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현장 - 경무대 그 후광 속에 얼룩진 권력비화(3)


1979년 10월26일, 청와대 지척인 궁정동 안가에서 자신의 주군이던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무소불위의 권력을 토해내던 그는 대통령의 마지막 심복이자 그림자였다. 박정희와 5.16 군부쿠데타의 성공과 함께 운명적으로 만나 약속이나 한 듯 세상의 마지막 역시 그와 비극적인 운명을 같이 했다.
                                                                      
군(軍)이 맺어준 인연과 끝
차지철이 태어날 무렵 그에게는 지(池)씨 성을 가진, 아버지가 다른 누나 셋과, 엄마가 다른 형 하나가 있었다. 형의 이름은 희철. 그리고 지철이 막내였다. 그러나 지철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차윤염은 형 희철을 데리고 어디론가 집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이력은 별로 알려진바 없고 이것이 얼마 안 되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의 가정환경사이다. 미국에서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2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출마, 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주공화당 지역구 7·8·9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국회 외무위원장과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육군대위로 5.16쿠데타에 참여, 박정희소장의 경호장교를 맡으면서 그의 삶은 박정희와 분리될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 후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 10·26일,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각하가 곧 국가다
1974년 8.15일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사망8일 후 '피스톨 박'으로 상징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박종규(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은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車智澈) 에게 15년 남짓 누려온 '대통령의 오른팔' 자리를 내줬다. 공화당 정권의 권력이동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자 그는 경호실을 권력의 핵으로 키워나간다. 차지철은 경호실을 단순히 대통령의 신변을 경호하는 차원을 넘어 대통령의 권력을 경호하는 이른바 정권의 파수꾼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대통령의 안전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모든 가치 기준을 여기에 맞췄다. 그의 방 한쪽에는 '각하가 곧 국가다'라는 표어가 붙었을 만큼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경호관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그는 각하를 경호 한다는 명분아래 대통령의 권위를 빌어 경호실의 역할과 위상을 무한 확장하기에 이른다. 경호실에 차장제를 신설, 차장을 차관급으로,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면서'대통령경호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었다. 중앙정보부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육해공군참모총장을 위원으로 두고 대통령 경호실장이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그는 공인되지 않은 권력2인자로 변해갔다. 경호부대의 무장도 탱크, 장갑차, 헬기 등 사단규모의 화력을 갖춘 중화기를 동원했다. 민간인 신분인 경호실장이 유사시 군병력(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관련법도 만들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청와대 경비를 책임지는 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30경비단 연병장에서는 일주일마다 '국기하기식'이라는 기묘한 행사가 치러졌다. 그는 경호실 병력과 화기를 총동원한 사열식 행사에 국회 요인, 정치인, 장관, 군 장성 등을 초청해 참관시킴으로써 자신이 권력의 2인자임을 과시했다. 돌아서서 비판은 했지만 아무도 감히 그 초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또한 차지철은'임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자'는 내용의'경호원의 노래'까지 만들어 30경비단 사병들에게 부르게 했다. 아침마다 이 노래를 듣던 박대통령은 어느날 그 노래를 그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충성은 가슴에서 우러나 하는 것이지 노래 따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많은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차지철식의 과잉 충성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차지철로 대변되는 청와대 경호실은 단순히 대통령의 안전만을 책임지는 본연의 업무에서 벗어나 권력을 어우르는 한 축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 연병장에서 사열식 행사를 하고있는 차지철 전 경호실장
대통령경호실
문세광의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숨지던 날, 총성이 울리자 제일먼저 권총을 빼어들고 연단 앞으로 뛰쳐나온 사람이 있었다. TV를 시청하던 그당시 많은 국민들은 박종규실장의 충직과 용기에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나 박실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어 경호실장직에서 물러났다. 박대통령도 후에 그 날의 녹화테이프를 보고 박실장의 두려워하지 않는 경호임무 수행에  깊은 신뢰감을 보냈다한다. 이렇게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위험을 몸으로 막는 경호실장은 대통령에게 가장 충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림자처럼 대통령 신변을 지키는 본연의 경호업무만을 수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불행히도 우리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경호실장이 최고 권력자를 등에 업고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는 직위를 초월한 월권행위는 그당시 우리의 정치상황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야별 실무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정책분야에서 힘을 쓴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경호실이 권력을 틀어쥐고 대통령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가장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인 국가운영은 결국 타락한 정권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박정희정권 말기의 차지철 경호실장의 행태가 그 전형적인 예라할 수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스케줄을 관장하는 자리는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경호실장에 비해 권력암투와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 비서실은 매일 아침 그 날의 대통령 행사 일정이 확정되면 이를 맨 먼저 경호실장에게 알린다. 경호 업무상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체크해야하기 때문이다. 경호에만 필요한 업무라면 별다른 권력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닌 이 정보가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한 충성경쟁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독재자 아래서 권력투쟁이란 바로 그의 신임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때문에 대통령의 총애를 차지하는 경쟁에서 그의 일정을 안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삐뚤어진 위상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알현 할 때 면담자는 연령과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소정의 명찰을 달고 면담규칙을 지키게 돼 있다. 이런 업무역시 경호실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관장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장관이라도 대통령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거나 불경스런 자세를 보일 경우 경호실의 호출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이른바 대통령 면담교육을 시키는데 때론 심한 모욕감을 감내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호실은 대통령 한사람 외에는 모두가 경계의 대상이다. 10·26사건 이후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경호실장의 힘은 이렇게 대통령의 생명을 지킨다는 임무수행에서 파생된다. 대통령의 안위가 걸려 있다는 것을 내세우면 경호실의 임무수행은 얼마든지 확대 해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군정시대 권력기관들의 전횡은 각기 본연의 임무를 확대해석한 데서 비롯됐다. 중정과 보안사는 정보수집과 대공수사권을 확대 해석하여 정부, 언론, 대학, 사회단체, 종교단체들을 불순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기관원을 상주 출입시켰다. 또 중앙정보부는 정부기관에 대한 보안감사권을 가져 사실상 모든 관료체계를 감시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에다 정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터져 정부가 처리방안을 논의할 때도 중정에서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주도했고 이는 곧 중앙정보부의 파워를 확장시켜주는 근거가 됐던 것이다. 이같은 권력의 확장생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앞에서 언급한 차지철이 만든‘대통령경호위원회’였다. 경호실은 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경호원 등이 합동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경호실에 소속된 군경 외에도 경호실장은 필요에 따라 군부대와 기타 국가기관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을 확대해석한 것이‘경호위원회’라는 발상이었다. 그는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각료급보다 우위에 군림하려는 월권을 자행한 것이다. 업무영역이 나뉘어 다원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측근에서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면 일방적으로 어떤 분야의 일이든 주도할 수 있는 풍토, 이것이 바로 군정통치의 발산이요 권력집중구조의 병폐인 것이다.

