월 영등포 쪽방촌에 살던 김원식(54)씨는 방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김 씨의 죽음은 옆방에 사는 이 모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가로 세로 2m크기의 김 씨 방에는 때에 찌든 간이침대와 채널회전식 텔레비전 한 대, 낡은 구두 한 켤레뿐이었으며, 창문이 없어 한낮에도 캄캄했다. 바닥에는 소주 6병이 나뒹굴고, 먹다 남은 음식들이 쏟아진 채 썩고 있었다. 역한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든 방에서 김 씨는 혼자 먹고, 자고, 결국엔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서울역과 지하철 역 등 사회 공공장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은 IMF 이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 그들 중에는 평범한 가정의 기둥이었던 가장도 있고, 한 기업을 이끌었던 사업가도 있었다. 사람들의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노숙자. 허름한 바람막이 하나로 노숙공간과 구분되는 장소가 있다. 바로 쪽방이다. 우리나라 도시빈곤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쪽방은 노숙자의 증가와 더불어 그들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언제 노숙을 할 지 모르는 사람들, 즉 잠재적인 노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결국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노숙자와 더불어 가장 심각한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계층인 셈이다.

종로 번화가 뒤 위치한 돈의동 쪽방촌
찬바람이 잠시 주춤했던 지난 1월 8일 오전, 종로에 있는 쪽방촌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인 종로에 쪽방촌이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 놀라게 된다. 종로 3가를 몇 바퀴 돌았으나 쉬이 찾지 못해 결국 길가에 있는 떡볶이 노점상에게 쪽방의 위치를 물어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동광시장길’이라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좁은 골목을 쓸고 있는 50대 여성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50대 여성에게 다가가 “방을 구하려고 하는데요”했더니 여성은 골목 안쪽을 가리키며 “뒤에 있는 아줌마에게 방 있냐고 물어 봐”라고 대답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았으나 4-50대 여성은 보이지 않고, 골목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재활용품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 80대로 추정되는 할머니만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방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봤더니 할머니는 기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니 “8천원이야”라고 짧게 말했다. 찬찬히 살펴본 할머니는 최소한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고 이는 다 빠져 있는 상태로 몸집 또한 작다. 방값을 건네며 식사는 하셨냐고 여쭤봤으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방을 안내하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할머니를 따라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좁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할머니 혼자 오르기에는 힘들어 보일만큼 가파랐으나 주인 할머니는 능숙하게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 신발을 벗는 주인 할머니를 따라 신발을 벗고 할머니의 뒤를 쫓았다. 계단 바로 앞쪽에 있는 방문 앞에 멈춰선 할머니는 “내일 아침 일찍 나가”라고 했다. 다시 한 번 식사는 하셨냐고 말을 건네 보았으나 역시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쪽방촌에서 머물고 있는 한 거주자는 “방을 빌려주는 주인들은 방을 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또한 자신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쪽방에서 지내는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개인 신상을 밝히기를 꺼린다”며 “쪽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같은 처지에 처해 있다. 때문에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며 다가오는 낯선 사람들을 특히 경계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손바닥 크기의 방에서 느끼는 절망과 빈곤
▲ 쪽방안에 갖추어진 시설은 거의 없으며 판자로 된 선반이 좁은 벽 쪽에 하나 붙어 있고 그 위에 작은 TV가 놓여 있다.
쪽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깔린 1인용 이불과 베개, 썰렁한 벽면을 메우고 있던 2006년 9월 달력이었다. 방을 한번 둘러보니 T자 모양으로 된 얇은 판자위에 놓인 텔레비전과 누군가가 재떨이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밥그릇 하나, 머리맡 위에는 누렇게 바랜 지난 11-12월 달력이 덩그라니 달려 있다. 텔레비전 위쪽으로 보이는 작은 문이 창문인 듯 하다.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방 전체에서 나는 냄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에 몸 둘 바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스르르 방문이 열린다. 주인 할머니가 밖에 벗어다 놓은 신발을 들고 오시더니 텔레비전 옆에 나란히 놓고 나간다. 방에 홀로 남겨지자 찬찬히 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방문은 미닫이로 손잡이가 따로 없다. 문에 작게 패인 홈이 손잡이인 셈이다. 어떻게 문을 잠가야 할지 막막하다. 열쇠도 따로 없는 상황에서 무얼 믿고 문을 열어둔단 말인가. 잠금쇠를 찾기 위해 문을 이리저리 훑어보니 문 바로 위에 있는 선반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선반이라고 해도 텔레비전을 얹어놓은 판자처럼 얇은 판대기에 여기저기서 마구 떼어 온 듯한 나무토막 두 개에 못질을 해 놓은 게 전부다. 부실한 선반 위에 무엇인가가 보여 슬쩍 보니 오래된 달력과 그 위에 놓인, 이 방에 묵었던 누군가가 벗어던진 양말이다. 문을 훑어보다가 방문을 잠글 수 있는 장치를 찾아냈다. 문 밑에 조그마한 잠금쇠가 세로로 붙어 있다. 문을 잠가보았더니 약 2cm정도의 틈이 벌어진다. 벽면 여기저기에는 뜻 모를 숫자들이 적혀 있는데, 어쩌면 이 방에 머물렀던 누군가가 자신이 머물렀던 날짜를 적어놓은 듯 하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자 방바닥에 널린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바닥을 감싸놓은 이불에는 누군가가 무엇을 흘린 듯한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텔레비전을 얹어놓은 얇은 판자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휘어버렸고, 문 바로 옆에는 누군가 쓰다만,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수건이 누렇게 변색되어 걸려 있었다. 홀로 남겨진 방에서 황망하기 그지없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흔적들로 가득한 방에서 묵어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울컥한다. 쪽방에 머물렀을 수많은 이들 또한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또 한 번의 절대적 절망감과 상실감을 경험했으리라.

