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 1부 수안보권

분위기를 느끼고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계절, 겨울이다. 절로 온몸이 움츠러드는 추위로 옴짝달싹하기 싫을 수도 있으나, 이 계절만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자연에 흠뻑 빠져 보고 싶다면, 역사와 비경이 숨 쉬는 충청북도 충주로 떠나보자.

   ▲ 충주호
☞ 달천에 떠오른 8개 봉우리, 수주팔봉
어느 날 왕이 꿈을 꿨다. 여덟 개 봉우리가 비치는 물가에 발을 담그고 신선처럼 노니는 꿈이다. 과연 그런 곳이 있을까. 왕은 친히 수주팔봉을 찾아 궁궐을 나섰다. 충주의 젖줄인 달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왕의 꿈에 나타난 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달천을 따라 수주팔봉으로 가는 길
“이 땅 물맛 중 최고는 충주 달천이요, 다음은 한강 우중수요, 셋째는 속리산 삼타수다”, 고려 말의 학자 이행은 달천의 물맛을 최고로 꼽았다. 물맛이 달아 ‘감천(甘川)’ 달래강’이라 불리기도 한 달천은 지금도 충주 시민의 식수원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속리산 천왕봉  인근에서 발원해 충북 내륙의 산과 들을 적시며 수려한 계곡을 만든 달천은 충주에 이르러 그 품을 넓히고 충북의 2대 평야 중 하나인 달천평야를 만든다. 충주의 젖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주시의 남쪽과 서쪽을 감싸듯 흐르는 강, 나이 지긋한 충주 시민이라면 강가에서 고기를 낚고 다슬기를 줍던 추억 하나쯤 있을 게다. 물론 달천이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기 전 일이다. 충주 시내에서 달천을 거슬러 오르다가 달천교 지나 살미면 향산리에 이르면 물줄기는 신비한 세상으로 이끄는 안내자가 된 듯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산 그림자 넉넉히 담은 너비에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물빛에 짧은 감탄사가 터진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되는 수달을 비롯해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싯계마을이 있는 이 구간은 생태계 보호 구역으로 지정됐다. 물길을 따라 한가로이 드라이브를 즐기다 보면 너른 물줄기가 ‘ㄷ’자로 산자락을 휘감고 돈다. 강 건너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자락의 바위 능선이 바로 수주팔봉이다. 수주팔봉을 풀어 쓰면 ‘물 위에 선 여덟 개 봉우리’다. 달천 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암봉은 송곳바위, 중바위, 칼바위 등 각기 이름도 있다. 가장 높은 칼바위는 493m에 이른다. 파노라마를 펼치듯 고개를 돌려가며 봐야 수주팔봉 전체를 가늠할 수 있다. 마치 대형 스크린 앞에 선 듯 깎아지른 암봉들이 그려내는 장관에 압도된다. 달천으로 흘러드는 오가천의 물길이 수주팔봉 가운데로 떨어지며 팔봉폭포를 이룬다. 오가천 물길을 막아 농지로 만들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폭포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몸 한가운데가 잘려나간 셈이다. 수주팔봉이 온전한 모습이던 조선 철종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왕이 꿈에 여덟 개 봉우리가 비치는 물가에 발을 담그고 노는데, 발밑으로 수달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듯했다. 그 꿈이 현실처럼 생생해 영의정을 불러 얘기했다.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까. “충주의 수주팔봉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라는 이조판서의 말에 왕이 직접 충주까지 간다. 배를 타고 수주팔봉 칼바위 아래 도착한 철종은 “과연 꿈에서 본 그 곳이구나” 감탄하며 달천에 발을 담그고 한동안 놀았다고 한다. 지금도 왕이 도착한 나루터와 마을은 ‘어림포’, ‘왕답마을’로 불린다. 팔봉교를 건너 왼쪽으로 난 비포장 길을 따라가면 수주팔봉 위에 선 모원정에 오를 수 있다. 충주에 사는 한 농부가 부모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정자에 오르면 회색 암봉들이 그려낸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수주팔봉과 작별을 고하고 흘러가는 달천의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원정에 오르는 계단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 보면 농지를 만들기 위해 인공으로 깎아낸 자리와 달천으로 떨어지는 팔봉폭포의 물길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팔봉서원에서 바라보는 수주팔봉은 기세 높은 장군이 아니라 글을 읽는 선비의 뒷모습을 닮았다. 팔봉서원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되어 1672년(현종 13) 사액서원이 됐다. 이자, 이연경, 김세필, 노수신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훼철했다가 현대에 와서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고풍스런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물가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함 속에 수주팔봉을 바라보는 공간이다.

