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났다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오로지 흑백의 명암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웃음도 울음도 모든 감정을 싣고 있는 투명한 눈물방울도 오로지 흑백의 명암으로 표현된다. 세월의 짙은 흔적인 주름 역시도 흑백 사진 속에서는 명암으로 절제되어 있다. 그렇다. 절제, 아무렇지 않은 듯 감정을 절제하지만 흑백사진은 보는 이에게 더 많은 감정을 전하고 마는 것이다.


고은 시인의 시들은 필자에게 마치 흑백사진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절제의 미학으로 모든 인생의 굴곡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기뻐도 결코 찬란하게 기뻐하지 않는다. 고은의 시는 그런 것이다. 하얀 백지 위에 검은 잉크로 쓰여 있는 그의 시들은 마치 인생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검은 잉크 뒤의 하얀 여백에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시를 쓸 수 있음이고 자꾸 곱씹어 읽게 만드는 것이다. 그 힘이 58년 등단한 이래 여백을 검은 잉크로 채울 수 있게 만듦이다.

그의 시는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어루만진다

▲ 그의 시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그의 시에 대한 일치감을 표현하려는 것 뿐이다.
김병익은 <고은 선생의 네 얼굴>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그의 글들은 무한 자유의 상상력과 세계를 투시하는 예감으로 번뜩이며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은 선시(禪詩)가 빚어내는 계시로 충만해 있다. 이것들이 정말, 모두 한 사람에게서 태어날 수 있는 글일까? 그 안에 여러 천 분의 귀재가 우글거리며 서로 뛰쳐나와 제 목소리를 외치려고 실랑이질 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이다.’라고. 정말이지 공감한다. 그의 시들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있지 않던가.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음은 아마도 <만인보>의 힘이 가장 클 것이다. <만인보>를 설명함에 시인은“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양한 삶의 초상이 내재되어 있는 시들은 부모와 외숙,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웃들의 모습에서부터 역사적인 인물들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보게 되고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 땅에서 살다간 그리고 살고 있는 우리들 개개인의 초상을 그의 시에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의 삶도 가벼운 것은 없다. 더 중한 삶도 없을 것이며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삶도 없다. 때문에 그의 만인보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이며 계속 창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 천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고은, <만인보>서시)

시를 쓰지 않으면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 시인은 절도, 살인, 사기, 폭력 그런 것들의 범죄 큼에 끼어서 이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는 결코 쉽게 써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글자로 채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시인의 손에 의해 기록되어지는 글들에는 생명이 들어 있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시는 결코 독자들에게 마음으로 읽힐 수 없는 까닭이다. 마음으로 읽힐 수없는 시는 이미 죽은 시와 다름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관점에서 고은의 시는 살아있음을 이야기한다. 시인은‘나의 시가 걸어온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 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이렇듯 시인의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것들이 결코 쉬울 리는 없다. 시가 곧 생명과 살아있음의 의미와 통하고 있음인데 결코 가벼울 리가 없다.

시인의 마음은 불멸이다

고은은 어느 산문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시인은 절도, 살인, 사기, 폭력 그런 것들의 범죄 틈에 끼어서 이 세계의 한 모퉁이세서 태어났다’, ‘시인의 말은 청계천, 창신동, 종삼 밤거리 그런 곳의 욕지거리 쌍말의 틈에 끼어서 이 세상의 한 임무를 맡는다’
그랬다. 그의 시가 자꾸만 마음을 툭툭 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들이기에 우리가 말할 수 없음에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형상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는 붓 끝에 힘을 실어 색을 입혀가며 흔적을 남기고 어떤 이는 제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어떤 이는 여백을 채우는 힘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누군가의 삶을 위로하기도 하는 것이다. 고은 시인은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 시로써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살아가게 하고 타인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가면서. 그는 시를 쓰고 우리는 읽고 그 반복을 몇 십 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언젠가 시인이 떠나고 그 시를 읽고 있는 현재의 우리도 기억 한 편으로 사라져갈 테지만 그의 시는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시인의 마음은 불멸이다’는 그의 말처럼 말이다. 더불어 그의 시를 읽은 우리의 감동도 그와 함께 남는 것이다.

그의 시는 시작되었고 그 끝은 없다

▲ 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그의 시인으로서의 삶은 <폐결핵>이라는 시에서 시작되었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짓드 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버린다/ 오늘 하루 이 오후에/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긴 기도와/ 소름 끼는 아래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한 얼굴의 땀을 닦아내린다’
폐결핵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한 번도 폐결핵을 경험한 적이 없다. 모든 문학작품이 경험에서 우러나올 것이라는 착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허구임에도 마치 경험했던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야기한다.‘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 병을 그는 시를 통하여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십이 넘은 나이에 건강진단을 통하여 그에게 한 쪽 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 쪽 폐가 없는 그의 몸, 그것의 부재가 그의 시를 만들게 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시인은 빈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비어있음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문학은 그 상실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부재에 대한 끊임없는 채우기가 문학의 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지 않던가.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한 발버둥을 시인은 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 시에서‘시인은 세 살 때부터 남을 위해 울어야 한다’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결코 서랍 한 구석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그의 초기 시들은 존재의 빈 아름다움에 이야기한다고 했다. 물론 동의한다. 존재의 빈 아름다움. 하지만 그의 시는 삶을 살아내고 변화를 거듭함에 함께 변화해왔다. 60년대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둔 생에 대한 절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세계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70년대 그의 시는 변화하여 역사와 현실 앞에 서기 시작했다. 현실을 비판하는 시작이었으며 민중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투쟁에 대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 변화된 모습은 고은의 다섯 번째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 <삶>에서)‘나 여기 한동안 어이할 수 없어 서 있노라/ 모든 지나가는 것들아 비탄 한 꾸러미씩 매판 한 꾸러미씩 사가지고 가는 것들아/ 현실 궤멸하라...(- 고은, <종로>중에서)
그리고 80년대 들어서면서 시인의 상상력은 현실의 다면성을 그려낸다. 그 증거가 되는 시들이 바로 <만인보>에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만인보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시로 노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대상은 머슴, 대길이, 화양댁 등 흔적 없이 살다간 민중들이었다.‘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중략)...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고은, <머슴 대길이>중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그를 위로하지 않겠다

▲ <만인보>는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그는 <만인보>16권 앞머리 시인의 말에서 많은 시의 숙달된 화법은 거의 고뇌 없는 성형수술의 미모를 따르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는 쉽게 써내는 시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시어들이 시를 채우고 마치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양 독자들을 매혹하는 시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시인이 쓰는 시어는 보여 지는 겉모습만으로 이야기되면 안 된다. 그 안에 담고 있는 진정성과 존재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눈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은의 시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머무는 까닭은 결코 쉽게 쓰지 않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이해하고 어루만지려는 마음 때문이리라. 지난해부터 해외 언론을 통해서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그가 올해 수상하는 기쁨까지 맛보지는 못했다. 많은 이들이 아쉬운 마음을 표명했지만 필자는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의 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의 시가 기록된 한국어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의 시집을 대하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것을 어떤 이는 감동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공감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이미 그의 시는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의 가슴을 두드린 지 오래이며 타 언어를 쓰는 이들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 시차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듯이 언어의 그 미묘한 차이를 극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그를 위로하지 않겠다.
고은의 시를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다. 고은의 시가 슬프다고만 말하지도 못하겠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그의 시에 대한 일치감을 표현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기에. 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기에. 그것에 조금의 감사를 표하고 싶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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