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머무를 수 없어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것이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길 위에 있는 것들을 보고 느끼고 천천히 걷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어떤 이에게 평생을 살아갈 구원이 되기도 하며 또 다른 의미의 삶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여행길의 낯선 풍경이 익숙해지는 순간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니 떠나도 무방하다.


김주영 작가를 만나러 갔다. 유난히‘떠돌다’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를 만나러 갔다. 그의 30여년을 훌쩍 넘긴 작가로서의 삶의 여정을 살피기 위하여 그가 밟은 땅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스스로도 역마설이 끼었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여전히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고 있다.
그를 이번 달 작가의 방에 초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문학기차여행’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문학기차여행이라... 김주영 작가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를 김주영 작가를 만났다.‘떠돌다’라는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작가와의 인터뷰 시간을 마련했다. 만나자마자 내가 그를 수식하는 단어를 먼저 전달했다. 땅의 곳곳을 밟으며 그 때의 감흥과 모든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이다.“맞다.”그의 기분 좋은 동의에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오랜 여정을 계속 이어오고 있는 그와 그의 삶에 대하여 작품에 대하여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곳의 땅을 밟고 느낀 흔적이 소설이었다

▲ 난 가난에 집착이 있다. 왜 자꾸 가난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겪으면서 인간을 급속도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객주>라든지 혹은 <야정>, <활빈도>, <화척> 등의 대하장편 소설은 전부 현지답사를 통해 씌어 진 것들이다. 답사를 통하지 않으면 집필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내 팔자가 떠돌이 팔자를 타고 났다. 한 군데 머무를 수 없는 팔자다. 작품을 쓰면서 답사라는 명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 별명이‘길 위의 작가’ 혹은‘떠돌이 작가’이다. 선천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고 작품을 쓰는 시간 이외에 한 자리에 머물러본 적이 없다. 역마살이지.”
그는 그렇게 떠돌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또 작품을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그런 반복이 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를 소설가로 살게 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나 <객주>라는 작품을 쓸 때에는 가장 많은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장터를 거의 다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면소재지의 장터까지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한다.“그나마 북한은 가지 못해 다행이었다. 북한의 장터까지 다 돌아야 했으면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을 거다. 사실 보부상의 이야기들은 옛 문헌을 통해서 연구하고 터득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젖어보고자 직접 그 곳들을 찾은 거였다. 조선시대의 장터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그 명맥을 이어오는 장을 찾아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저 산 계곡에 흐르는 물이 조선시대에도 지금도 흐르는 것처럼 분위기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학 기차여행, 그 낯설고도 달콤한 유혹

이번 문학 기차여행은 세 번째로 기획된 것이었다. 교보문고 측에서 김주영 작가를 섭외하고 그가 응하자 그의 고향인 청송을 중심으로 하여 여행지를 선정하고 프로그램을 짰다고 한다. 이전 두 번의 문학여행에서는 참가자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는데, 이번에는 한 시간 만에 참가 인원이 모두 모였다. 심지어 신청을 하고도 못 간 사람들만 1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김주영 작가 왈,“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기차 여행으로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특히나 청송이라는 곳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기차도 안동까지만 있고 나머지는 버스를 이용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니.”청송군에는 주왕산이 있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가 있고 더 들어가면 전기도 안 들어오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사람들이 청송으로의 문학 여행에 동참을 한 것 같다는 겸손의 말을 한다.
그가 이번 문학 여행에서 놀랐던 일 중의 하나는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한 풍경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들을 존경한다.”고 했을까. 그는 오늘날 부모 세대와 아이들 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때문에 이번 행사를 선택한 부모들을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 인터넷의 유해 정보들이 범람하고 놀이동산에서는 뭐라도 하나 더 타기 위해 급급한 모습들을 보이는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말이다. 한 작가의 고향을 구경하고 어떤 것이 이 작가로 하여금 충격과 감동을 주었는지 함께 살피는 것. 그 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한 부모들의 모습에 감동한 표정이다.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에서 당신, 김주영 작가는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는가. 당신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던 시간이었나.“1년에 서너 번 적게는 두 번 정도
▲ 김주영 작가의 고향 청송을 독자들과 함께 찾았다.
청송을 찾는다. 이번에 함께 여행을 간 독자들은 그냥 독자들이 아니었다. 적극성을 가진 독자층이었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탐구력과 열정을 느꼈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의 섭렵에 그치지 않았다. 호기심과 탐구력이 왕성한 독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또 다른 고향의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옹기를 만드는 마을을 찾았을 때였다. 이미 전에도 여러 번 찾았던 곳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사실 흙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살면서 제일 많아서 없는 것처럼 느꼈던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 흙을 물에 적시고 옹기 만드는 것을 보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창조와 창의의 순간을 보았다. 흙이라는 것,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고 돌아온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무한대의 가능성(능력)을 느끼고 돌아왔다. 옹기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에서 깊이 있게 느끼고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떤 소설을 쓰는 소설가라고 생각하는가

