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한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에 이만큼 좋은 시스템이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가장 합당한 체제다. 여기에 덧붙여 두산은 자랑스레 말한다. 우리는 사우디 왕가식 세습체계를 갖추고 있다. 전근대적 세습으로 두산이 돌아간다. 전근대로…….

윤양래 기자

개인사업자 보다도 못한 법인
우리는 상식적으로 안다. 개인사업자와는 달리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은 이사회에서 하고 모든 경영상의 책임은 주주들이 유한책임을 진다. 주식회사 제도의 원론만 갖고 보면 경영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내외 통제장치들은 다양하다. 이사회에서는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대주주와 경영진의 독주를 방지할 수 있고 경영실패의 책임을 물어 감봉에서부터 해임까지 가능하다. 주총에서도 실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영진의 교체가 가능하다. 92년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에서 일어난 사외이사들의 행동은 경영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GM 사외이사들은 당시 수년 동안 적자를 기록한 로버트 스탬플 회장을 전격 경질하고 존 스미스를 회장으로 앉히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런 원론이 통하지 않는다. 주주들이나 사외이사들이 문제를 삼으면 충분히 최고경영자 교체라는 선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인데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이사회는 여전히 유명무실하고 주총도 거수기일 뿐이다. 재벌총수 스스로가 책임을 져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실질적으로 회장의 하수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대표이사만 바뀐다. 회사 설립의 명령을 내리고 돈을 모으고 실질적으로 경영을 했던 사주 즉 회장이 그 사업의 실패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하고도 기괴한 경영시스템이다. 만일 그 회사가 상장회사라면 투자자는 그저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러한 재벌도 망하는 경우가 있다.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권자의 의지에 따른 경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주가 거리에 나앉았다는 얘기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사주, 회장은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여전히 잘들 살고 있다. 웬만한 중소기업 또는 개인사업자가 패가망신하는 경우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노숙자로 전락해 버리거나 목숨을 끊는다.  대마불패(大馬不敗)는 여전한 것이다! 후계자들이 싸우는 경우 그들의 행로는 늘 비슷했다. 규모가 줄어들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다. 현대, 한화, 대성, 샘표식품, 동아건설…. 비슷한 행로를 걷고 있는 두산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두산의 역사
두산의 이미지에 세 가지가 있다. 박승직상점, 박가분(朴家粉), OB맥주.
1896년 8월 현 두산의 1세대 박승직이 행상으로 시작하여 배오개장터에 면직물 상점, 박승직 상점을 연 것이 두산의 시발점이다. 이후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1915년에 화장품회사 ‘박가분제조본포’를 열어 ‘박가분’을 판매하기 시작하여 잘나갈 때 하루 5만갑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박가분은 현대적 의미의 방문판매의 효시이기도 한데 처음에 포목상들의 경품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포목상들이 지방으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인 상품이  되었다. 그러다 1937년에 일제 상품에 밀려 폐점하고 만다. 1937년에 시흥에 ‘소화기린맥주’ 회사가 건립되었는데 여기에 박승직이 주주로 참여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하자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1945. 10. 6.에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박승직 상점이 박두병에 의해 두산상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두산의 현대사는 시작되었다. 박두병은 1937년부터 박승직 상점의 경영을 사실상 도맡아온 젊고 야심에 찬 기업가였다.  이후 1952. 5. 22. 자신이 관리인으로 있던 맥주회사를 인수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OB맥주, 동양맥주회사로 재출범하게 된다. 1960년대엔 두산산업개발, 두산음료, 두산기계 등을 설립하여 두산을 한국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언론 문화 사업과 사회사업에도 열정을 쏟았던 박두병은 기업의 현대화와 전문경영인제의 도입, 사업의 다각화 등을 통해 일류기업 두산의 기초를 공고히 한 앞선 경영인이었다. 