   ▲ 수주팔봉
수주팔봉을 품에 담아보는, 수주팔봉 캠핑장
달천은 전 구간이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돼 취사나 야영이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팔봉교 아래 일부 구간이 개방돼 수주팔봉의 운치와 달천의 시원한 물줄기를 즐길 수 있다. 팔봉마을에서 여름철 캠핑장으로 꾸미고 관리한다. 물가의 백사장과 자갈밭이 그대로 캠핑장이 되고, 사이트 구분이 없어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텐트를 치면 된다. 수주팔봉을 앞에 두고 캠핑을 즐겨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전국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캠핑장”이라 말한다. 강변 어디에서나 장쾌하게 솟아오른 수주팔봉의 기세를 만나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소리를 음악 삼아 낮잠을 즐기고, 고요한 밤의 장막을 두른 수주팔봉을 바라보며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수심이 얕은 자갈밭 주변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장마가 끝나고 달천의 녹조가 깨끗하게 씻겨나간 뒤에는 따로 샤워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깨끗한 수질을 자랑한다. 그늘막 하나 준비해서 휴일 한나절을 즐기고 가는 충주 시민도 많다. 다슬기, 피라미 등 민물고기가 많이 잡혀 강태공을 즐겁게 한다. 화장실이 있을 뿐 샤워장과 개수대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불편하지만, 고요히 흘러가는 달천을 바라보며 소박하고 너른 마음을 닮고, 수주팔봉을 바라보며 당당함을 배우는 멋진 캠핑장이다.

☞ 만수계곡을 걸으면 만수무강한다
만수계곡은 월악산국립공원 포암산과 만수봉 사이에 자리한 작은 계곡이다. 물 맑기로 소문난 송계계곡의 최상류 물줄기 중 하나로, 푸른 숲 아래를 지나서 동달천을 만나 한 몸이 되어 흐르다 송계계곡이 된다. 그래서인지 계곡을 한 바퀴 돌며 숲과 물의 정기를 들이마시면 만수무강한다는 예기가 전해진다. 계곡의 이름이 ‘만수’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계곡 이름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에 만수봉 아래 만수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이름을 따서 산봉우리도 만수봉으로 불렀고, 계곡 이름도 만수계곡이 됐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계곡 이름의 기원이든 이곳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져서 만수(萬壽)를 누릴 듯하다.

   ▲ 만수계곡
평온한 자연에 남아 있는 아픈 역사
만수계곡자연관찰로 산책 출발 지점은 월악산국립공원 만수탐방지원센터다. 탐방지원센터에 있는 팸플릿을 들고 출발한다. 탐방지원센터에 사람이 있으면 만수계곡자연관찰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출발하는 것도 좋다. 계곡 초입 구름다리에서 연못에 비친 숲과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초록 숲이 그대로 비친다. 그렇게 출발한 걸음을 미래세대자연체험장 잔디밭에서 멈춘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풀밭이 좋다. 그다음에 나오는 야생화단지에서는 월악산국립공원에 자생하는 들꽃 100여 종을 관찰할 수 있다. 여름엔 좀개미취, 백리향, 둥굴레, 까치수염, 참나리 등이 여행자를 반긴다. 그 옆에는 송유 채취 가마가 보인다. 송유는 송진에서 추출한 기름(테레빈유)이다. 1941년 8월, 미국은 자국에서 수출한 석유가 일본의 동남아 침공용 군수물자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그러자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송진을 채취한다. 송진을 증류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송유는 가솔린 대신 항공기 연료 등으로 썼다. 나무에서 직접 송진을 채취하지 않으면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와 옹이)을 송유 채취 가마에 넣어 송유를 만들었다. 송유 채취 가마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는데, 그곳에서 ‘고통 받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일제가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나무에 상처를 낸 흔적이다. 상처 난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병충해에 약하다. 약한 나무는 병충해가 아니라도 다른 나무보다 쉽게 말라 죽고, 살아남아도 흉측한 상처를 숨길 수 없다. 수명을 다해 죽는다 해도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평온하고 푸근한 숲에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렸다.

