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세 남자에게 가을이야기를 듣다

계절에는 각각의 표정이 있다. 예를 들어 봄에는 생명이 움트는 빛나는 초록이 있으며, 여름에는 햇살이 싱그러운 푸른 바다가 있으며, 겨울에는 순수를 가장한 하얀 눈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가을은 과연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을까?

임보연 기자

남자들의 눈에는 가을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얘기하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느니 고독이라느니 낭만이라느니... 사실 너무 식상한 표현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쓰고 싶지 않은 말이다. 생활에 바쁘게 쫓기며 사는 사람들도 가을만 되면 감상에 젖어들고 만다. 마치 가을이 내뿜는 바랜듯한 이미지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말이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본능적으로 감지를 하듯 쓸쓸함에 몸부림치는 남자들의 속내를 살짝 엿보려고 한다.

she says.
본 기자가 느끼는 가을의 첫 번째 이미지는 건조함이다. 여름의 눅눅한 공기들이 차츰 바람에 건조되어가듯 가을의 공기는 어느새 습기를 제거당한 채 말라있다. 그 건조한 공기가 나의 숨 속에 파고들면 가을을 실감하고 만다. 그리고 나면 머릿속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던 여름동안의 상처가 아무는 듯하다. 단순 명쾌해지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남자들은 복잡 미묘해지는가보다.
그렇다면 가을의 두 번째 이미지는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쓸쓸함, 고독 등일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흘러넘침을 경험하게 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음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he says.
첫 번째 남자. 마광수 (소설가)

서러운 가을, 애인이 필요하다
나도 이젠 늙었다. 특히 가을이 오면 더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머리털이 하얗게 센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밤 이보다 더 쓸쓸한 시간이 있을까. 아내도 애인도 없이 가을밤을 지내다보면 나의 야한 상상력도 여지없이 위축되게 된다.
그래서 가을에 찾아 읽는 시는 몽땅 다 쓸쓸한 것뿐이다. 특히 나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왕유(王維)의 시를 나직이 읊어보곤 한다. 대표적인 시가 바로 「깊어가는 가을밤에 방안에 홀로 앉아」같은 시이다.

독좌비쌍빈(獨坐悲雙?)
공당욕이경(空堂欲二更)
우중산과락(雨中山果落)
등하초충명(嶝下草蟲鳴)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니
늙어감이 서러웁다
이경(二更)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어디에선가
과일 떨어지는 소리
벌레들이 방안에
찾아와 운다

가을밤은 깊어가고 빗줄기따라 산속에서는 열매가 후두둑 떨어진다. 처량한 빗소리에 어울려 귀뚜라미 등 가을 벌레들이 희미한 불빛을 찾아 방안에 들어와 운다. 이처럼 담담하고 멋진 풍경화가 어디 있을까.
원문에서는 첫째 줄에서“비쌍빈(悲雙?)”이라고 표현했다.‘쌍빈’이란 귀밑머리에 난 흰 터럭을 의미하는 것이니 흰 머리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늙어감을 슬퍼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굴 피부에는 자신이 있다. 주름이 전혀 없다. 그러나 흰 머리가 문제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진다. 그래서 애인구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 올 가을엔 어떻게 해서든지 애인을 구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야한 정열을 불태우고 싶다.

두 번째 남자. 윤기화 (뉴스피플대표)

