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현장 - 경무대 그 후광 속에 얼룩진 권력비화(마지막회)


1979년 10.26일 ‘유신의 심장’이 멈췄다. 대통령 1인 독재의 시절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사람들은 곧장 민주화의 봄이 도래 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라의 안위를 지켜야할 군부는 어수선한 정국의 틈을 비집고 그 허점을 악용해 쿠데타를 자행했다. 바로 군부혁명의 연속을 꾀한 ‘제2의 5.16’을 도모한 ‘신군부’의 출현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또다시 15년간의 암울한 치욕의 긴 세월을 군사정권과 함께해야 했다. 

                                                                
‘신군부’의 정체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국내 정치권력구조에는 큰 태풍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당시 박정희 1인 중심의 유신체제하에선 군부와 공화당 그리고 정부 관료가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다. 때문에 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군부와 공화당, 정부 관료들 사이에는 권력의 향방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열한 암투가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권력의 핵으로 돌변한 신군부 가 바로 그들이

▲ 전두환보안사령관과 핵심참모들
었다. 계엄령하에 군부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되었고 결국 군부는 급부상할 수 있었다, 신군부, 그 실체는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키워논 사병화 된 정치군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군부내 ‘하나회’란 불법적인 사조직으로 특히 그들은 박정희의 후원과 비호 속에서 군내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엔 전두환을 필두로 한 보안사령부가 국내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세력을 은밀히 확장해 나갔다. 대통령 피살에 따른 군정시대의 종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누려온 출세와 기득권의 보장을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정희 사망 직후에 이미 전두환을 정점으로 이미 그 연명을 위한 응급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후에 알려진 전두환 심복인 권정달을 비롯한 보안사령부 대령급 장교 5명의 참모진이 바로 쿠데타와 전두환 집권체제를 설계하고 실행한자들이다. 결국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과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기까지 8개월간에 걸친 ‘세계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신군부는 먼저 최규하 정부의 내각장악을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 비상계엄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수부의 권한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공작을 치밀하게 계획, 진행시켰다. 먼저 신군부는 유신관료집단인 신현확 내각장악에 나섰고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수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렵다고 판단,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직까지 강탈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 이면의 수수께끼
12.12쿠데타가 전두환이 이끌던 ‘하나회’ 중심의 독자적 공작이었는지, 아니면 미국의 묵인하에 이루어 졌는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있다. 쿠데타이후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던 위컴은 ‘한국인 들쥐론’을 공공연히 흘리며 쿠데타를 인정하는 논거를 제공했다. 그는 “한국인은 들쥐와 같다. 두목이 누가 되던 간에 그 두목 쥐를 따르게 마련이니, 전두환이고 누구이고 문제가 안 된다”는 투의 망언을 했던 일이 있다. 후에 궁색한 변명이 있었지만, 그는 전두환과 월남전시절 안면이 있었고, 그의 집권에 대해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전두환 체제 당시의 주한미국대사를 지냈던‘릴리’의 자서전을 보아도 이 점은 참고가 된다. 릴리는 전두환의 집권을 사후에 설거지해주는 식으로 그가 김대중을 무리하게 내란죄로 사법 처형하는 것을 오히려 역효과로 보았다. 그래서 전두환을 달래기 위해 레이건이 전두환을 초청하도록 알선해 주고, 한편으론 김대중을 미국요양이란 명목으로 풀어주라고 달래고 있다.(James Lilley with Jeffrey Lilley,CHINA HANDS,Publicaffairs,2004.p266-268) 릴리 등 미국 고위당국의 조처는 어디까지나 쿠데타를 ‘기정사실’로서 인정한다는 전제를 두고 일을 처리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두환 등 신군부가 1980년에 민주화 열기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분위기를 조성 지원한 것은 미국, 일본 등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12.12이후에 전두환이 합동수사를 주도하면서 중앙정보부장까지 현역군인으로서 불법적으로 겸직하고 나섰을 때 이에 일부 민간인 기득권자들까지 이를 묵인하고 부추긴 것은 아닐까. 