풍경 좋은 곳에서는 쉬었다 가자
숲이 하늘을 가렸다. 오솔길 곳곳에 나무 데크를 만들었다. 탐방지원센터에서 500m 정도 걸었을까. 만수봉으로 올라가는 길과 자연관찰로가 나뉘는 갈림길이 나왔다. 갈림길에서는 만수계곡자연관찰로 이정표만 따라가면 된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계곡이 서서히 제 모습을 보여준다. 웅덩이의 맑고 푸른 물이 바위 위로 미끄러지듯 흐르다가, 돌과 돌 사이를 지날 때는 콸콸 시원한 소리를 낸다. 그 앞에 앉아 땀을 식힌다. 걷기 쉬운 길이지만 더위에 등이 젖었다. ‘이보다 좋은 게 있으랴’ 생각하며 좀 더 쉬었다. 사람들이 종종 오간다. 일어나 가던 길로 걷는다. 조금 지나니 전에 쉰 계곡의 경치보다 좋은 곳이 나타난다. 커다란 바위가 불규칙하게 쌓인 사이로 물이 떨어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폭포 아래 시퍼런 웅덩이가 깊다. 웅덩이 앞 너럭바위에 사람들이 앉아 쉰다. 숲에는 도심보다 최고 200배 맑은 공기와 음이온이 있다. 공기를 더 깨끗하게 하는 피톤치드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분 좋게 만드는 테르펜 등이 가득하다. 숲이 품은 이런 물질들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한다. 삼림욕하기 좋은 때는 오전 10시나 오후 2시쯤이다. 삼림욕에 대해 적어 놓은 안내판 문구를 빌리지 않아도 숲 그늘 아래 계곡에 있는 몸이 좋은 걸 먼저 느낀다.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물가 바위에 앉아 풍경을 즐기고 더위를 식힌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모양이 한순간도 같지 않다. 시시각각 변하면서도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게 자연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걸으면 반환점인 마의태자교(쌍다리)가 나온다. 마의태자교까지 계곡을 거슬러 올라왔다면, 이제부터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내려간다. 한 계곡이지만 보는 장소와 방향에 따라 풍경이 새롭다. 계곡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출발한 곳에 도착하기 전에 숯가마를 만났다. 예부터 월악산 인근 지역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어 1960년대까지도 철광산이 운영됐다. 미륵리 만수골에는 쇠똥, 노벽 등 철을 생산한 흔적이 있다. 철을 생산할 때 철광석과 함께 숯이 들어가는데, 월악산의 나무로 숯을 구웠다. 생계를 위해 숯을 굽던 사람들이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월악산 만수골에 살았다. 월악산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사람들도 깃들어 살게 했나 보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다.

☞ 53°C 물안비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는 수안보 온천
지난 수백 년간 수안보 온천의 명성을 지켜온 온천수는 맑고 뜨겁고 순수하다. 특유의 냄새나 색이 없어 깨끗한 온천수는 살아 있는 생명의 물이다. 53°C 뜨거운 열정으로 병들고 고단한 사람들의 피로와 아픔을 쓰다듬고, 긴 세월 끊임없이 솟구친 수안보 온천의 생명력은 충주 사람의 삶처럼 강인하고 아름답다.

