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기술의 세계최고-신동수 평산금속 사장

어릴적 가난과 힘겹게 싸워온 그는 오늘날 단단한 쇠로 변했다. 신동수(평산금속)사장. 극심한 가난을 오기로 이겨내 오직 쇠 다듬는 기술로 세계를 제패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으로 평산금속을 세계최고의 단조회사로 성장시켰다.


부산 녹산공단에 5000평 규모로 자리 잡은 (주)평산에 도착해 보니 적하장에 쇳덩이들과 잘 다듬어진 쇠조형물들이 질서있게 쌓여있었다. 이러한 정리정돈이 평산의 오늘을 말하는 것 같았다. 철강제품을 만드는 공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주조와 단조인데 평산은 단조회사로 국내 최고이자 세계최고로 평가 받고 있다. 단조 공법은 고객들이 주문한 것을 쇳덩어리를 절단하여 열을 가하여 두들기 좋게 한다음 프레스나 롤링밀 등을 이용해 원하는 사이즈의 형태로 만들고 선반이나 밀링머신, 드릴링 등으로 가공하면 완제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신동수 사장은 1986년 2년간의 직장생활로 모은 돈 고작 230만원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다. 철강관련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당시 턱도 없는 적은 돈으로 성실과 검소함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보따리 장사로 출발했다. 사무실도 없이 발로 뛰어야 했다. 당시 이 사업은 기술력 부족과 과도한 설비투자비, 미래에 대한 성공 확신 등이 없어 기업들이 꺼려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정 하나로 견디었다. 하지만 사업은 순탄치 못했다. 단조산업의 특성을 무시한 채 열정과 혈기만으로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96년 그는 마지막으로 생존을 건 변신을 시도하기로 결심한다. 친척. 친구, 동창들에게 돈을 끌어 모아  2000t 규모의 거액의 프레스를 구입한 것이다. 온갖 고생을 한 끝에  그의 성실성과 열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업가와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회사는 급성장한다. 여기에 IMF도 한몫을 했다. 원화환율이 급등하면서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그 후 끊임없는 개발과 투자로 해외에 까지 그 이름을 알려 수출도 증가했다.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세계최고 브랜드의 단조회사를 꿈꾼다.

세계를 쇠로 다듬는 평산

▲ 신동수 평산금속 사장
2001년 녹산 공장 이전과 아울러 당시 국내최대규모인 4500t 롤링밀을 설치했다. 평산의 제품은 풍력타워의 이음매로 쓰이는 플랜지를 중심으로 한 풍력단조품과 플랜트, 발전설비, 선박용 일반단조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국내 굴지의 중공업 업체에 납품이 되고 있으며 미국의 GE, 일본의 도시바, 덴마크의 베스타즈 등 세계 수십 개 국에 수출되고 있다. 평산은 특히 플랜지 세계 시장점유율 1위다. 2015년 세계 풍력시장의 규모는 42조원 규모로 예측되는데 여기서 평산의 화려한 날갯짓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또 다른 도약을 말이다. 평산금속은 얼마 전 코스닥에 상장하여 유입된 자금으로 설비투자와 품질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풍력에너지, 조선업 등 전방산업이 유래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거대 수요를 감당키 위한 준비조치이다. “전 세계가 친환경적으로 가는 추세이다 보니 풍력발전소를 늘리고 있어 한층 더 고무적입니다.” 라고 신사장은 밝혔다. 산업이 발전하려면 기초소재 개발과 부품산업이 발전해야 하고, 회사가 발전 하려면 탁월한 엔지니어링 능력과 자체설비를 개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런 모든 것을 갖춘 회사가 평산 이다. 그는 가슴으로 직원들을 대한다.“오너는 진정한 인간적 교감을 통해 직원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있어야만 한다. 이를 바탕으로 경영을 해야만 한다.”라고 역설하는 그의 눈빛에 진정성이 어려 있었다. 현대의 경영 트랜드가 감성경영인 것을 감안했을 때 신동수 사장은 이를 먼저 실천한 사람이다.

검소와 절약으로 꿈을 이루다

그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은 너무도 가난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사장의 가문은 4대째 천석꾼 집안으로 밀양최대의 갑부였다. 하지만 조부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던 것이다. 명절이면 고모할머니 집으로 옷이랑 신발을 얻어 신으러 갔던 시절을 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중고교시절에는 시커먼 꽁보리밥 도시락이 창피하여 뚜껑을 반쯤은 닫고 이를 감춰 가며 먹던 시절을 결코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그에게 꿈을, 아니 사명감을 심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고모할머니였다. 그의 할머니는 늘 그에게‘왕대밭에서 왕대가 나온다.’고 역설하며 그가 가문을 일으킬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결국 할머니의 주문대로 그가 실현해 냈다. 그의 검소와 절약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의 집에는 아직까지 찢어진 소파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매주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무리 성공을 했다 해도 어려운 시절을 잊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다고 한다. 성공한 자에게서 흔히들 느낄 수 있는 거만한 태도를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털털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오늘날 모교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밀양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배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있다. 책임을 지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그에게서 소박한 일면을 볼 수가 있었다. 취미가 뭐냐고 묻자 그는 즉각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오늘 기자님 때문에 일을 못했습니다.” 라고 웃음(?)으로 답했다. “고생해서 번 돈을 호의호식 하는데 쓰지 않고 아름답게 쓰고 싶다.”는 그에게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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