얇은 벽을 사이에 둔 감옥 아닌 감옥
▲ 가로 세로 2m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누우려면 잔뜩 웅크리거나 대각선으로 누워야 한다. 바닥에 깔린 1인용 이불과 베개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어느 방에서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간간이 누군가의 기침소리도 들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의 소리까지 여과 없이 들린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는 없지만 내 행동이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되어버리는 느낌이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버렸다. 방안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자니 주인 할머니의 말소리와 움직임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방 바깥에서 감시를 하기 위해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실상은 건물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할머니와 사람들 간의 대화와 움직임 소리였다. 애써 들으려 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소리가 뚜렷이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략적인 내용은 방을 얻으러 온 기자에 대한 신상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는 차마 물어보지 못한 것들을 뒤에서나마 그런 식으로 나름의 추측을 토대로 새로운 사람에 대한 정보의 조각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한편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사람이 화장실로 향하는 소리가 났다. 씻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도 잠시, 걸음소리와 함께 다시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한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작은 쪽문과 얇은 벽만이 세상과 내가 있는 공간을 나눌 뿐, 실질적인 보호막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한다. 다른 방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지만 방문을 두드려 살가운 인사 한 마디 나눌 수도 없다. 문 하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교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방문이 닫혀 있는 이상, 누군가 그 문을 먼저 두드리는 사람조차 없으며, 방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몇 명인지도 모를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방에서 눕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가로 세로 2m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누우려면 잔뜩 웅크리거나 대각선으로 누워야 한다.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복도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방이 총 6개가 있고 계단 바로 옆에는 공용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커다란 창문 하나와 수세식 변기, 수도꼭지 2개와 세숫대야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으며 지린내와 더불어 찬바람이 가득했다. 또 다른 쪽방 거주자는 “그나마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노숙자들도 간혹 여윳돈이 생기면 쪽방에 와서 자고 간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찝찝한 것도 사실이지만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참을 수밖에. 이제는 그런대로 익숙해져서 괜찮다”며 “내 옆방에 누가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 아니겠냐”고 말했다.

