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실리, 한국은 명분
아베의 정치적 성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그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미사일 발사에 강경 대응했는데, 이것이 일본 유권자의 정서에 먹혀들었다. 2001년 12월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이 일본 영해에서 북한 괴선박을 격침시켰을 때, 2002년 북한을 방문해 납치 문제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과를 요구했을 때, 2003년 피랍 일본인이 일본에 일시 귀국한 뒤 일본이 북한과의 약속을 파기하면서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았을 때 아베는 과감하고 일관되게 대북 강경 자세를 보여 여론의지지를 얻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9월 20일 일본의 총리에 당선되어 9월 26일 취임했다. 총리 취임 후 불과 보름 여 만인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북한으로 인해 인기를 모았던 그가 북핵으로 위기국면을 맞고 있는 한중일의 경색국면을 어떻게 풀지 살펴본다.
윤양래 전문기자
아베가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게 1993년 이니까 정치입문 13년 만에 최고 권좌에 올랐다. 현재 그의 나이 52살이다. 지금까지 경력은 중의원 의원 5선,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 등을 거쳤다. 10선 이상의 의원이 수두룩한 일본 정계에서는 아직 겨우 중견 정도의 위치.(의원 내각제인 일본에서는 정치적 이유에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르는 경우가 많아 한국에 비하면 다선 의원이 굉장히 많다.) 역대 총리를 보면 하시모토가 첫 당선 이후 33년, 오부치는 33년, 모리 전 수상은 31년, 고이즈미는 29년이 걸렸다. 최초의 전후 세대 총리이자 전후 세대 최연소 총리 기록을 세운 것이다.
초고속 성장의 이유
기시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도 총리(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최종타결 당시 총리)를 역임했으며‘비핵3원칙’을 천명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성이 다른 이유는 기시 노부스케는 사토家 사람인데 기시家로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임. 아베 총리의 동생도 기시家에 양자로 들어간 기시 노부오 참의원임) 이 사토 에이사쿠와 관련하여 최근 나온‘슬픈열도’(김충식 지음)라는 책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나와 있다. 저자가 조선 도공의 후예(심수관 14대손)집을 찾아갔을 때 심씨는 사토 에이사쿠가 자신한테 직접 써주었다는‘묵이식지’(默而識之: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통한다)라고 적혀 있는 액자를 가리키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사토씨가 하는 말이 놀라웠어요. 나한테‘당신은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묻기에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더니‘우리 가문은 그 후에 건너온 집안’이라는 거예요. 한반도의어느 고장에서 언제 왔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자기네 선조가 조선에서 건너와 야마구치에 정착했다는 얘기였지요.”아베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1924~91)역시 유명한 우익 정치가다. 후쿠다 다케오(1905~95) 내각 때 관방장관이었고 스즈키 젠코(1911~2004) 내각 때는 통산상, 나카소네 야스히로(1918~) 내각에선 외상을 지낸 신타로는 자민당 총무회장과 간사장을 역임했고 유력한 총리후보감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이즈미 총리가 아베 신조를 파격적으로 요직에 발탁할 때에도 자민당 내의 원로들은‘아베 신타로의 아들이니까’라면서 너그럽게 봐줬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아베 신타로의 라이벌 다케시다에게 표를 던졌던 일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80년대 외상 시절에는 독도가 일본땅임을 주장하여 한반도를 분노케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베총리의 친조부 아베 히로시도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아베 총리의 초고속 성장의 배경에 이러한 일본 정치 명문가라는 강력한 후광도 있지만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강력한 지원은 아베가 출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다. 일본의 역대 총리를 돌아 봤을 때 젊은 나이어서 총리 자리에 부담을 느끼는 아베에게 고이즈미 수상은 노골적으로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하라고 설득했다. 또한 자민당 내 유명한 한국통인 야마모토 이치타(山本一太) 참의원은 아베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는 모리 전 총리의 자제 발언에도 굴하지 않고 아베 띄우기에 열을 냈다. 최근에는‘왜 지금 아베 신조인가’라는 책을 냈을 정도다. 야마모토는‘구조개혁’은 불가피한 시대적 조류이며, 고이즈미의 구조개혁을 계승할 적임자는 아베라고 주장했다. 아베의 정책수행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선 아베가 결단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다고 반박했다. 외무성이 북한 문제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때 아베는 몇 차례나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아베의 높은 국민적 지지도가 그를 총리로 만든 견인차였다.