전두환의 핵심참모였던 권정달(당시 보안사정보처장)이 1996년 내란죄로 검찰조사를 받을때“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신문에“당시 전두환은 차기 대권 실세로 부상하면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란 말을 했다. 중앙정보부의 특별회계로 처리되는 막대한 자금을 전두환이 장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유는 그게 전부만은 아니었다. 국무회의에도 참여해 국정처리 과정에 실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전두환이 대권을 향해 질주를 하는 것을 일찍부터 후원한 ‘돈줄’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을 알면 당시나 지금이나 독재권력의 공범자의 실상뿐만 아니라, 독재에 기생하는 부류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선 전두환 내란죄 소추의 검찰기록과 검찰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공개해야만 우리는 쿠데타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5공의 실세 장세동
3공의 막후실세가 차지철이라면 전두환 정권인 5공에 와서는 장세동을 꼽을 수 있다. 장세동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 통한다.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낸 곳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인연은 지난 66년 파월 맹호부대 중대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세동이 당시 부상으로 입원해 있을 때 문병 온 전두환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인연이후 장세동은 군 복무기간 중 여러 차례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모시고 근무했다.  그리고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는 권력의 요직인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막후실세로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경호실장 시절 ‘심기경호’란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대통령의 신변경호는 물론 기분까지도 경호하겠다는 ‘심기경호’란 말은 그가 전두환에게 얼마만큼 충성을 다해 보좌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충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1989년 5공비리사건과 1993년 용팔이사건(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으로 구속된 것도 모두 전두환 전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충성심의 발로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는 첫번째 구속 당시 검찰조사과정과 법정에서 자신의 구속 원인이 됐던 ‘일해재단 영빈관’이 자신의 책임하에 지어졌음을 일관되게 주장했는가 하면, 용팔이사건 때에도 ‘나 이외에 더 이상의 배후는 없다’고 강조, 자신의 주군인 전 전두환을 끝까지 보호했다. 이후 그는 5·18사건 재수사로 인해 세번째 구속됐었다. 우리 역사상 영남정권하에서 호남출신이 안기부장을 지낸 경우는 장세동 단 한명 뿐이다. 또 역대정권에서 안기부장을 그처럼 오랫동안 지낸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사람도 없었다. 과거 정권의 정보부장들도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항상 견제를 받았다. 사실 그는 12.12사태나 5.18이전까지만 해도 전두환의 뒤를 잇는 제2인자로 평가 될 정도로 전두환과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호남출신이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통령의 견제를 받지 않고 제2인자로서 막후정치의 권세를 누린 비결은 무엇일까? 어떤 집단이라도 공신이 특혜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법, 5공정권의 탄생에는 수많은 공신들이 있다. 장세동이 아무런 공로도 없이 권세만 누렸다면 5공정권의 기라성 같은 영남출신 공로자들이 호남출신의 장세동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세동에게 2인자의 권세를 부여할 정도의 혁혁한 공로는 무엇인가? 바로 5.18광주학살을 계획하고 토지등기부를 위조하여 광주학살을 영원히 은폐하도록 이끈 주모자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주모자가 아니고 한낱 묶인자, 방관자였다면 결코 권세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입 한번 뻥긋하면 세상이 흔들거릴 거다.”라고 입안에 폭탄을 감춘 장세동, 그가 5.18광주학살과 토지등기부를 위조하여 정치인들을 영원한 공범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두환은 그를 안기부장에 임명했고 장세동은 그 조직과 힘으로 5.18 광주사태를 은폐하는 범행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5공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 그는 실제 자신을 알아주는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했다. 한데 왜 호남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인을 학살하는 5.18만행을 계획했는가? 그는 군에 있을 때부터 호남인으로서는 입신양명에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그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국유토지를 나누어주고 연루된 정치인들을 영원한 공범으로 만들어 광주만행을 은폐시킬 계획을 모사한 것이다. 중국제나라시대의 역아는 제환공에게 아들을 요리해 바치고 권세를 누렸다. 장세동 역시 자신의 고향인 호남인의 피를 대가로 2인자자리에 오른 것이다.