또한 외자도입 심의의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아시아상공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 두산은 생활문화산업의 선두주자로서 그 위치를 굳건히 하였고, 건설, 기계, 전자사업에서도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외시장의 개척에 더욱 주력하게 된 두산은 출판, 광고 등의 신사업 진출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기업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룹의 위기가 닥쳤는데 91년 계열사인 두산전자가 전자부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발암물질인 페놀을 낙동강에 무단방류했던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면서 온 국민으로부터 ‘수질오염의 주범’으로 꼽혀 난타를 당했다. 심지어 ‘두산상품 불매운동’까지 전개될 정도로 ‘국민의 적’으로 취급당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맥주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두산의 OB맥주는 ‘깨끗한 물’을 강조한 하이트맥주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급락했으며 그룹을 이끌어가던 박용곤 현명예회장도 일선에서 퇴진해야 했다. 이후 동생인 박용오 회장이 승계를 하여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스스로 단행 했다. 결과론이지만 페놀사태는 두산에 혹한의 IMF 시기를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예방주사가 됐다. 생존위기 속에서 그룹의 주력이었던 음료사업마저 코카콜라에 양도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서 비축한 힘이 최근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같은 거대한 기업을 인수하는 에너지로 작동했다. 유사업종을 대통합하여 정예화 한다는 원칙 하에 23개 계열사를 (주)두산, 두산산업개발, 두산포장, 오리콤 등 주력 4개사로 대통합하는 2단계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또한 기업의 가치창조와 현금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대규모 외자유치를 지속적으로 추구, 벨기에 인터브루사와 美 씨그램사 등으로부터 외국자본을 유치했다. 이러한 구조조정 노력의 결과 상호지급보증이 해소되고, 재무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으며,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109년을 이끈 힘
두산 가(家)는 재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형제 경영, 가족 경영을 통해 파벌이나 다툼이 전혀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이 같은 이면에는 두산 가(家)만의 독특한 가정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창업주인 박승직은 '화목'을 초대회장인  박두병 회장은 '장자를 중심으로 한 인화'라는 유훈을 남겼다. 박두병 초대회장의 경우 어릴 때부터 자식들 간 사소한 다툼이 있을 경우 장자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늘 혼냈다. 창업주 박승직도 장손인 박용곤 명예회장에게 “집안의 화목은 장자에게 달려있다. 형이 조금 덜 가지고 동생에게 먼저 줄 때 형제간 우애와 존경이 생겨나는 법”이라고 일깨웠다. 최근까지 그룹 경영에 있어서도 박용만 부회장이 업무 지침을 내린 뒤 형인 박용오 회장(둘째)이나 박용성 회장(셋째)이 정반대 지침을 내리면 동생이 자기의 주장을 바로 접고 형들의 의견을 따를 정도였다.

전례를 통해서 본 형제의 난
‘兄’이라는 한자는 입 ‘구(口)’에 어진 사람인 ‘발’을 결합한 글자다. 어질게 동생들을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우를 뜻하는 '제(弟)'는 활에 천을 감는 형상인데 천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감아내려 가는 게 순서이므로 자연히 차례를 의미하게 되었고 여기서 '아우'라는 뜻이 나왔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활이나 갖고 노는 철부지'라는 의미에서 아우를 뜻하게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의미와는 별개임을 늘 보여 주고 있다. 형제간의 분쟁에서 자유로운 재벌가는 없다. 그야말로 물보다 진한 게 피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인 양상이 벌어 졌고 또 현재도 진행 중이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맏아들 이맹희는 지금껏 방랑생활을 하고 있다. 2000년 3월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인 정몽구, 정몽헌 형제간의 갈등은 동생의 돌연한 자살로 화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끝났다. 한화그룹 김승연, 김호연 형제는 3년간 무려 31차례나 재산권 분쟁 재판을 받았고 롯데그룹, 동아건설도 형제간 재산권 분쟁을 겪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동생이자 뒤어난 경영인이었던 조중건씨는 하와이로 쫓기듯 떠났다. 연탄재벌로 잘 알려진 대성가 삼형제도 3년간이나 경영권분쟁을 끌어왔다. 창업주인 김수근 전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해서 보유중인 두 도시가스회사의 주식을 시가의 2∼3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영민·영훈 회장은 합의 각서대로 매매시점의 종가에 팔아야 한다고 맞서면서 법정 다툼까지 치달았다. 또 막내딸인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과 큰 오빠인 김영대 회장 간에도 가죽 브랜드인 MCM사업관리권을 둘러싸고 법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펭귄’ 브랜드로 잘 알려진 샘표 역시 98년 8월말에 열린 정기주총에서 서울 창동부지 매각문제를 놓고 형제가 경영권 싸움을 벌여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동생의 지분매각으로 일단락된 바 있다. 