아베와 아키에
아베총리는 세케이 대학 출신으로 이 세케이 대학은 돈 많은 집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은 재단의 학교를 다녔는데, 일본에서는 이런 친구들을 ‘에스케’라고 부른다. 에스컬레이터의 준 말인 데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듯이 진학했다는 뜻이다. 아베는 대학시절에 양궁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아베 신조 총리는 세케이 대학 출신으로는 최초의 총리이다. 일본에서도 일반인들에게는 의외였는지 한 신문에서 세케이 대학에 대한 탐방기사가 나기도 할 정도였다. 아베 신조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베제철에 취직해 3년 반 동안 근무했는데, 만원전철을 타고 다니며 보통 월급쟁이 생활을 했고, 동남아시아에 냉연강판을 수출하는 업무를 해서 철강업에 대해서도 꽤 지식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는 뉴욕지점에서 근무하기도 했는데 그 이전인 대학졸업 후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 정치학과에서 2년간 유학생활을 했는데 공부보다는 여러 경험을 쌓으며 외국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1982년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중의원에 당선된 것은 39세 되던 1993년. 그 뒤 정치인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2000년 7월 모리(森喜朗)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2002년 10월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2003년 9월 자민당 3역인 간사장에 올랐다. 간사장은 자민당 운영 및 선거시 자금과 유세지원을 총괄하는 요직으로 영향력이 큰 자리다. 이후 2004년 자민당 개혁추진본부장, 2005년 10월 제3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비서관이던 32세 때 모리나가(森永)제과 사장의 딸이자 명문 성심여학원 영문과를 나온 일곱 살 연하의 아키에(昭惠)와 결혼했다. 미치코(美智子) 왕비의 대학 후배인 아키에는 올해 45세로, 덴쓰(電通)광고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한때 라디오 DJ로도 활동하는 등 밝고 활달한 성격이다. 이 때문에 아베의 대중적 인기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베는 술이 약한 편이다. 그러나 부인 아키에는 주량도 꽤 될 뿐 아니라 스키, 테니스, 골프를 즐기는 만능 스포츠우먼이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강사를 집에 불러 한국어를 공부했을 만큼‘한류(韓流) 팬’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키에가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는 흥미롭다. 아베가 2002년 북한을 방문한 뒤 아키에는 일본 정치인의 성패에 한국, 한반도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하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주요 이슈로 부각시켰는데, 이는 아베를 거물 정치인으로 급성장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현재 아키에의 한국어 실력은, 한나라당 모 의원이 “남편이 총리가 되면 한국어를 구사하는 최초의 일본 영부인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는 수준에 다다랐다.
