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지옥(地獄)’ 카슈미르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 지배에서 분리·독립하면서 시작된 카슈미르 분쟁, 이들의 시련은 종교문제 때문이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의 종교 갈등은 인도 대륙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놓았고, 이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앙숙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다.

 

카슈미르(Kashmir) 지역은 인도의 북부와 파키스탄의 북동부, 그리고 중국의 서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의 비경을 품고 웅장한 카라코롬의 K2봉(8611m)이 세계 산악인들을 유혹하고, 한여름이면 빙하와 만년설이 청정수로 흘러,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는‘행복의 계곡’ ‘지상의 낙원’이라고까지 불렸던 순결한 땅이었다. 하지만 한반도만 한 이 땅(22만㎢)은 지난 60여년간 종교분쟁이라는 인재(人災)로 얼룩져 지금은 불타는'지옥'이 돼버렸다. 오랜 분쟁으로 인해 주민, 역사,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있어 피폐한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쟁요인 된 식민통치와 종교갈등

14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지역이었던 캬슈미르는 16세기 무굴제국에 편입됐다가 19세기초 잠시 시크교도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영국과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50만 파운드의 전쟁배상금 대체명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로 넘어갔다. 1846년 힌두교도인 이 지역 토후국(번왕국) 국왕이 관할권을 동인도회사에게서 매입해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면서 귀속문제가 발생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물과 기름 사이’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특성 을 안고 있다. 당시 영국령 인도는 힌두교 지역을 인도로, 이슬람 지역을 파키스탄으로 분리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으나 양쪽에 접한 카슈미르가 문제가 됐던 것이다.

카슈미르 분쟁의 대립구도

1차분쟁
인도와 파키스탄에 분포되어 있는 1300만 카슈미르인들(Kashmiris)은 역사적으로도 회교,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세력의 경계지대에 위치하여 외침을 받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수세기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다. 또한 1846년 이래 약 100년의 식민통치기간 중에도 종주국 영국은 상업주의에 입각하여 평화와 안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폭력적 사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식민통치가 끝나면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정치적 알력과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 대륙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귀속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카슈미르는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이 회교도였던데 비해, 소수 힌두교계(22%)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토후왕국(土侯王國)이었다. 동년 10월 회교세력간의 불화를 틈타 힌두교도였던 마하라자(Maharajah Harasingh) 토후왕이 인도 편입을 결정하자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가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파키스탄이 지원병력을 파견했고, 인도도 이에 맞서 군을 동원했다. 이것이 제1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다.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카슈미르 무장부족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Srinagar) 점령을 시도하자, 이에 대항하여 인도군이 즉각 공수되었다. 동년 11월 인도의 네루(J. Nehru, 1889-1964)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의 장래를 결정하기로 약속하였고, 1948년 1월에는 카슈미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1948년 3월 인도-파키스탄 간의 정규전으로 발전되기도 했으나, 양측은 직접적인 충돌은 가급적 회피하는 등 제한전 양상을 보였다. 1948년 8월 유엔의 중재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고, 양측은 각각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채 1949년 1월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결국 카슈미르 지역은 동년 7월의 카라치(Karachi) 협정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각각 63%와 37%씩 분할 점령되었고, 1963년 인도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을 1개 주(州)로 편입하였다.

