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치우천황과 헌원황제

우리는 과연 우리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구나 역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믿고 공부해 왔다. 그러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또는 통치자에 따라 변화했다. 개인에 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시대를 풍미한 라이벌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 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기고 우리는 과거 그들의 치열한 삶을 통해 오늘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윤 양 래 기자

붉은 악마로 되살아난 치우천황
우리민족에게 최고의 감동을 안겨 줬던 2002년 월드컵! 그때 우리민족의 위대했던 지도자, 치우천황이 붉은 악마로 되살아났다. 당시 ‘우리 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는 ‘동방의 등불-코리아’라는 책자를 외국인에게 나누어 줬는데 그 책자에 ‘붉은 악마의 뿌리는 배달국의 14대 왕이었던 치우천황이다’ 라고 명시했다. 치우(蚩尤)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역사가들이 위서(僞書)라고 폄훼하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 측의 사서 중 대표 격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역시 동시대인의 기술이 아니라 무려 2600년 지난 뒤에 나온 것이다. BC 3000여년, 당시의 기록이 없는 바에야 2600년이 지난 후의 역사서나 4900년이 지난 후의 역사서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이토록 엄정한 기준을 갖다 대어 스스로 축소된 역사에만 안주하는 것일까?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는데 그들은 한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왜 위서(僞書)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한단고기’라는 것이다. 이 한단고기는 계연수(桂延壽)(?~1920)가 편찬한 책인데 계연수는 일제시대에 임정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 고취를 위해 창설된 단학회(檀學會)의 2대 회장을 지냈고 이후 홍범도(洪範圖)·,오동진(吳東振)의 지원을 받아 1911년에 한단고기(桓檀古記) 30권을 편찬하였다 한단고기는 신라의 승려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역사를 서술한 삼성기(三聖記), 고려시대의 문신 이암(李?)이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記), 고려 말의 학자 범장(范樟)이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한 북부여기(北夫餘紀), 조선시대의 학자 이맥(李陌)이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룬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을 한데 묶은 역사책이다. 우리의 편협한 역사가들이 인정하든 매도하든 우리는 치우천황이 헌원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하던 웅혼한 기상을 만나 보도록 하자.