관방장관이라는 자리
과거사에 대한 과거 아베의 입장
과거사에 대한 아베의 인식은 일본 극우파와 궤를 같이한다. 아베는 공공정신, 향토애와 애국심 등을 담아낼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의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베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책임은 아직 학문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언급했다(2006년 2월16일 ‘아사히신문’ 보도). 또한 아베는 여성국제전범재판(일본군위안부 문제)을 다룬 프로그램의 방영을 중단하도록 NHK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2005년 1월12일 ‘아사히신문’ 보도). 아베 신조는‘일본을 지킨다’에서“정치가는 항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월초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아베는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 예방공격도 불사하는 강경대응, 거대중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대결형 외교 자세라는 ‘원초적 본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자민당 중진들의 저항, 구조개혁 반대파의 비난, 야당과 진보언론의 흠집 내기, 한국·중국·북한의 비판에 맞서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이래 동북아 각국의 정상간 대화가 두절된 것을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지난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 이래 한일 양국 수뇌간 의견교환은 부재한 상태로, 대화 단절이 가져오는 부작용이 크다는 평이었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둘러싼 한일간 갈등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아베 관방장관, 아소 외상, 누카가 방위청 장관의 대북한 선제공격 발언이나 유엔안보리 7조 적용 추진은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나온 것이었다. 아베 역시 야스쿠니·독도·북한 문제에서 한국과 기본인식이 달랐다. 아베 체제 이후 한일관계의 근본적 개선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아베의 외교 브레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전 태국대사는 공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했다. 오카자키는“노 대통령이 오로지 국내정치에 이용하고자 수차례 대일 비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고 주장했다(2006년 7월 ‘중앙공론’). 아베가 총리 취임 이후에 맞을 동북아 외교의 첫 관문은 야스쿠니 문제다. 아베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야스쿠니 참배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언행을 보면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를‘지뢰’이다. 아베는 지난해 5월 미국 강연에서“차기 총리도 야스쿠니에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고, 자민당 간사장이던 2004년과 간사장 대리이던 2005년에도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바 있다.
아베의 책무
아베가 달라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국수주의적 역사관과 우익성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던 아사히(朝日) 신문이 12일 사설을 통해 취임 보름째를 맞은 아베 정권에 이례적인‘찬가(讚歌)'를 늘어놓아 눈길을 모으고 있다. 신문은 아베 총리가 한국,중국과의 정상회담 중 과거사를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발표한 사실 등을 언급하며 아베 총리가 취임 전 역사, 외교, 교육 문제 등에 있어 잘못된 인식을 보여 우려를 자아냈으나 보름만에 ‘기우(杞憂)'로 밝혀졌다고 평가했다.‘아베 변화 환영’,‘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잘못을 알면 바로 고친다)입니까?’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날 사설은 아베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사설은 “취임 전만해도 아베 총리와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고 느꼈으나, 취임 후 아베 총리의 각종 언행에서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아베 총리가 과거에는 일본의 식민지배 과오와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왔으나, 취임 후 정상회담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반성한 1995년‘무라야마 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1993년‘고노 담화’의 정신을 잇겠다고 선언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 북한 핵실험이 발표된 후 일본 내에서 높아지고 있는‘일본핵무장’주장에 대해‘일본 비핵화’원칙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칭찬했다. 신문은“국정을 담당하고 있다는 책임감이 총리를 빠른 시간내에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며“일시적인 전술의 변화가 아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역사인식 개선, 그러나 북한에는 강경대응 아베 총리는 취임 후 아시아 외교 문제 등에 대해서는‘유화정책’을 펴는 한편, 북한 문제에는‘강력하고 빠른 대응’을 선보여 국민들의 불안감을 달래주는 이중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12일“아베 총리가 안보불안에 빠진 자국민에게는 국수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주변국에는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펼쳐 반대 세력들에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집권 2주째 지지율은 취임 초와 비슷하게 높은 63%였으며, 한·중 양국과의 정상회담에 대한 지지는 8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보이는 것과 일본 재무장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 추진 등이 앞으로 아베 총리의 아시아 외교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월8일 아베총리는 중국을 방문했다. 아베 총리의 방중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뒤틀렸던 양국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겠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베 총리의 방중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공동성명은 아니지만 공동 언론발표문(코뮤니케) 형식을 통해 후진타오 주석은 아베 총리의 방일 요청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했다고 밝혔다. 