‘박철언 파일’과 추악한 막후정치
노태우정권이 들어서면서 권력의 핵으로 돌풍을 일으킨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박철언이다. 월계수회를 조직하여 자신이 노태우의 다음을 준비하며 대통령친인척으로 온갖 특권을 누리고 비리를 일삼은 부패한 6공의 화신이다. 지난해, 6공의 실세이자 황태자로 통했던 박철언씨가 회고록을 썼다. 그가 회고록에서 풀어놓은‘과거사’는 충격적이다.‘막후정치’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해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이 건네졌고, 전두환이 1986년 친위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대법원장 후보라는 사람들이 일개 청와대 비서관 앞에서 면접시험을 보면서“대임이 주어지면 판사들이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는 등의 증언은 충격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문제들은 접고 굵직한 증언들에 묻혀버린 한 만남에 시선을 맞춰보자. 만남의 주역은 박철언씨와 신격호 롯데그룹회장이다. 3당합당 직전이었다 하니 그 시점은 1989년 말쯤이라 판단된다. 신격호 회장은 박철언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김영삼씨가 수상, 김종필씨가 대통령,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한다.”이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서 오간 말들이 무엇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X파일을 통해 공개된 삼성의 행태와 닮아있다. 삼성은 97년 대선 때 여야 후보를 넘나들면서 대권의 향배를 저울질했고, 그 저울질 결과에 따라 ‘보험료’ 액수를 조절했다. 신격호 롯데회장은 정치책사로서 권력 나눠먹기 방안을 조언했다. 정경분리 원칙을 스스로 깨고, 번지수가 다른 곳에 발을 담근 뒤 흙탕물을 튀겼다는 점에서 두 사안의 성격은 같다. 이쯤 되니 떠오르는 사안이 하나 더 있다. <조선일보>는 97년 대선 때 미림팀이 DJP연합 정보를 알아내 당시 여권에 넘겨준 적이 있다는 한 미림팀원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한 원로 언론인이 막바지 진통을 겪던 DJP공조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집권하려면 무조건 JP를 끌어들여야 한다. 공조안부터 받아들이고 보라”고 조언했으며 “DJ가 대통령에 오른 뒤 이 원로 언론인은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공로로 ‘특정’ 자리에 대한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는 게 미림팀원의 증언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정경분리 원칙을 깼고, 이 원로 언론인은 언론인의 금도인‘불가근불가원’원칙을 스스로 깼다. 물론 신격호 회장이나 원로 언론인의 행위에서 불법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X파일에서 공개된 삼성의 행적과는 달리 두 사람의 행적에서는 실정법을 어긴 정황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행적을 국민이면 응당 누려야 하는 정치활동의 자유를 구가한 것쯤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형식적 법 논리를 내세워 두 사람의 행적에 면죄부를 주기에는 왠지 떨떠름하다. 각각 재계와 언론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막후에서 특정 정치인의 책사 내지 고문 역할을 했다는 증언은 정-재-언 카르텔이 어떤 인맥을 통해 작동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다. 정-재-언 카르텔을 구성하는 인물이 특정인 몇몇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며 정-재-언 카르텔이 “음지에서 일하며 권력을 지향”하는 속성을 밝혀낼 수 있는 좋은 단서다. 따라서 두 사람의 행적은 X파일 공개 이후 제기된 “이참에 털고 가자”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손색이 없다. 남은 문제는 규명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나 원로 언론인의 행적은 특정인의 증언에서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규명이 쉽지 않아 검증이 필요하다.  당사자들은 부인과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백이 아니라 규명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 길은 막혀있다. 정-재-언 카르텔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들의 행적이 274개의 도청 테이프에 담겨있지만 여전히 검찰청 창고에서 먼지만 쓰고 있다.

역사의 심판과 교훈   
우리들은 흔히 언론에 발표되는 정치가들의 발언 속에서, 자기들의 행동을 후대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마 자기의 정치적 행동이 역사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인 듯하다. 사실 인간의 행위는 부단히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심판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냉혹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도덕적인 기준에서 정치가의 행동을 판단하여 그를 옹호도 하고 비난도 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 결정은 도덕과 상관없이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치지도자의 식견의 문제일 수 있다. 그리고 식견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과오도 역사 앞에 용서 없는 심판을 받는다. 하물며 도덕적인 결함으로 인한 정치적 과오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한 심판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역사란 한 마디로 사실에 근거한 인간의 과거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과거사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도 과거의 자기 경험을 현재의 생활에 유용하게 살릴 줄 아는 자가 현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도 과거의 경험(역사)을 살릴 줄 아는 민족이 현명한 민족이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살릴 줄 아느냐 하는 것은 곧 그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 얼마나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밑거름이 될 역사의 경험과 반성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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