경호실과 군부의 끈
박대통령은 집권 후 경호실장을 오른팔처럼 썼다. 박종규와 차지철이다. 박대통령이 가장 변함없는 신임을 주었던 부하가 이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정권하에서 이들의 위상은 그어떤 권력암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과도 같았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건 5.16쿠데타 당시부터 박정희 소장의 경호담당으로 인연이 이러니 이들에게서 막강한 힘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과 안현태, 노태우 정권 때의 이현우와 최석립 등 경호실장은 모두 군 출신이 맡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대통령이 군 시절부터 분신처럼 따라다닌 부하를 경호실장으로 두는 상황에서 어떤 세력도 그의 위상을 꺾을 수 없었다. 이들 경호실장은 군 장성 진급 및 보직인사의 내인가에서부터 이른바‘대통령 관심사항’을 해결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처리하는 가신 역할을 했다. 군 장성 인사에 내인가란 제청권자인 각군 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에 앞서 경호실장이나 보안사령관 또는 대통령의 친인척 등이 대통령으로부터 특정장성의 진급이나 보직을 내락 받아 두는 관행이었다. 또 예비역 장성이나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주로 국영기업체의 수장 자리를 알선해주는 일도 경호실장이 맡았다. 5,6공시절 수많은 국영기업체와 정부출연단체의 사장 이사장 감사 등 임직원 자리를 보면 군 장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 군 출신들의 뒷자리를 관리해온 창구가 바로 경호실장이었다.