   ▲ 수안보 온천
왕의 온천이며 백성의 온천, 물안비 
수안보는 ‘물안비’라는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있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을 ‘물이 솟는 보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물안보’, ‘물안비’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바뀌면서 수안보가 됐다. 수안보 온천에 대한 기록은 조선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에서 맨 처음 볼 수 있다. 1018년(현종 9) 상모현에 온천이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 헌종 때 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연풍현 수안보 땅에 온수가 있는데, 수질이 좋아 병자들이 많이 몰려든다. 이 물 역시 냉열이원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다양한 역사를 품은 수안보의 시대적 의미는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수많은 고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피부병을 치료하려고 찾았다는 내용이 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숙종이 휴양과 요양을 위해 찾았다는 <청풍향교지>의 기록을 봐도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수안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성처럼 뜨겁던 53℃의 수안보는 왕이나 지위 높은 귀족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논에서 처음 온천을 발견한 사람도 피부병에 걸린 백성이다. 논바닥에 누워 자다가 볏짚 아래에서 스며든 따뜻한 온천수를 발견한 뒤,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다가 피부병이 나았다는 것도 평범한 백성의 이야기다. 의료 시설이 없던 시절, 수안보온천의 약효에 대한 소문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놀라운 효능을 봤다는 미담은 수없이 많다. 이렇듯 온천에서 평생 지병이던 피부병을 고친 사람들에게 온천은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피부병 외에도 신경통, 류머티즘, 위장병, 부인병 등에 효과가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수안보온천이 좋은 이유를 말할 때 몇 가지를 공통적으로 꼽는다. 지하 250m에서 솟아나는 수온 53℃, pH 8.3의 약알칼리성 온천수에는 라듐, 칼슘, 나트륨, 불소, 마그네슘 등 인체에 이로운 광물질이 풍부하다. 수안보 온천수는 맑고 깨끗하며, 받아서 한 달 이상 두어도 썩지 않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온천수가 용출되면서 거치는 지층의 구조가 온천수의 성분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수안보온천 지대를 형성하는 맥반석에서는 원적외선이 발생해 각종 세균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수안보온천의 물 자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피부가 탱탱해지고 윤기가 흐른다. 해서 노화 예방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 수안보 온천
힐링의 역사를 새로 쓰는 물탕거리
수안보 온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 용출 온천이다. 온천수를 개발할 때 필요한 시추 과정 없이 온천수가 땅을 뚫고 솟아났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물의 성분이 순수하고 힘이 있다. 수안보 온천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자체가 온천수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 방식을 고집한다. 수질 관리와 온천수 보호를 위해 충주시에서 온천수를 확보한 뒤 호텔이나 대중탕에 공급한다. 수안보 온천 지구에 있는 호텔과 모텔, 콘도 등이 모두 똑같은 물을 공급받는 셈이다. 굳이 온천수가 나오는 장소에 찾아가지 않아도 가까운 대중탕이나 숙소에서 온천수를 바로 사용할 수 있으니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호텔급 숙소에서는 객실과 별도로 대욕탕을 운영해 관광객이 여유롭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수안보 온천 지구의 모든 숙소에서 온천수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온천수를 제공하지 않는 곳에 묵을 때는 수안보에서 유명한 대중 온천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사)수안보온천관광협의회가 충주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온천장으로 하이스파가 있다. 온도를 낮추기 위해 수돗물을 섞지 않고 자연 냉각 방식으로 수온을 조절하는 등 수안보를 찾는 관광객에게 품격 있는 온천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수안보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워터파크식 온천, 가족과 연인을 위한 가족탕도 운영해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겨울에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뜨거운 온천을 하며 색다른 시간을 보내고, 봄가을에는 아름다운 풍광과 온천을 즐기는 노천탕도 빼놓을 수 없다. 온천수를 제공하는 숙박시설은 사용 허가증으로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다. 수안보 입구 서낭당 맞은편에 물탕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태곳적 노천에 솟아나던 온천의 원형인 물탕이 있다. 물탕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으면 안을 수 있는 연못처럼 생겼다. 표면으로는 물이 솟는 것을 볼 수 없으나, 가운데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 정도로 온천수가 솟아난다. 식수로 쓰기 위해 물을 떠가기도 하고, 물탕에서 석문천까지 흘러가는 도랑에서 식은 온천수를 받기도 한다. 수백 년간 멈추지 않고 온천수를 뿜어낸 물탕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온천을 이용하기 번거로운 여행자에게는 물탕공원이 서비스해주는 온천 족욕탕이 있다. 물탕공원을 찾은 사람 누구나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쉴 수 있다. 여행자와 충주 시민이 맨발로 만나는 낙안정은 4월부터 10월 말까지 무료로 운영된다. 9~10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그 외에는 오후 8시까지 넉넉하게 즐길 수 있다. 38~43℃ 물에 무릎 아래까지 푹 담그고 10~20분 있다 보면 여독과 스트레스가 말랑말랑하게 풀린다. 낙안정 앞에 설치된 상설 공연장은 해마다 열리는 수안보온천제의 문화 행사장이다.

