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피플=진태유 논설위원]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가 4월 19일 국가수반인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새 의장에는 수석 부의장이었던 미구엘 디아즈카넬이 선출됐다.

미구엘 디아즈카넬은 그동안 후계자로 선촐 될 때까지 천천히 권력승계를 이어왔고 전임자의 정치노선을 신봉해왔다.

그는 외견상 과묵하고 표정이 없는 소련 공산당 중진간부의 모습과 흡사한 57세의 젊은 정치인이다. 조언자인 라울 카스트로의 지원 아래, 음밀하고 인내심 있게 권력상층부까지 차근차근 올라왔다.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수반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후계자로 그를 지목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재혼한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1959년 쿠바혁명이후 태어 난 혁명이후세대이다. 라울 카스트로에 의하면 “그는 이념적으로 굳건한 사상으로 무장한 평범한 시민이지 벼락출세한 사람도 아니고 권력찬탈자도 아니”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교사였고 아버지가 기술자였던 미구엘 디아즈카넬은 1960년 4월 20일 빌라 클라라 지방, 프라스타스에서 태어났다. 1985년 라스 빌라 중앙대학교에서 전자공학 엔지니어 자격증을 획득한 후에, 혁명군 장교로 복무하며 그의 직업경력이 시작됐다. 이후 대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방의 청소년 공산주의자 지도자가 되었으며 국제적 임무로 니카라쿠아에 파견(1987-1989)된 바도 있다.

귀국후, 그는 지방과 중앙의 청소년 공산주의자 지도자를 거치면서 국가조직 내에서 괄목할만한 계급상승이 이어졌다. 특히 1991년부터 약관의 30세에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들어갔다. 3년 후에는 빌라 클라라 시의 공산당 제1비서가 되었다. 그로 하여금 주 지방의 주요 권력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는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냉철한 젊은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소련의 경제원조가 종결되었을 때 경제적 빈곤의 상징인 자전거를 타고 공무를 보기도 했다. 그는 늘 청바지를 입었고 비틀즈의 팬으로 자칭했으며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산타 클라라 문화원을 열기도 했다.

2003년 쿠바공산당은 그를 올긴 지방의 제1비서로 임명했다. 곧 그는 반세기 동안 FAR 장관이었던 라울 카스트로 장군의 명령에 따라 당의 정치국에 들어가게 됐다.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는 미구엘 디아즈카넬을 계속해서 중앙무대로 올리려 여러모로 애를 썼다. 그 덕에 그는 2009년 고등교육부장관이 되어 중앙정부에서 공직을 맡게 됐다.

그리곤 3년도 되지 않아, 미구엘 디아즈카넬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들을 대신해서 교육, 과학, 문화와 스포츠 담당 장관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게 됐다. 2013년에는 주 및 장관의위원회의 제1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신세대의 또 다른 대표로 승승장구했다.

그의 정치적 도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가수반 승계의 제일선에 우뚝 서게 됐다. 당연히 국내와 국외의 공식 활동이 잦아졌어나 대중들 앞에선 과묵했고 외국 언론과는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적 활동 때나 비공개 회의 익명에 의해서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뿐 일체의 모든 논쟁을 피해왔다.

2017년에 당 간부 학교 앞에서 전달 된 연설은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전환에 반대하는 준엄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심지어 개혁주의적 대안을 구체화할 것을 주장하는 "중도파"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견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열정적으로 정치적 유산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카스트르사상에 경도된 엘리트들에게 확인시켜주고자 노력했다.

4월 19일 국회에서 재적의원 604명 중 604

명의 찬성(99,83%)으로 지명된 미구엘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첫 연설은 자신의 전임자와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우리 쿠바 입법부에 국민들로부터 주어진 위임장은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에서 쿠바혁명을 계속 하는 것이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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