“이야기, 줄거리 중심의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심리적으로 심오하고 깊이 있는 인간의 내일을 깊이 명쾌하게 쓰는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러나 아직 못쓰고 있다. 꿈이고 이상이다.”그렇기에 당신이 계속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이 꿈꾸는 소설을 쓰지 못했기에,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맞아요. 그래서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는 거겠죠. 꿈이고 이상인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런데 당신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언제쯤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예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10월 중에 단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너무 오래 쉬었다.”
<객주>라는 소설을 보면 당신은 역사소설을 쓰는 소설가이다. 작가 후기에서‘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그 소설을 쓰기 전에 읽어왔던 역사소설은 거의 100% 궁중사와 권력의 투쟁을 다루고 있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천민들의 이야기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라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은 상민계급이다. 그들의 역사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런 종류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자료조사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어떤가.
“그렇다. 특히 <화척>의 경우 개성을 가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많은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서 유추하고 썼다.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썼다. 나는 사실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작가에게는 왕성한 상상력과 정말로 있었던 것처럼 글을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사기’지. 아주 그럴 듯한. 나중에 소설을 다 쓰고 난 후 개성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문헌들을 보고 상상한 것과 그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었다. <객주>의 경우 각 지방의 이야기들이 들어있었는데, 그 지방 출신의 작가들이 소설을 보고는‘당신 정말 가봤는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내가 헛일을 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답사에 대한 르포로 빠지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다.”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된 당신

<아들의 겨울>과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홍어> 등의 작품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공통점과 성장소설이라는 공통된 작품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맞다. 그리고 난‘가난’에 집착이 있다. 요새 사람들은 특히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이겠지만 왜 자꾸 가난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겪으면서 인간을 급속도로 변질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념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난 그 중의 하나인 가난을 이야기하는 거다. 죽이고 살리고 변화시키는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거다. 나에게 이념이나 전쟁은 가난보다 덜 익숙하니까. 가난은 매달릴 가치가 있었다. 사실 이념 역시 삶의 질과 관계가 깊은 거였다. 더 잘살기 위하여.”그렇다면 연대기 순으로 이 작품들은 어떤 변화를 겪어온 것 같은가. “아니다. 작품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 작품의 경우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 아들의 심리적인 성장과정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아들이 자신은 한 번도 없어주지 않던 어머니가 일을 받아오는 남의 집 아이를 업어주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아들은 그 때 심한 배신감으로 반항심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 때 아들의 심정이나 아들에게 강한 어머니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 그 모든 것들은 가난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다시 같은 내용의 소설을 쓴다면 어떠한 변화가 있을 것 같은가.“이제는 벗어나고 싶죠.”그렇다면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어떤 아버지인가.“나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굉장히 원망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지 않던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나도 그런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아기자기하고 다정한 아버지가 아닌 엄격하고 고함지르는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그럼 이제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겠다.“그런 것 같다.”

시인을 꿈꾸던 그는 소설가가 되었다

▲ 어릴 때 꿈을 이루고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류든 이류든 그건 상관없다.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소설가라고 칭한다. 얼마나 행복한가.
당신은 시인을 꿈꾸던 문학청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교 시절, 박목월 선생께 시를 보여드렸었는데 그분이 말씀하시더라. 운문에는 소질이 없으니 산문을 써보게 라고.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소설 공부를 했다.”아... 그래서 그 때 당신이 선택한 것이 군대였군요.“맞다. 운문에서 산문으로의 전환은 그 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을 완전히 전환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에 대한 당신의 욕망은 완전히 잠재운 것인가.“미련은 완전히 버렸다. 좋은 시인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시인만 해도 5~60명이 되니. 요즘 젊은 시인 중에 문태준 시인을 보면서 참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면은 없지만 그의 시가 좋아 잘 읽고 있다.”
당신의 소설 중 어느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가는지 물어도 될까.“<객주>와 <홍어>이다.”신기하다. 이렇게 물었을 때 어떤 작품을 딱 꼬집어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말이다. 모든 작품에 다 애착이 간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말이다.
당신의 변화에 대하여 묻고 싶다. 당신이 문학을 시작했던 처음과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의 당신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등단한 지 35년이 되었다. 문학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했지만. 가장 큰 변화라 함은 시에서 소설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서 역사의 뒷면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는데, 살다보니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굉장히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라는. 작품은 자서전을 반성문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권의 소설은 한 권의 반성문이고, 자서전이다. 그런 식으로 자꾸 적어가다 보니 빠르게 이해하게 되더라.”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소설가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당신은 왜 소설가가 되기로 문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나. 그 결정과 당신의 운명에 후회한 적은 없는가.
“공학도가 되겠다든지 법학도가 되겠다든지 의사가 되겠다든지 이런 꿈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글 쓰는 일에 가장 애착이 가더라. 가장 체질에 맞더라. 국어시간이 제일 재밌었던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나의 호기심과 재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희미하게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구체적으로 시와 소설에 대하여 배우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 꿈을 이루고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다. 그 꿈을 이루었다. 사실 꿈은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어쨌든 나는 일류든 이류든 그건 상관없다는 거다.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소설가라고 칭한다. 어릴 때 꿈을 이룬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구나. 얼마나 행복합니까. 만날 웃고 지냅니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세요?
“이제 내 나이가 있다. 나이에 맞는 소설을 쓰고 싶다. 인생의 깊이가 있는. 많은 사라들이 내 삶의 후회의 깊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그가 <홍어>라는 작품에 남긴 작가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끊임없이 역동하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비단과 향수, 그리고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거친 바람이 흩날리는 초원에 마련될 것이다. 작가가 그렇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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