☞ 옛 절터에 서린 미륵의 바람, 충주 미륵대원지
수안보에서 남쪽 미륵리로 방향을 튼다. 월악산 남서쪽 자락이다. 그 언저리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하늘재로 초입에 충주 미륵대원지가 산 증인처럼 자리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땅속에 묻혀 잊힌 줄 알았던 역사다.

   ▲ 미륵대원지
미륵대원, 1000년 잠에서 깨다
1976년,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절터의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석물이 나왔다. 미륵대원이 1000년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였다. 그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댕이’라 부르는 논밭이고 집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 수행자가 암자를 짓고 미륵불에 제를 올렸으나, 미륵의 일부만 보이는 상태였다. 석등도 대부분 땅에 묻혀 있었다. 미륵대원지는 1977~1993년에 발굴됐다. 1차 발굴에서 ‘명창3년 대원사 주지 승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 적힌 기와가 나왔다. 사찰 이름이 대원사라는 게 밝혀졌다. 4차 발굴 때는 동쪽 언덕에서 원(院)이나 역지(驛址), 군사시설로 볼 수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삼국유사>(왕력)편에 적힌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의 미륵대원이었다. 사찰인 대원사와 관리들의 숙소 격인 미륵대원이 유기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구획뿐인 경계를 넘어 절터로 걸음을 낸다. 절터는 북향으로 길쭉하게 자리한다. 왼쪽은 낮은 언덕이고, 오른쪽은 인공 하천이 지난다. 그 중심에 오층석탑(보물 95호)과 석등(충북유형문화재 19호),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이 일렬로 서서 축을 이룬다. 가장 먼저 부러진 채 누운 당간 지주가 반긴다. 발굴 전에는 동네 ‘미자 할머니네 장독대’로 쓰였다고 한다. 끝자락의 연꽃 모양이 눈길을 끈다. 곧이어 비석의 받침돌로 쓰였을 귀부(충북유형문화재 269호)다. 비석은 찾을 수 없는데, 불사 과정에서 미처 올리지 못한 채 방치됐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에는 주로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를 새겼지만, 미륵대원지 귀부는 오롯한 거북의 머리다. 규모도 전국에서 손꼽을 만하다. 원래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조각해 만들었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과 살짝 발가락만 보이는 왼발의 모양새가 흥미롭다. 몸에 새긴 또 다른 부조도 재미나다. 왼쪽 어깨 주름 아래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어미의 등에 기어오르고 있다. 귀부 뒤로는 전각이 있던 터다. 석탑과 석등이 뒤를 잇는다. 오층석탑은 절터의 중심이다. 땅 깊숙이 뿌리 내린 하부 기단은 자연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석탑과 일직선에 있는 석등과 석조여래입상 역시 자연석 기단 위에 들어섰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래서 일직선이지만 정확한 직선은 아니다. 그 경우 석탑은 사찰 건축의 출발점이다. 석등은 팔각석등과 왼쪽의 사각석등(충북유형문화재 315호)이 있는데, 석등 사이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미륵대원지 5층
만인이 꿈꾸던 땅, 중원
석조여래입상은 다시 기단 3단을 지나 마주한다. 미륵대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유물이다.  높이 10.6m 불상은 경주의 석굴암을 닮은 구조가 이채롭다. 불상은 삼면이 석실로 둘러싸였다. 가로 9.8m에 세로 10.75m 크기로, 높이 6m 석축을 둘렀다. 땅을 파고 돌을 쌓아 조성한 모양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보살상이 있었을 것이다. 부조한 불상 흔적이 증거처럼 남았다. 석불 뒤에는 물길을 들여 제습 효과를 도모한 흔적도 있다. 바닥 또한 정교하다. 다만 석축은 불상의 어깨 높이까지 쌓아 완전한 석굴로 보기는 어렵다. 