위험지구 쪽방촌,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 쪽방 건물은 여관방이나 여인숙처럼 욕실이나 화장실이 별도로 있지 않으며, 오래된 목조 건물에는 방이 5-6개 정도 있는데, 화장실은 건물 당 하나다.
쪽방촌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짐을 챙겨 나가는데 건물 입구에 있던 주인 할머니가 “올 때 길 못 찾겠으면 31호가 어딘지 물어봐”라고 말한다. 옆에 있던 또 다른 50대 아주머니는 웃으며 “칠공주 할머니네 찾으면 돼. 사람들한테 칠공주 할머니네가 어딘지 물어보면 다 알아”라고 거들었다. 다른 쪽방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 두 명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걸어가자 웃고 있던 두 명의 남자는 순간 경계태세를 취했다. 다른 골목을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골목 안에서 지나친 서너 명의 4-50대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며 기자가 31호 칠공주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따라다니기도 했다. 이방인들에 대해 쪽방촌 거주민들은 상상 이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들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쪽방건물들에는 ‘방 있음’이라는 작은 종이쪼가리들이 붙어 있으며 마치 옛날 6-70년대 시장골목 같은 느낌이다. 시장골목이 시끌벅적하고 따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반면 쪽방촌 골목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그들 역시 큰소리로 떠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쪽방 건물들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은 바깥에 널린 빨래들이다. 쪽방촌을 돌아다니다 ‘화재경계지구 지정안내’팻말을 발견했다. “이 지역은 화재발생시 인명 및 재산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어 소방법 제69조에 의거 화재경계지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워낙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다 골목마저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기 때문에 골목 내 소방차의 진입이 불가능하며, 특히 건물 안에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개미집처럼 마주보고 있는 쪽방은 비상구조차 없어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쪽방촌 거주민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쪽방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NP

<박스기사처리>
◆쪽방에 대하여
쪽방의 면적은 3.3㎡(0.7~1.2평) 정도이며, 신장 180cm 이상의 성인 한 명이 자려면 누워서 다리를 굽히고 자야 할 크기로, 방안에 갖추어진 시설은 거의 없으며 판자로 된 선반이 좁은 벽 쪽에 하나 붙어 있고 그 위에 작은 TV가 놓여 있다. 바닥엔 이불 하나가 전부인 작은 공간으로, 장기간 거주하는 방에는 옷가지나 그릇 등 살림살이 몇 개가 있고 휴대용 가스버너나 전기밥솥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이동식 전화기의 충전기도 가끔 보인다. 전화기는 쪽방 주민들이 일자리를 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쪽방 건물은 여관방이나 여인숙처럼 욕실이나 화장실이 별도로 있지 않으며, 오래된 목조 건물에는 방이 5-6개 정도 있는데, 화장실은 건물 당 하나이고, 그 중에 벽돌로 지은 신축 건물들은 층별로 방이 10-15개씩 있으며 화장실도 층마다 하나씩 갖추어져 있다.


◆종로구 돈의동에 쪽방촌이 생기게 된 배경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 3가 번화가 뒤편에 천 평 정도의 대지 위 100개 이상의 건물이 있으며, 건물 안에는 758개의 방들이 벌집처럼 밀집되어 있다. 돈의동(종로) 쪽방의 역사를 보면 일제시대 때 동광시장이 형성되어 벽돌과 아궁이 재료 판매의 주 근원지였으나 활성화가 되지 못하였고, 6?25전쟁을 기점으로 동광시장 및 돈의동 일대(피카디리 극장 뒤편)는 450-500명 정도의 젊은 여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대규모 집창촌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현재 피카디리 극장이 있는 그 위치는 옛날 유명했던 명월관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박정희정권(1970년대 초)때 돈의동 일대의 서울시 정책으로 집창촌을 없애고, 그 이후부터 사람들이 잠 잘 곳이 없으면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일시적인 거주공간인 돈의동 쪽방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집창촌 당시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1층이었으나 돈의동 쪽방으로 바뀌면서 2층으로 개조하게 되었고 숙박 및 고정적인 주거지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IMF 외환위기로 인해 대거 쪽방으로 밀집되고 지금까지 존재해오고 있다.

◆쪽방촌 현황
지난 8월 건설교통부가 실시한 서울 용산·영등포구 쪽방 871가구 주거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쪽방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응답이 54.8%로 과반수를 넘었다. 그 이유는 대개 보증금 마련 등 경제적 이유나 쪽방 등 극빈층 주거지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복지 서비스 네트워크, 빈곤한 이웃끼리 서로 돕는 사회적 연대 등이었다. 쪽방을 포함한 최저 주거기준 미달 가구는 1만1천여 가구로 파악된다. 하지만 대개 교통이 편리한 도심·부도심에 자리 잡은 쪽방촌은 최근‘뉴타운 붐’ 등 재개발 압력에 밀려 집중적으로 철거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에는 서울 남대문로5가동 쪽방촌이 철거됐고 2006년에는 영등포2가동 쪽방들이 모두 철거됐다.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