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독일주택')

[시사뉴스피플=백지은 기자] ‘여럿이 모여 마시는 술이 맛도 좋다’는건 이제 옛말이다. 밥부터 영화 관람까지 뭐든 혼자 즐기는게 더 이상 ‘쪽 팔리지’ 않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혼자 마시는 술맛에 푹 빠져있으니 말이다. 왁자지껄한 술집의 소음과 쉴새없이 잔을 부딪혀야하는 피곤함, 숙취의 쓴맛과 함께 맞이하는 다음날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올 가을 ‘혼술’의 세계로 입문해 보는건 어떨까. 단 한 잔이라도, 그 속에 담긴 낭만은 달고 무한하다.

SNS에 ‘혼술’을 치면 나오는 관련 게시물은 1만여 건이 훨씬 넘는다. 인기 드라마 제목에까지 ‘혼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니 트렌드의 반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인 가구가 전체 세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오늘날, 혼자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더 이상 창피하지도, 주변의 눈치를 살필 일도 아닌 자연스러운 식탁문화로 자리 잡게 된지 오래다. 하지만 정말 ‘혼자가 편해서’가 2030세대를 강타한 ‘혼술’문화의 주된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술자리는 여럿이 모인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널부러져 있고 ‘마셔라, 마셔라!’같은 각종 구호를 외치며 ‘원샷’을 부추기는 그런 자리 말이다. 대학 다닐 적엔 MT에서, 취직하니 회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술자리는 사람만 바뀌었지, 모습은 영락없이 똑같다. ‘혼술’은 이처럼 많은 인원이 모여 시끄럽게 술을 마셔야 흥이 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바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어준다. 술자리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강권이나 속도전 없이 내가 원하는 술을 원하는 만큼 여유롭게 즐기면 된다. 굳이 말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느긋한 분위기속에서 나만의 세계에 잠길 수 있다.

◆ 술 한잔에 사색과 낭만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직장인들은 가장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을 꼽는다. ‘혼술’문화는 그런 현대사회의 애환을 해소하는 하나의 탈출구 역할을 하는 중이다.

평소 ‘애주가’임을 자처하는 회사원 김애진씨(26)는 “금융업에 종사하다보니 야근이 잦아 지쳐있는 날이 많다”며 “밖에 있기가 피곤하고 귀찮을 때는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혼자 마시는 술이 답”이라고 말했다. 지나친 비용을 지불하거나 에너지가 방전되는 일 없이도 충분히 정신적 만족과 휴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회사원 정모씨(25)는 ‘혼술’의 매력을 사색으로 꼽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시는 술도 좋지만 퇴근하고 혼자 마시는 술만의 낭만이 있다”는 정씨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거나 하루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고 전했다.

인스타그램에서 ‘#혼술’을 검색하면 나오는 게시물들에는 간단한 과자나 집에서 만든 요리와 함께 찍은 주류 사진들이 즐비하다. 한 인스타그램 사용자(lanka_2005)가 “혼술이 따로 있나?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이 혼술”이라는 캡션과 함께 올린 맥주 사진에는 무려 15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렸다. 술은 혼자 마시는 게 아니라는 옛 어른들의 조언이 무색할 정도로 젊은이들은 각자의 저녁을 책임지는 술과 안주 레시피까지 적극 공유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주종에 따라 어울리는 안주가 따로 있다며 술안주 고르기 팁을 전파하기도 한다.

일부는 ‘혼술’이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닌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로 회식 및 각종 뒷풀이 등에서 볼 수 있는 기존 음주문화보다 훨씬 건전하다고 주장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7월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술자리 회식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할 만큼 폭음으로 얼룩진 회식 자리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기업문화’가 됐다. 회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와 ‘상사들의 눈치를 봐야 해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모씨(28)는 “선배들의 강권에 술을 들이붓다시피 해야 하는 회식에서는 술맛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다”며 “집에서는 딱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술을 페이스를 지키며 마실 수 있어 술이 맛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 내 집 같이 아늑한 ‘작은 술집’이 대세

(내자동 '텐더바')

‘혼술’이라고 해서 집에서만 마시라는 법은 없다. 옆 테이블의 시끌벅적한 “건배”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잔술을 즐길 수 있는 뒷골목 선술집과 칵테일 바가 떠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애주가들은 저마다 혼자만 알고 싶은 ‘아지트’같은 술집 하나 정도는 꿰뚫고 있다.