2차분쟁

명확한 국경선 획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양분된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1964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유엔의 정전감시활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양국은 정전 경계선을 따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여왔다. 1964년에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 대한 파키스탄 측의 공격이 잦아졌고, 동년 12월 인도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대해 반격을 가함으로써 양국간 전면전이 촉발되었다. 1965년 4월에는 양국 남부 접경 쿠츠(Rann of Kutch) 지역을 둘러싸고 양국 정규군간의 일대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동년 5월 일시적인 정전이 성립되었으나, 8월에는 파키스탄의 비정규군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침투하였고,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파키스탄은 1949년에 설정된 정전 경계선을 넘어 반격하였고, 9월에는 인도군이 전 전선에 걸쳐 파키스탄을 공격하였다. 1965년 9월 중국의 개입으로 인-파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미 두 차례(1959년과 1962년) 인도와 국경충돌을 벌인 바 있는 중국이 파키스탄 측을 지지하면서, 중국-인도 접경지역에서 인도군의 철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인도 북동부의 시킴(Sikkim)과 중국의 티베트(Tibet) 접경에서 인도-중국간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9월 유엔의 제의로 인-파 정전이 발효되면서 대규모 지상전은 종식되었다. 이에 따라 1948년부터 활동해온 유엔 인-파 국경감시단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유엔 인-파 감시임무단(UNIPOM, 1965. 9-1966. 3)이 창설되어 양국 병력 철수를 감독하였다. 인-파간의 산발적인 교전은 11월까지 지속되었고, 티베트-시킴 지역의 전투도 12월에 종료되었다. 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슈켄트 선언(Tashkent Declaration)이 발표됨으로써 전쟁은 공식 종결되었는데, 이에 따라 양국은 1949년 설정된 정전경계선으로 복귀하기로 합의하였다.

3차분쟁
카슈미르 문제는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물론 양국의 국내 정치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동·서 파키스탄간의 정치적 내분에서 시작되어 동파키스탄이 독립국가 방글라데시로 분리되는 벵갈전쟁(3차 인-파 전쟁)이 1971년 12월에 발발되었다. 이 전쟁에서도 카슈미르 지역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1972년 1월 시믈라(Simla) 협정으로 전쟁이 종료되었는데, 이 협정상의 카슈미르 정전경계선이 오늘날의 통제선(Line of Control)이 되었던 것이다.
 
복잡한 분쟁양상 

카슈미르 분쟁은 단순히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영토 분쟁에 그치지 않고 복잡한 파장을 주변에 던져왔다. 두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아프가니스탄도 국경을 맞대고 있고, 그 바로 북쪽은 옛 소련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냉전 시절에는 미-소 대립의 대리전 양상도 전개됐고, 현재는 인도와 파키스탄 어느 쪽에도 귀속을 바라지 않는 카슈미르만의 분리 독립 운동도 전개되면서 좀처럼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가 쉽지 않은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인도는 소련에 좀 더 접근했고, 파키스탄은 자연스레 미국 및 중국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가운데 미-소 양진영이 양국을 좀 더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지원공세를 전개해나갔던 것이 1960년대의 상황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더 치렀다. 1965년에는 파키스탄이 중국 신장지역에 접한 아자드카슈미르 서쪽지역 일부를 중국에 넘겨준 데 자극받은 인도가 잠무카슈미르에 대한 영유권 강화조치에 나서자 카슈미르에서 이슬람주민들의 폭동이 발생했고, 곧 제2차 인-파 전쟁으로 비화됐다. 전쟁은 이듬해 소련의 적극적 개입과 유엔 중재로 종료됐으나 카슈미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1971년에는 방글라데시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제3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생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런 대립은 카슈미르 일원이 요새화되는 등 양국간 치열한 군비경쟁을 촉발시켰고, 양국간 핵 군비 경쟁으로 확산됐다. 이 같은 상황에 변화가 발생한 것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다. 소련의 남진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경계감을 공유하면서 어떻게든 카슈미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양측 정치인들의 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러나 카슈미르 통제선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이와 함께 1980년대말 잠무카슈미르 내부에서 이슬람 과격세력이 인도를 상대로 한 무장독립투쟁에 나서면서 카슈미르 영역을 넘어서 인도 국내에서도 테러사건이 빈발했다. 1989년부터 카슈미르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는 잠무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요원한 평화정착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60년 분쟁사에서 평화를 향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쟁 와중에 졸지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귀속이 갈린 이산가족들의 상봉편의를 위해 ‘평화의 버스’ 노선 개통식도 있었다. 인도령과 파키스탄령을 잇는 노선에 첫 버스를 보내는 행사에서 인도의 싱 총리는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 깃발을 힘차게 흔들며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이 평화의 버스를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평화의 버스’ 출발 전날 밤 분리주의 무장단체의 탑승객 숙소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순조롭지 않았던 이 카슈미르판 상봉의 버스는 지금도 한 달에 두 차례씩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테러위협에도 불구하고 가족 상봉의 염원을 안고 잠무카슈미르에서 지금까지 2만여 명이 탑승신청을 제출했지만 지금까지 탑승허가를 얻어낸 주민은 400명에 못미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화의 버스는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양국 정상이 만나는 등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종교분쟁의 깊은 상처가 밴 양국관계는 언제든 적대적 관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살얼음판이다. 2004년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인도에 대해 파키스탄이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인도 정부가 이를 거절했을 정도로 양국간 자존심 싸움도 대단하다. 또한 카슈미르에서는 2005년10월 밀어닥친 참혹한 대지진으로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지고 고통은 더해졌다.