중소기업 신라교역의 실질적 지배주주로 형제간인 박성형 명예회장(76)과 박준형 회장(69)은 지난 2000년부터 신라교역 경영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여왔다. 당시 박 명예회장은 동생 측이 사전 동의 없이 자신의 신라교역 260만주를 가져갔다며 박 회장과 그의 아들 박성진(32)씨를 상대로 예탁증권공유지분 반환소송을 제기했었다. 경영권을 둘러싼 이들 형제의 다툼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 동생인 박 회장이 주식을 반환함으로써 2년여 만에 일단락됐다. 형제에 의해 검찰에 넘겨진 두산의  비자금 사건은 자칫 1991년 페놀 사태 이후 그룹 최대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집단소송 제에 의해 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무원칙한 자식사랑이 무너뜨린 100년 전통
이 분쟁은 표면적으로는 느닷없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형제 경영' 속에 갈등과 반목의 씨앗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3세에 이어 4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장자 승계 원칙'과 '형제간 공동소유, 공동경영' 사이에 충돌할 가능성이 수면 위로 올라 왔다는 것이고 이 가능성을 촉발시킨 것이  두산 가의 장손이자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 사장이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으로 내정되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는 것인데 두산 3세간 일어난 ‘형제의 난’은 사실상 4세들을 위한 ‘대리전’이라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그 4세 가운데 핵심 인물은 ‘박정원·진원 대(對) 박경원·중원’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박경원(41) 전신전자 사장과 박중원 두산산업개발 전 상무는 박용오 전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며, 박정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은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또 박진원 산인프라코어 상무는 박용성 회장의 장남이다. 이들 4인방 가운데 박 부회장과 박 상무는 그룹의 성장세와 맞물려 승진 가도를 달린 반면 박경원 전신전자 사장과 박 전 상무 형제는 지분 하락에 따른 소외감에 시달렸다는 후문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박 사장 등 박용오 회장 일가가 요구한 것이 두산산업개발의 독립이었으며 ,M&A(인수합병) 시도였다는 분석이다. 현재까지 알려 진 발단은 박용오 전 회장의 장남 박경원 전신전자 사장에게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박 사장은 3년 전 두산그룹으로부터 독립해 CCTV 제조업체인 전신전자를 경영해왔지만 지난해부터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박 사장은 두산 계열사  보유 지분을 매각해 이를 경영자금으로 활용했으며, 부친인 박 전 회장의 자금도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자금난이 지속되자 박 사장은 전신전자를 포기하고, 올 초 두산그룹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박 사장은 자금줄인 지인들과 공모해 그룹의 사실 상 지주회사격인 두산산업개발(㈜두산 지분 22.88% 보유) 인수합병(M&A)에 나섰지만 가족들로부터 바로 발각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인해 부친인 박 전 회장은 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으로부터 은퇴를 강요받았다는 후문이다. 자식의 사업자금 원조를 위해 자신의 지분마저 다 팔아 치웠고 이로 인한 초조감이 선친의 유시였던 형제경영의 준수보다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앞세우게 되었고 급기야는 100년간의 원칙을 무시하는 몽니까지 부리려다 실패하여 소외당하자 검찰에 투서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알고 있는 두산가 형제의 이전투구에 관해서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것은 논외로 치기로 한다. 앞으로 어떻게 정리가 되든 간에 100년 전통의 미담은 사라진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다시금 극명하게 국민들에게 각인된 것은 ‘한국의 재벌그룹들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형제의 재산 싸움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재벌그룹 전체 문제로 인식해 두산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검찰에 의해 누구의 손이 들려 지든 두산은 이미 그들이 자랑하던 모든 기업이미지를 다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서 두산이 살아남는 길은 국민의 기업으로 남는 것이다. 100년 전통을 스스로 깨어 버린 후손들은 이제 모두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전통을 확립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그룹 공중분해’라는 최악의 경우만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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