그 위로 목조 지붕을 이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석불은 팔각 보개로 햇살을 피한다. 표정이 온화하고 그윽한 미소가 매력이다. 하지만 몸체에 비해 어깨가 좁다. 지난 2004년에는 땀 흘리는 석불로 화제를 모았다.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됐는데, 한동안 석불의 왼쪽 눈 위만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모 방송국에서 이틀 동안 촬영했다. 물기는 서서히 사라졌으며,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석조여래입상이 북쪽을 바라보는 절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마의태자가 서라벌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지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그만한 세력과 경제력이 있었을 리 만무한데, 미륵불인 석조여래입상이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세운 북쪽 덕주사의 마애불과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미륵불에 더한 신라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고려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신흥국가의 염원을 담았다고도 한다. 인근 마을의 고구려식 지명 상모리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지세에 따라 주봉 월악산을 보고 북향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의도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그저 중원의 운명이다. 중원은 충주의 옛 지명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9주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이라 했다. 고려 때 충주로 개칭했으나, 오랜 시간 중원부나 중주 등으로 같이 불렸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웅이 할거하는 격전장으로 종종 등장한다. 충주는 삼국시대에도, 통일신라를 지나 후삼국 때도 가장 첨예한 전장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 또한 거기에서 기원할 것이다. 미륵대원은 사찰의 창건 시기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략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 태조와 혼인한 충주 유씨 집안에서 창건?불사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미륵불이 간직한 의미와 가치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미륵불은 불교의 부처 가운데 말세에 중생을 구제하러 올 것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부처다. 석조여래입상 앞에는 그 증거처럼 염원이 서린 바위가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날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바위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을 돌릴 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고, 쌀알이 부서지면 딸을 낳았다고 전한다. 화강암 바위의 손바닥만 한 머리 부분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윤기가 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그 위에 더해졌을까. 빈 절터가 허전하지 않은 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끝나지 않은 바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 1800여 년 전 옛사람의 걸음을 따라, 하늘재
문헌이 기록한 최초의 길, 하늘재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발끝에 설렘을 안긴다. 1800여 년 전 옛사람처럼 숲길로 접어들어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때도 느릿하고 여유로운 걸음이었을까. 옛날의 국경은 이제 인자하고 푸근한 노인의 표정으로 사람을 안는다.