전쟁은 ‘낙원’을 ‘지옥’으로

1990년대 들어 카슈미르 분쟁은 주로 인도 정부군과 잠무-카슈미르 반군간의 대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유엔의 정전감시활동으로 인도-파키스탄 통제선이 비교적 평온한 데 비해, 잠무-카슈미르 주 안에서는 회교도와 힌두교도간의 반목과 대립을 배경으로 여전히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인도군과 회교 반군간의 무차별적 투쟁과정은 민간인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다. 회교 반군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9년 이래 7만 여명의 카슈미르인이 사망했는데,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지 인권단체가 주장하는 사망. 실종자 규모는 그 2배가 훨씬 넘는다고 말한다. 또한 4만 명이 옥고(獄苦)를 치렀고, 17만 5천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사회는 이러한 심각한 인권 유린사태에 주목하면서, 교전 양측에 대해 인권 존중과 인도주의 준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상호 보복의 악순환은 멈추지 않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을 돌아볼 때 종교세력간의 갈등 성격만으로 참혹한 분쟁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오히려 카슈미르 주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인도-파키스탄 간의 지역 패권 투쟁, 인도의 강압통치, 인도령 카슈미르 회교도에 대한 파키스탄의 배후 조종 등에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도 정작 카슈미르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유엔의 정전감시단이 상주하고 있는 것도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제4차 인-파 전쟁을 예방하는 의미가 크며, 지금까지 카슈미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고 볼 수 있다.

분쟁의 결과는 빈곤과 고통

카슈미르(Kashmir)란? 

‘잠무 카슈미르’라고도 불리는 카슈미르 지역은 아자드 카슈미르로 불리는 서쪽 지역이 파키스탄령에 속해 있고, 나머지 지역은 인도령에 속해 있다. 양측 경계인 ‘통제선’은 1948년 시작된 제1차 카슈미르 전쟁이 끝나면서 획정된 것이지만, 양측은 카슈미르 전 지역의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며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카슈미르는 전체 면적의 3분의 2 이상이 인도(1만1639㎢)령이지만, 인구 500여만명 다수(60%)는 파키스탄과 연계가 있는 이슬람교도여서 분쟁의 실타래가 더욱 복잡하다. 양국이 그동안 치른 3차례 전쟁 중 카슈미르를 둘러싼 전쟁이 2차례였다. 종교·영토 분쟁으로 시작된 군사경쟁은 상호 핵무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양국 정규군 사이의 교전은 정부간 외교력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양측이 느슨하게 지원하는 반군이나 무장 세력들끼리의 교전은 통제가 어려워 충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은 양국의 저개발과 빈곤을 초래하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이다. 11억 5천만 명에 육박하는 양국의 주민들은 카슈미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피폐와 정체 속에 신음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매년 100억불이 넘게 지출되는 군사비의 상당 부분이 카슈미르 분쟁과 직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빈곤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매년 정부예산의 40%인 30억불 내외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는데, 이는 300억불이 넘는 대외 채무 상환에 쓰이는 원리금에 해당하는 비용이다. 결국 양국은 자국 주민들의 복지 대신에 카슈미르 분쟁과 핵무기 개발을 통해 패권 경쟁에서의 우위 확보에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눈앞에서 부모가 죽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가족들은 서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고통과 싸운다. 또한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폭탄의 공포,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불안과 빈곤의 고통 을 받고 있다. 모든 전쟁은 그런 것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낙원이 한 순간에 지옥이 되고, 거기서 도망칠 힘이 없는 약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이 전쟁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 카슈미르까지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구호나 명분이 아닌 사람이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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