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영화’는 옛날이야기 아닌 오늘의 재발견

<왕의 남자>가 개봉 45일 만에 꿈의 1000만 관객 고지를 넘어섰다. 제작비 44억 원의 저예산 영화, 스타파워가 없는 영화,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과의 경쟁 등 불리한 여건 속에 한국영화사상 3번째로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간의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역시 역사에 바탕을 둔 영화라지만 왕의 남자는 전통사극으로서 1000만 관객을 넘어선 것이다. <왕의 남자> 돌풍으로 영화계는 사극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기존 사극영화는 눈에 띄는 흥행성적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 투자자들에겐 기피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사극은 TV 드라마에서나 힘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1, 2년 사이 그 판도가 바뀌고 있다. 사극 영화가‘옛날 영화, 철 지난 작품, 중년층이 즐기는 장르’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신선한 소재와 배경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사극 붐이 일고 있는 만큼 올해 대중문화의 키워드 중 가장 강력한 흐름 하나가 바로 사극 열풍이 될 전망이다.


사극의 미학,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다

우리나라의 사극 영화는 1980년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의 텔레비전 시대가 온 후 실상 제작비가 많이 드는 역사극으로서 영화제작에서 거의 그 자취가 사라지고 대신 안방극장의 단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역사극은 새로운 모습으로 영화 제작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50~60년대 사극이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야사나 고전 소설을 각색한 사극 멜로드라마와 궁중 비사, 권력 간의 싸움을 그린 궁중 사극 이었던데 반해 80년대의 사극 영화는 이것과는 훨씬 다른 의미의 작품으로 역사 속에서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며 그것을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두용의‘피막’등 다수의 작품들이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면서 보다 더 서민적, 민중적 입장을 취했고, 임권택의‘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이장호의‘어우동’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사극에서처럼 왕후나 권신 또는 역사 속의 유명한 위인이 아니라 비천한 서민들이며, 이들은 제도와 관습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이다. 서민 사극으로 되살아난 이 같은 역사에 대한 영화감독들의 태도에는 영화미학에 관한 관심과 함께 60~70년대 이후, 폐쇄되어온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이장호의‘어우동’은 사극영화로는 당시 최대의 흥행성과를 거두어 사극제작의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가벼운 터치의 흥행을 목적으로 한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서편제’를 마지막으로 서민을 다룬 사극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하지만 TV 드라마에서는 용의눈물, 허준, 여인천하 등 비평이나 시청률 면에서 대성공을 거두는 정통사극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 여세는 아직도 유효하다.

새로운 장르의 개척, 퓨전 사극의 재미

2000년에 들어서야 한국 영화계에서는 다시 사극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과거의 사극과는 다른 경향의 사극과 다른 장르와의 적극적인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영화 무사와 황산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혈의 누, 형사-듀얼리스트가 대표적인데, 그중 사극영화도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각인시킨 영화는 2003년 개봉작‘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다. 영화‘스캔들’이 사극영화로 기록적인 358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데에는 배용준, 이미숙, 전도연 등 스타들이 출연했다는 점 외에도 기존 사극영화의 이미지를 깰 만한 다양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사극과 달리 영웅이나 위인의 삶을 다루지 않고 시대적 배경만 바뀐다면 현재에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상사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또 조선시대 안방 규수의 작은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써, 스타일이 좋은 영화로도 알려졌다. 지난해 5월 개봉했던‘혈의 누’역시 평단과 관객에게 모두 좋은 반응을 얻은 사극영화다. 조선시대 연쇄 살인극을 다룬 독특한 미스터리 수사물‘혈의 누’는 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가상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어 언제든 현대극으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지난해 개봉작 중 이명세 감독의‘형사’역시 액션과 멜로의 조합으로 새로운 시대극을 선보인 바 있으며, 현대의 남북한 장교가 과거로 돌아가 이순신을 만난다는 설정의‘천군’역시 퓨전 사극을 표방했다.

이처럼 최근 제작, 성공하고 있는 사극 영화들은 기존 소재가 됐던 궁중의 권력싸움이나 고풍스러운 느낌에서 탈피한 새로운 스타일의 사극 영화가 대부분이다. 영화계가 과거로 날아간 작품들을 속속 제작하는 것은 시대와 인물의 지평을 확대함으로써 영화 소재를 넓히고 신선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또 금기시됐던 인물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발상의 전환도 얻을 수 있다. 볼거리 또한 풍부하다.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치는 데다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각색하기 때문에 현대극 못지않은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한국 사극은 지루하다’는 것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편견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최근에 개봉된 사극영화는 이런 편견에 맞서기 위해 과거의 소재는 가져오되, 현대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새로운 사극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 관객들에게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영상의 진정한 만남을 넘어서

사극은 또 하나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사극영화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는 신선한 시도이고 우리나라 영화의 발전이다. 이러한 사극 열풍은 그 동안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 받아왔던 현실에서 벗어나 어린이서부터 청장년층,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사극을 좋아하게끔 만들었고 사극은 나이든 사람이나 보는 드라마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극을 재미있게 보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아가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극의 긍정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극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공연한 역사왜곡 문제이다. 학계와 역사학자 들은 사극의 역사왜곡을 문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에 사극 연출진과 작가가 맞대응 하고 있다. 사실 사극의 역사 왜곡은 실로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교과서보다는 사극에서 대다수 국민들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게 되는 것이 사실인데 역사가 왜곡된 사극을 어린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을 여과 없이 진실로 받아들일 경우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마찬가지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사극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충분히 숙지하여 사료에 근거한 역사의 재평가 작품으로서 제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올해 한국 영화계는 스크린쿼터 축소문제와 더불어 <왕의남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사극영화 붐이 더 크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또 다른 재해석이자 창조 작업인 사극제작이 우리나라의 역사의식을 더욱 고취시키고,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시켜주기를 바란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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