   ▲ 하늘재
관음에서 미륵으로, 현세에서 미래로
고개 아래 충청도 방면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다. 반대편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불과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러 올 미륵불이다. 그 사이를 잇는 길이니 하늘에 닿는 고개, 하늘재라는 이름이 남우세스럽지 않다. 염주를 돌리듯 내는 걸음마다 번뇌 대신 평안이 찾아드는 게 우연이기만 할까. <삼국사기>에 156년 아달라왕이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기록된 문헌에 나오는 가장 오랜 옛길이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목숨 걸고 되찾겠다고 다짐한 땅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넘은, 1800여 년 전 옛사람이 낸 길이다.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과 서울을 잇는 죽령보다 2년이 빠르고, 조선 시대 하늘재를 대신하며 등장한 조령(문경새재)보다 1000년이 빠르다. 그 영욕의 걸음을 고스란히 받고 살았으니, 하늘재 자체가 부처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그 길의 출발은 충주 미륵대원지다. 하늘재는 미륵대원에서 시작해 고려 때는 대원령이라고도 불렸다. 그 전에는 지금의 닷돈재와 지릅재, 하늘재를 합쳐 계립령이라고 불렀다. 산적이 많아 통행료로 닷 돈을 내야 한다고 닷돈재요, ‘겨릅’이 많아 지릅재다. 미륵대원지는 자연스레 마의태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장남이다.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 신라가 항복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麻衣]을 입고 초식하다 죽었다. 그가 금강산으로 가다 하늘재를 넘기 전이었다.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신라의 부흥을 위해 절을 지으라 명했고, 대원사를 지은 뒤 8년을 머물렀다고 전한다. 같은 꿈을 꾼 여동생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마애불을 세웠다던가. 떠도는 전설이다. 그가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한 건 사실인 듯하다. 서라벌에서 금강산까지 가장 가까운 동해안 길 대신, 내륙의 요새를 지난 건 저항 세력을 규합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포자기든, 절치부심이든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신라의 중흥을 꿈꾸며 연 길을 쓸쓸히 걸어가는 패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자라는 자괴감은 물어 무엇 할까. 충주 땅에 마의태자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하는 것도 같은 까닭이리라. 그래서 미륵대원에서 출발하는 하늘재는 마의태자의 자취를 되짚는, 미래의 미륵리에서 현세의 관음리로 향하는 여정이다.

위로와 평안의 하늘 길
미륵대원을 벗어나니 은행나무가 좌우로 늘어섰다. 가을에는 단풍이 노랗게 물드는 길이다. 오른쪽 너른 터는 옛 병영으로도 쓰인 원의 터다. 미륵대원지가 단순한 원이 아니라 군사적 요충이었음을 덧붙인다. 은행나무 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재 표석이 나온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하늘재다. 도로 대각선 맞은편에는 충주 미륵대원지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33호)도 있다. 평범한 통일신라 양식으로 만든 고려 시대 석탑이다. 과거에는 길의 지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삼층석탑 대신 역사·자연 관찰로의 26개 표식이 대신한다. ‘탑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부터 ‘장승과 솟대’ ‘숲의 한 살이’ 등의 설명이 하늘재를 따라 아이들과 눈을 맞춘다. 숲이 깊어지자 발끝의 촉감도 살아난다. 흙을 밟는 기분 좋은 걸음이다. 초록의 활력이 심신을 달랜다. 중간에는 샛길로 난 구름다리도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역사ㆍ자연 관찰로다.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청명하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직진해도 무방하다. 두 길은 해발 525m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다시 만난다. 몇몇 나무도 눈길을 끈다. 수령이 어린 연리지는 이제 막 몸을 합쳐 하나로 자라고 있다. ‘김연아 나무’도 독특하다. 피겨스케이팅 스파이럴 자세와 비슷해 김연아 나무라 불린다. 박윤규 시인의 ‘소나무’가 적혔다.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하늘재 산장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주인장 입담이 보통이 아니다. 그 옛날 국경에서 지난 역사를 줄줄이 들려준다. 산장 맞은편에는 하늘재비를 향한 계단이 있다. 짧지만 제법 가파르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전망대 구실을 한다. 가까이 포암산에서 멀리 백두대간이 물결친다. 발아래는 문경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도로다. 하늘재 옛길은 충주 미륵대원지에서 하늘재 정상에 오르는 구간이 전부다. 옛날에는 두 길이 하나로 같은 모양이었을 것 같다. 그때는 지금의 고속도로에 버금갔겠다. 폭이 2~3m에 불과하지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국사였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저 한갓진 숲길이다. 영화는 사라지고 긴 세월 묵묵하게 지켜본 나무들만이 길 위에 그늘을 드리운다. 인간의 역사란 그 영욕의 몸부림이란 자연 앞에 얼마나 초라한가. 어느덧 길은 1800여 년을 돌아와 전장의 목적을 상실하고 느긋한 심정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그 길에서 숲이 건네는 말은 화해와 용서요, 위로이자 평안이다. 느리게 걷는 길이요,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호흡을 맞춰 걷는 길이다. 중원을 향해 느린 걸음을 내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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