평소 ‘혼술’을 즐긴다는 정모씨(33)는 “예전에는 술집은 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곳 인줄만 알았는데 조용히 술을 마실 수 있는 단골 바를 알게 된 이후로 신세계를 경험했다”고 한다. “퇴근 후 혼자 마시는 술 한 잔에 하루 종일 사람과 업무에 치이며 받은 부담감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라고.

정씨가 자주 찾는다는 종로구 내자동의 ‘텐더바(TENDER Bar)’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칵테일 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와 은은한 간접조명이 칵테일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길다란 바에는 12명이 일렬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어 혼자 온 손님들도 따로 동 떨어지는 일 없이 자연스레 빈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술을 주문할 수 있다. 규모가 작은데다 분위기가 매우 조용한 편으로 대부분의 손님들이 혼자거나 많아야 한 명의 동행과 함께 온다.

김현정 오너바텐더는 이 곳의 ‘룰’은 사실상 혼자 온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에서는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눠야하며 조용히 술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는 “특히 요즘 들어 혼자 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며 “간혹 손님들 중에 ‘혼술’이 유행이라고 들어 혼자 와봤다는 분들도 있고 회식이 끝나고 비로소 나만의 한 잔이 필요해 오는 분들도 적잖다”고 설명했다.

대학로 골목 한참 안쪽에 위치한 ‘독일주택’도 많은 네티즌들이 꼽은 ‘혼술하기 좋은 장소 Best’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곳이다. 독일이라고 해서 나라를 떠올리기 쉬우나 한자를 결합해 만든 상호명으로 ‘홀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곳’이라는 기발한 뜻이 숨겨져 있다. ㅁ자 한옥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술집 겸 카페로 처마 밑에 앉아 마시는 맥주는 그야말로 ‘감성 자극제’다. 상큼 쌉싸름한 에일과 목넘김이 부드러운 스타우트 등 생맥주 네 종류와 시중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병맥주를 판매하고 있어 취향에 맞춰 가볍게 한 잔하기 좋다. 다른 주류도 많지만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쉬어가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평일 오후 두시쯤 이곳을 찾은 대학생 김모씨(22)는 “조용한 분위기라 가끔 낮술이 마시고 싶을 때 찾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 시원한 바깥 공기와 함께 야외에서…공원·한강은 ‘혼맥’ 명당

(연남동 경의선숲길에서 한 남성이 '낮술'을 즐기고 있는 모습)

일명 ‘연트럴파크’로 불리는 연남동 경의선숲길은 매일 저녁 쉬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주말에는 낮이건 밤이건 붐비는 인파로 남는 벤치 하나 없을 정도다. 가을이 완연하니 시민들은 자연스레 야외로 향하고 있다.

손에 맥주병 하나씩 들고 벤치에 걸터앉은 젊은이들은 여유로운 표정이다. 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세계맥주 및 와인 주류점인 ‘술퍼마켓’은 원래 철도였던 경의선숲길의 새 단장 이후 최대 수혜자로 거듭났다. 수십 여종의 수입맥주와 와인, 플라스틱 컵에 담긴 마른안주를 판매해 이 곳을 찾는 손님들이 들르는 ‘필수코스’가 됐다.

연남동에 사는 회사원 김모씨는 이곳을 ‘혼술’하기 최고의 장소로 꼽았다. “식당처럼 시끄럽지 않고 탁 트여있어서 좋다. 가끔 주말 밤에 거리 공연이나 버스킹을 하기도 하는데 잔잔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혼자 마시는 술 맛은 아는 사람만 안다”고 거듭 ‘강추’했다.