철권 정치의 양대 산맥 ‘북악산과 남산’
군사정권 시절 권력자들 간의 암투에서 가장 적나라한 것이 대통령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의 힘겨루기였다. 대통령 경호실은 북악산에, 중앙정보부는 남산에 있다하여 이를 빗대어 북악산 실장, 남산 부장이라 일컬었다. 이들의 충성경쟁은 대통령과의 접촉빈도에 의해 판가름 났다. 대통령을 항상 가까이서 보좌하는 경호실장을 중정부장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또한 대통령은 경호실장을 기능적인 경호책임자로만 여기지 않았다 이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물었고 때로는 고위공직자들의 신상문제 등도 논의했다. 그런 과정에서 대통령과 늘 상 접촉하는 북악산 실장의 힘은 필요이상으로 비대해 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명실공히 대통령의 분신으로 까지 인정받았던 경호실장은 박정희 대통령 아래서의 박종규, 차지철과 전두환 대통령 아래서의 장세동 실장이다. 이들이 누렸던 실질적인 권력구조 속의 위상은 대통령 다음의 부통령에 비유되기도 했다. 박종규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있을때 김형욱 중정부장과의 권력 암투는 상당히 적나라했다. ‘피스톨 박’대 ‘남산의 곰’ 사이의 결투로 일컬어진 두 권력자 간 대결은‘피스톨 박’의 판정승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에서 시작된 이 힘겨루기는 북악산 실장과 남산 부장의 위상을 잘 드러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박정권의 틀이 잡히기 전부터 불이 붙었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군복을 벗은지 얼마 안 된 63년 가을 어느 날. 당시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형욱은 권총을 찬 채 청와대를 드나들었다. 말이 국가정보기관의 총책이지 그의 나이 겨우 38세 육군중령 계급이었고. 박종규 실장은 더 어려 그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였다. 이 날 경호실장 박종규는 김형욱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다고 맘먹었다.『각하 앞에 들어갈 때는 무기를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박실장은 김부장에게 권총벨트를 풀어놓고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이 말에 김형욱은 그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냥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자 박종규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권총벨트를 움켜잡았다.『여기가 어디 야전부대나 간첩 수사하는 곳인 줄 압니까.』두 사람사이에 우격다짐이 벌어졌다. 주먹질이 오가기 직전 주위의 만류로 극한상황은 피했지만 이때부터 둘 사이에는 풀리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가 생겼다한다. 이후 김형욱이 무장을 한 채 대통령과 독대하는 일은 없었다. 화가 난 김형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호원들의 이권개입이나 권력남용 문제를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경호실에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두 부하의 싸움에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신임에서만큼은 경호실장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 예라할 수 있다. 또 다른 남산과 북악산의 대결은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사이에 벌어졌다. 유신말기에 1인독재로 인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대처방법에서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남산의 김부장은 민심의 반기를 대통령에게 있는 그대로 알리는 데 주력했다. 더 이상 국민을 틀어쥐어 봐야 효험이 없다는 사실을 박대통령 자신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남산의 전문적인 정치정보 분석팀과 정책팀들의 의견도 그런 방향이었다. 그러나 북악산의 차지철 실장은 달랐다. 야당이나 대학생, 재야단체 등 정부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그어떤 세력도 강경책으로 밀어붙이면 진압할 수 있다고 진언했다. 박대통령은 언제나 그랬듯이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더 믿었다. 또 냉철한 분석에 따라 민심을 누그러뜨릴 체제완화를 건의하는 김재규보다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강경론이 더 구미에 맞았던 것이다. 이 싸움도 북악산에서 대통령과 함께 지내는 차지철의 승리로 굳어졌다. 바로 그 시기에 남산 부장 김재규가 권총을 빼든 것이다.

군정통치의 친위대장
5.16과 12.12 등 두 번의 쿠데타로 32년간에 걸친 군정 동안 대통령 다음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자들은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시절 그들의 정권을 군사정권답게 만들어간 친위대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과 가장 근접거리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경호실장들의 희한한 권력남용은 고대 중국황실에서 하인이 세도를 폈던 환관정치를 연상케 한다. 박정희정권때 대통령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에서 담당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옆에서 남자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모든 채홍사역할을 도맡아하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육여사는 박종규를 거세하기로 마음먹고 그 일을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수석비서관인 홍종철에게 맡겼다. 육여사는 홍종철을 은밀히 불러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하소연 했다.『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은 각하 곁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이래서 홍종철은 극비리에 박종규 본인과 형제 친척들의 이권개입과 인사청탁 여부에서부터 사생활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일을 눈치챈 박종규가 가만 있을리 없었다. 그는 경호실에 있던 엽총을 집어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 들어갔다.『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냐』 박종규는 분에 못이겨 엽총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가 냅다 갈긴 엽총 탄알은 홍종철의 머리위 천장에 맞고 튀었다. 홍종철은 박종규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분신으로 누가 무슨 보고를 해도 경호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문책인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은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술자리와 여자 조달업무를 청와대에서 관장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게 곤혹스러워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10.26사건 당일에도 그 일은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가 담당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는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박종규가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으로 물러난 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육여사는 그렇게 싫어했던 경호실장을 생전에 밀어내지 못하고 죽어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박종규를 거치며 10.26이 있기 직전까지 경호실은 무소불위의 권부였으며 차지철은 유신시대 마지막 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2인자였다. 국회, 행정부, 군 인사 등을 좌지우지 했고 야당에 대한 정치공작과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과도한 정치 개입과 권력남용, 그리고 과잉충성은 유신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도화선이 됐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권력을 담보로 직분을 넘어선 정치개입과 사리에 맞지 않는 차지철의 잘못된 권력욕은 결국 자신과 자신을 키워준 주군까지 죽음으로 몰고가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역사는 이를 두고 ‘유신의 종말’이라 기록하고 있다. NP

<사진출처-역사학연구소(http://www.ihs21.org), http://kr.image.yahoo.com/GALLERY/>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