인생의 쓴맛에 블랙커피로
언제부터인가? 가을이 쓸쓸치 않다. 이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인가? 그저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결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것이 좋다. 외로울 것도 그리울 것도 없는 건조하기만한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이제 다시는 범접하기 힘든 꿈은 제쳐 두고 그저 내 힘으로 가능할 것만 같은 적은 꿈만을 쫓아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러나 크던 작던 꿈은 늘 꿈이었을 뿐 현실은 늘 달랐다. 그래도 나는 버스를 갈아타듯 꿈을 바꿔 가며 살아 왔을지언정 좌절은 없었다. 내가 이룬 가정을 제외하고 현실은 늘 쓰기만 했다. 나는 블랙커피를 잘 마신다. 그것도 차가운 물에 인스턴트커피만 넣은. 쓴 맛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는데 이젠 그것에서 구수함마저 느낄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 인생의 쓴맛에 있어서도 그렇다. 내 친한 친구 한명이 가끔 내게 슬쩍슬쩍 던지는 말이 있다. ‘너는 너의 생래적인 조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진심을 알 필요도 없이 나는 100% 동의한다. 좋은 부모 밑에서 최고의 조건을 부여 받으며 컸고 20년 간 살아 왔어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건실하게 잘 커준 자식이 있으니 내 가정은 내겐 늘 내 노력 이상이었다. 내가 갖고자 했던 꿈만을 제외하고는… 아내는 꿈만 좇기에 지쳐 있는 나를 보며 얘기한다. 시골로 가서 정작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만을 좇으라고. 돌아 갈 시골도 없지만 나는 늘 속으로 아내에게 말한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있어 보라고. 곧 될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그다지 자신감도 없지만 꿈의 끈을 놓으면 깊이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움켜쥐고 있다. 사실이다. 더욱 솔직히 말하면 현재의 꿈마저 못 이룬다면 다시는 꿈을 가질 수없을 것 같다. 꿈이 없는 인생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옥일 것이다. 죽음보다도 무서운 지옥! 이 가을,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더우면 더운 대로 치열하게 추우면 추운대로 열렬하게 좇을 뿐 한가해서는 안 된다.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꿈을 좇아야 한다. 이뤄질 것인가를 놓고 불안해하지 않고 짧은 다리로나마 열심히 뛰어야 한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뽀드득뽀드득 어금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형도의 싯귀가 바로 이 가을 내가 갖고 있는 결심이다.

세 번째 남자. 이경 (자유기고가)

나이를 먹어도 가을은 시린 계절
가을. 그것이 나에게 전하는 것은 이별에 대한 추억들뿐이다. 타고난 유전자 때문인지 몰라도 가을은 외로움이라는 녀석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하곤 했다.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결코 누군가와 함께 라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있어도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외로움은 오히려 누군가와 함께 있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나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어느 샌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자리에 머물러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나의 변하지 않던 오만함이었을지도... 혹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고질적인 우울함을 방관하고 말았던 나의 무심함이었을지도.
내 십대의 가을은 끝없는 방황이었다. 첫사랑을 만났고 채 가을이 끝나기 전에 헤어짐을 겪었고 그리고 한동안 회복하지 못한 채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야 했던 시기였으므로. 목적도 없이 대가도 없이 마음속의 무언가를 계속해서 퍼내야 살 수 있을 것만 같던 십대였다. 마음의 열정이 가을의 마른 바람에 식어서 표면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그런 시기였다.
이십대의 가을은 상처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기 전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내던 그런 가을이었다. 영화 <주먹이 운다>의 류승범이 날카로운 조각으로 살을 찢던 모습에서 나는 이십대의 나를 보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 방어의 수단으로 나를 상처내고 말았던 아이러니한 그런 가을이었다.
지금 나는 삼십대이다. 삼십대를 접어든지 꽤 시간이 흘렀다. 삼십대의 가을이라고 하여 뭐 특별히 변화된 것도 없지만 삼십대가 되면 변하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만은 변했다. 왜냐하면... 현재도 가을을 기다리는 나는 여전히 아프므로. 성숙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삶에 대하여 어리광을 부리고 있으므로.
문득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과연 가을은 왜 쓸쓸한가. 나의 짧은 궤변을 늘어놓자면 빈 공간이 많아져서 생각으로 채워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도 가을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
아마 사십대의 가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깨닫고 있는 삼십대의 어느 날이다.

도대체 가을의 무엇이 남자들의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가. 김현승 시인은‘가을’이라는 시에서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고 했다. 눈동자가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이라고 했던가. 가을은 꿈꾸지 않는다. 다만 추억을 할 뿐인가보다. 옛사랑을, 아픈 기억을. 조병화 시인은‘가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더라.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파란 물로/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그립다는 거/그건 차라리/절실한 생존 같은 거/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라고. 가을은 헤어짐이고 그리움이고 슬픔이고 또 고여있는 가슴의 눈물이다. 아마도 찬바람 부는 겨울이 오면 가슴 속을 다시 얼음으로 채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절실히 깨닫고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때로는 가을이 그들에게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며 상처를 낼지도 모르겠으나 고독으로 긴 밤을 서성이게 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유일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오롯이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절이기도 할 것이다.
그대들, 실컷 가을의 고통을 즐기고 가슴에 난 상처를 아파하길 바란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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