한강은 이미 ‘혼맥’ 명소가 된지 오래다. 주중 저녁에도 각 지구 한강공원에는 혼자 맥주캔을 따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강을 바라보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술을 마시는 사람, 자전거를 타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잔 하며 쉬어가는 사람 등 저마다 사연도 다양하다. 각 지구 한강공원마다 규모와 경치가 달라 주는 매력도 제각각이다. 이 중에서도 반포지구의 무지개 분수는 매일 밤 일곱 빛깔 조명을 밝힌 다리와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벤트로 유명하다. 뚝섬 한강공원은 공원 동쪽에 위치한 ‘치유의 숲’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노상’을 위한 장소 선택은 내 몫이다. 그러나 가끔 혼자 술을 마시다 강가에서 잠드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는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도록 하자.

◆ 그곳에서 기다리는 새로운 인연

집이 아닌 바깥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건 “도저히 용기가 안 난다”고 말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그러나 한 잔 술과 함께라면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결코 어색하지 않다. 실제로 술집을 찾는 단골손님들끼리 안면을 익혀 친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여의도 충무빌딩 지하에 위치한 바 ‘다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칵테일 바로 올해로 개업 30주년을 맞았다. 올드팝이 흘러나오는 두 뼘 짜리 공간은 이 곳의 터줏대감인 5,60대 단골손님들부터 입소문을 타고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찾아온 대학생들로 금방 만석을 이룬다.

혼자 온 손님들끼리 자기소개를 하며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는 건 이 곳에 오면 자연스레 밟게 되는 절차나 다름없다. 술집 밖에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손님들도 뒤로 빼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마성의 공간이다. 갓 미성년 딱지를 뗀 스무살 새내기와 그의 아버지뻘은 될 법한 50대 중년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5~6명이 앉으면 꽉 차는 작은 바에는 혼자 온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명렬 바텐더의 입담에 너도나도 웃음을 터뜨리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노장’ 바텐더는 “여기서는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라며 껄껄 웃었다.

텐더바의 김현정 오너 바텐더는 항상 혼자 온 손님들에게 ‘저녁은 드셨냐’ ‘퇴근이 늦으셨냐’는 등 말을 붙이며 살뜰히 안부를 챙긴다. 이처럼 바텐더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는 바에서는 친근한 바텐더가 손님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단순히 손님이 주문한 술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취향을 파악하고 적절한 대화로 소통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바텐더가 갖춰야 할 미덕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편안하고 유려한 접객을 하는가도 단골손님을 확보하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트렌드에 민감한 요즘 젊은이들이 찾는 간판 없고 찾아가기도 어려운 스피크이지(speakeasy) 형 바는 대부분 규모가 작아 바텐더들이 손님들을 일일이 신경 써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인기 비결로 작용했다. ‘맞춤형 서비스’가 손님들에게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혼자 온 손님들은 소외되거나 묵묵히 술만 마시는 일 없이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 어색할 것 같다고? 천만에 말씀. 이런 손님, 저런 손님 다 겪어본 바텐더의 재빠른 감과 적재적소의 위트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친해지면 고민상담까지 오고간다. 김현정 바텐더는 “커플로 오는 단골손님들이 가끔 싸우고 난 뒤 따로 와서 연애 상담을 할 때가 있다”며 “그럴 때는 성심성의껏 들어드리는데 같은 여자 편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혼자 온 손님들에게 특별히 더 신경을 쓰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술만 마시고 가길 원하는 손님들도 있지만 마음이 답답해서 혼자 온 분들은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 분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신경 쓰는 것도 우리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옆 사람과 속도전을 벌이며 취할 때까지 마시는 술을 진정한 음주문화로 믿어왔다면 이젠 바뀔 때다. 소음이 아닌 분위기와 함께하는 음주에는 온전히 나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낭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홀로 남겨졌을 때의 허전함이 두려워 무리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습관처럼 거부하고 있었다면 맛좋은 술 한잔을 친구 삼아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의 휴식에 응해보자.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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