국제회의 석상의 정상회담도 재개키로 합의했다. 후주석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서 비롯된 정치적 장애물을 아베 총리가 제거해달라고 요구했고, 아베 총리는 직접적인 언급은 피한 채 일본이 과거 아시아 국민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끼친 데 대해 깊은 반성을 표시했다. 류젠차오 대변인은“양국 지도자는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후주석은 아베 총리에게 정치 신뢰 회복, 상호협력 심화, 인적교류 확대, 지역 및 국제 현안에서 협조 강화 등 미래 지향적인 4가지 방안을 제안해 아베 총리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아베 새 정권에 양국관계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은 후주석, 원총리에 이어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이른바 빅3가 아베 총리를 만나는 등 최대한 환대하는 모습을 연출했고, 언론도 아베의 매파성향 부각 대신 양국 우호를 전면에 내거는 보도 태도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원자바오 총리 주최의 만찬이 끝난 뒤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방중 결과를 설명하는 등 정상회담의 성과를 과시했다. 일본 정부 내에서도 벌써부터 이번 방중이 성공적이었다는 자평이 나오면서 중·일 국교정상화 35주년이 되는 내년 중 후주석의 방일에 기대를 표명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이어 다음날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참배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했지만 한·일 관계의 건설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대응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참배 단념 의사를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역사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보상 등의 문제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아베 총리가 한국 국민의 감정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화답했다. 어느 것 하나 구체적인 합의나 속 시원한 해법이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양국이 역사마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호협력 관계를 복원하는 단초는 마련되었다. 따지고 보면 과거사 갈등의 근본 원인은 역사 인식의 괴리에 있는 만큼 한 번의 만남으로 전부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역사 마찰 문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에서 시민사회 간 공조 및 국제적 연대노력에 의해 풀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黑猫白描
중국 인사들은 위협적인 대일 발언은 반발을 초래할 뿐이라는 대일협조공작소조의 판단에 따라 최근 대일 발언을 자제해 왔다. 중국 외교부 류건초 대변인은 아베총리의 방문이 중일관계 개선과 발전에 "희망의 창문"을 열어주었다고 표했다. 또한 중국 국무원 오의 부총리는 10월 7일 하문에서 일본기업가들이 중일관계 개선 및 발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할 수 있기 바란다고 했다. 오의부총리는 제10차 중국국제투자무역상담회에 참가한 일중투자추진기구회장 토요다 소이치로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중일양국은 이웃나라인 동시에 중요한 무역파트너라며 장기적이고 안정한 중일선린친선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양국과 양국인민의 근본이익에 부합된다고 했다. 오의 부총리는 일중투자추진기구가 중일경제무역협력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일본경제계가 대중국 투자를 늘려 윈윈을 도모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토요다 소이치로는 최근 중국의 경제발전이 빠르고 투자환경도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며 일본경제계는 대중국투자를 계속 확대하고 에너지, 환경보호 등 분야에서 중국기업과 협력을 강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결국 중국은 실익 없이‘야스쿠니신사참배’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기 보다는 일본의 경제협력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아베의 방중 이전부터 있어 왔던 일련의 조치들이 이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으며 아베는 이에 기꺼이 화답을 하므로서 중국은 실리를 챙긴 것이다.
한일관계 개선의 호기
그러나 한국은 지속적으로 원론적인 안건만 제시했다.‘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참배에 관해서 한·일 관계의 건설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대응하겠다’,‘역사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보상 등의 문제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아베 총리가 한국 국민의 감정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한 것을 참배 단념의 간접적인 표현이라느니 이전의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라느니 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인 것 같다. 당연한 외교적 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이는 일본의 보수적 인사들의 말 속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한일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 포스트 노무현 정권을 기다려야 한다’라는.... 우리는 지나치게 일본에 대하여 원론적인 것만을 고집하므로 해서 중국과 같은 실리도 못챙기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이다. 국제사회의 외교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실리가 아닌가. 이제까지의 장벽을 깨고 미리부터 준비해 온 중국의 예를 우리는 주의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까지의 예를 봤을 때 일본이 모든 것을 명백히 인정하고 사과하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가 그들보다도 월등한 국력을 갖게 되지 않는 한 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아베 정권의 출범을 계기로 대일관계 개선에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기대해 본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