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낙태죄 폐지 시위 심층취재

(사진출처=불꽃페미액션 페이스북) 

[시사뉴스피플=백지은 기자] 참을 만큼 참아온 여성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 진료행위’로 규정해 의사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이 발표되자 여성계와 산부인과의사회는 즉각 반발에 나섰다. 거센 반발에 맞닥뜨린 정부는 입법예고안 재검토에 들어갔지만 그동안 임신과 출산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의해 이에 대한 권리를 절대적으로 통제 당해온 여성들의 분노는 낙태 ‘죄’ 폐지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 도심을 뒤덮은 검은 물결

10월 15일 오후, 검은 옷을 입은 수백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뒤덮었다. 머리부터 발 끝 까지 검은 옷을 차려입고 검정색 마스크까지 착용한 이들의 손에는 ‘내 자궁은 나의 것’, ‘여성의 몸은 출산용이 아니다’ 등의 문구를 휘갈겨 쓴 팻말이 들려있었다.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등 여성주의 그룹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시위는 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간주하고 관련 의사 처벌을 강화하기로 한 정부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 열렸다.

시위를 위해 종로구 보신각에 모인 참가자 500여명의 드레스코드는 최근 폴란드에서 일어난 전국적인 ‘낙태 금지법 반대 시위’를 이끈 여성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은데서 착안한 것이다. 2,30대 여성 참가자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들 가운데 젊은 남성 시위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현행 모자보건법이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결정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원치 않는 임신의 책임을 의료인과 여성에게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수술의 허용한계를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혹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등으로 규정해 두고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만 낙태수술이 가능하도록 정했다.

이들은 자유발언을 통해 피임과 임신, 중절수술 등과 관련한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을 밝히며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여성의 기본권임을 강조했다. 자유발언대에 선 사회예술가 홍승희씨는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예비신부, 엄마이기 전에 인간일 뿐이다. 자궁은 누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나의 것이지 공공재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피임은 여성 혼자서만 할 수 있는게 아니며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가 낙태를 하면 죄인이니 살인범이니 하며 손가락질 한다”며 세상의 편견에 대해 꼬집었다. 이어 정부가 내년 출생아를 2만 명 늘리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해 “지금 살아있는 사람도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하는 정부가 새로운 생명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출산한다. 여자는 가축이 아니다. 왜 임신을 강요하는가?"라며 정부의 잘못된 출산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자유 발언을 마친 참가자들은 찬송가를 개사해 "덮어놓고 낳다보면 나는 인생 X망해, 덮어놓고 낳다 보면 나는 경력단절녀, 몸 상하는 것도 비난 받는 것도 모두 나, 나도 사람이란다" 등으로 가사를 고친 주제가를 부르고 “낙태죄 폐지”, “여성의 권리 수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 일대를 행진했다.

(사진출처=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 산부인과 의사들도 동참... 전문가적 위치에서 목소리 높여

시위에는 현직 산부인과 의사들도 다수 참가해 전문가의 시선에서 현행법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 눈길을 끌었다. 17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산부인과 전문의 윤정원씨는 “매년 20만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임신중절 수술대에 오른다”고 운을 떼며 “여성을 전신마취 시킨 후 진공흡입으로 시술이 이루어진다. 임신 초기에는 이보다 더 안전한 중절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낙태가 불법이기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비도덕적인건 여성이 아닌 여성이 위험한 선택을 하도록 내모는 국가”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산부인과 의사는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애원하는 여성들과 산부인과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고 불법 낙태 수술에 대한 처벌만 강화한다고 하는 것은 화가 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낙태를 금기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법 제도가 현실적으로 효용이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낙태 찬성 의견 전국민적으로 우세  

임신중절에 대한 찬성 여론은 전국민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갤럽이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4%가 ‘필요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이는 국민 10명 중 과반수를 훌쩍 넘긴 7명꼴이 찬성하는 것으로 낙태에 대해 찬성의견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던 지난날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적 기조가 형성된 것이 확인됐다.

필요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 이유로는 ‘원치 않는 임신일 경우’가 31%로 가장 많았으며 ‘성폭행 등 범죄로 인해 임신한 경우’(18%), ‘미성년·미혼 등 감당할 수 없는 경우’(17%), ‘개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9%)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에 낙태 금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생명존중(41%)’과 ‘인구 감소 우려(35%)’ 등을 이유로 들었다.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최우선시 하는 반면에 허용론자들은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보다 이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쟁점을 피력하고 있다.

◆ ‘생명’의 규정은 무엇인가?

낙태 수술을 찬성하는 이들은 태아를 ‘생명’으로 규정하는 시각에도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궁벽에 착상한 수정란은 임신 10주까지 ‘배아’라 불리며 크기는 약 3cm 정도다. 포도알 크기였던 배아는 임신 10주차부터 ‘태아’가 되며 12주 무렵 태아의 크기는 약 7cm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임신중절수술의 70% 이상은 임신 12주내에 이루어진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5-6주차에 바로 수술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세포 덩어리로 이루어진 배아 상태로 이를 생명으로 규정 짓기 어렵다는 주장이 강하다. 이 시기의 수술 방법은 진공관이나 기구를 통해 자궁내막을 흡출하는 것이다.

여성계는 임신 중기 이후, 누가 봐도 ‘생명’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신체 기관이 발달하고 크기가 커진 ‘태아’를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잔인한 방법으로 ‘조각’내지 않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임신 초기에 안전한 중절수술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여성의 권리 또한 존엄하다

불법 낙태수술 적발 시, 수술대에 오른 여성과 수술에 관여한 의료인을 처벌하는 내용의 현행법 그 어디에도 임신을 가능하게 한 남성의 책임을 묻는 부분은 없다.

여성들은 중절수술 경험이 있으면 ‘살인자’,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도 출산을 감행하면 ‘미혼모’의 낙인을 평생에 걸쳐 견뎌내야 하는 존재는 늘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둘 중 어떤 선택을 해도 ‘몸을 함부로 굴렸다’, ‘시집가기는 틀렸다’는 편견과 폄하는 여지없이 따라온다.

국가가 그토록 강조하는 생명의 존엄성은 한 생명이 가진 권리와 인격의 존엄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의료법 개정안으로 불붙은 이번 시위는 단순히 낙태 합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기본권 사수와 직결된 움직임이다. 분노로 똘똘 뭉친 ‘검은 물결’이 대한민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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