빼앗긴 역사
중국은 염황치(炎黃蚩)를 삼조(三祖)라고 한다. 염은 염제 신농, 즉 유망을 일컫는 말이고, 황은 황제를 일컫는 말이고, 치는 치우천황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인들이 염황치 삼조를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공식화 한 때는 1993년 10월이다. 중공탁록현위부서기,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집행회장, 중화염황문화연구회이사라는 긴 직책을 가진 임창화(任昌和)라는 사람이 1993년에 세 명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 그 해 10월에 제 1차로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화염황문화연구회, 중국선진사학회와 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 등에 제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어서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1995년 9월부터 삼조문화가 전국에 소개되고, 중화민족문명의 근원적인 명제로서 널리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연구자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중화민족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저작물의 생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 5000년 동안 황제 하나만을 자기의 조상(黃帝之孫)이라고 주장해 오다가 갑자기 유망과 치우천황 두 명을 추가하여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 첫째 이유는 중국이 황제만을 붙들고 있으면 중국의 역사를 5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한족문화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동이문화가 있었다. 동이문화는 마고문화에서 시작이 되는데, 마고문화는 대체로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발해만과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군도가 그 발상지로 보인다. 황제만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할 때, 동이문화로 접근해 갈 수 있는 탈출로가 생기지 않는다. 한족이 동이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동이출신인 유망과 치우천황을 황제 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군왕검 한 분을 놓고 민족종교진영과 기독교진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진영은 단군왕검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은 신화라는 것, 단군왕검은 특정한 민족종교의 우상숭배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민족진영은 목 메인 소리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치우천황과 유망 그리고 헌원의 등장
치우천황 (蚩尤天皇)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 (倍達國) 의 제 14 대 천황으로서 ,  한단고기 (桓檀古記)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 년에 즉위하여 109 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다 . 다른 이름으로 자오지 ( 慈烏支 ) 환웅이라고도 한다.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그는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제작술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치우천황이라 불렀다 . 치우란 '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은 그 강역이 북으로는 바이칼 호 일대, 남으로는 한반도와 서해서안일대(중국 쪽에서는 동해안지역), 서쪽으로는 몽골사막, 동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이르렀다. 치우가 제위에 오를 무렵, 당시 한민족은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사방의 영토에 대한 중앙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주위 여러 거수국(제후국)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특히 유망이 왕위에 오르면서 유사 이래 내륙에 살아오던 화산족(중국민족의 조상)을 이끌고 공상으로 선공해 왔다. 이에 치우는 전쟁을 선언하고 활과 창, 갑옷과 투구 등을 만드는 한편 쇠로 만든 칼 등 여러 새로운 신무기로 무장했다. 아울러 전 배달민족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갈로산으로 집결시켰다. 특히 그는 유망이 원래 한겨레였으나 화산족 세력을 등에 업고 이제 영토까지 넘보는 것을 응징하고자 했고 배달민족의 지배력과 영토도 확고히 해두고자 했다
치우는 9명의 장군 아래로 군사를 배치하고 이를 다시 9진영으로 나누어 81명의 장군과 함께 탁록(현 이수평원부근)으로 진격했다. 이에 유망 편에 서 있던 탁록왕의 군대는 한겨레에게서 배운 축성법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뒤 치우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이 아닌 평지에 허술하게 쌓은 성이라 신무기로 무장한 치우의 군대는 성문을 격파하고 반나절 만에 점령해 버렸다. 첫 전투였지만 치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에 따라 각 곳의 거수국들 중 일부는 바로 항복하고 일부는 싸우다 항복하였다. '탁록전'의 승리 이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아홉 제후국이 치우에 복속하고 충성과 조공을 맹세했다. 유망은 공상(현 시안 부근)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쌓아 대비했다. 아울러 소호를 보내 치우를 상대케 했다. 그러나 소호가 치우의 군대보다 2배나 많은 화산족을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전략에 뛰어났던 치우인지라 과보와 형요로 하여금 태산으로 유인하여 격파해 버렸다. 치우군은 일단 소호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마치 패하여 도망치 듯하면서 화산족이 좁은 태산의 입구로 모두 쫓아 들어오자 치우가 되돌아서서 손을 올리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고 연기가 자욱해 지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에 처했다. 이에 소호와 화산족이 놀라 일거에 후퇴하려다 좁은 길을 통해 대군이 빠져 나가려다 서로 짓밟히는 아비규환이 벌어졌고 이 혼란 속을 치우의 정예군이 일사분란하게 쳐들어가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이에 유망은 공상으로 도피해 온 소호와 함께 도망해 버렸고 천하는 평정되었다. 이후에도 치우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고 화산족과 하족계열의 12거수가 항복해 오자 이들도 모두 자신의 영지에 편입시켰다. 그러던 중 중국민족계인 헌원이 화산족과 하족을 화하족(오늘날의 중국민족)으로 하나로 단결시키고 군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헌원은 소전이라는 부족의 자손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헌원.(BC 2692~2592)은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소전국의 왕비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째별을 감싸 도는 것을 보고는 그를 잉태하여 24개월 만에 수구에서 헌원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해의 아들은 짐뿐이다
유망을 친 후 헌원이 다시 모반을 일으키자 치우천황은 일갈한다.
‘그대 헌원아, 잘 듣거라. 해의 아들이라고 함은 짐 한 사람 뿐이다.’
여기서 치우천황이 제후국들의 모반을 어떻게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자. 치우천황의 치적을 몇 가지로 추려보면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및 연병(鍊兵), 그리고 뛰어난 숭생중물(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한다. 교통의 발달을 꾀한 것이다,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기’의 일부 내용처럼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나 이때 치우천왕은 구야(九冶)라고 하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하였다고 한다. 제련산업 일으키고 기술부대 운용도 또한 작병이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길렀음을 뜻한다. 그리고 숭생중물이란 치우천왕의 치도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그야말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능력으로 제국의 앞날을 평탄케 하고자 땀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이겨레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동이겨레가 늘 외경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이 한족(漢族)인 공손헌원 즉 황제였다. 유망은 헌원에 비하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다. 헌원은 치우천왕의 무기제조까지 본받아 대항하려했다. 이전의 유망의 무리는 기껏해야 돌과 활이 무기의 전부였음을 비교해 보면 헌원 역시 대단했음은 인정할 만하다.

73전 73승
치우천황이 유망의 잔당을 물리치고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헌원이 또 화산족과 하족을 꼬드겨 군병을 모으고 무기를 개선하고는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이에 치우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았다. 당시의 서쪽의 하족이나 화산족은 활과 돌의 함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신무기에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패했다. 사기, 태평아람, 후한서 등 중국의 사서에서 '치우는 쇠를 캐내어 다섯 가지 병기(五兵)를 만들었고, 그것을 즐겨 사용했다' 는 기록을 남겼다. 도극대노(刀戟大弩)와 검극(劍戟), 투구(銅頭鐵額)를 만들었다고 소개함으로써 도, 검, 극, 대노, 투구의 다섯 가지 이상의 무기가 치우군이 사용한 병기였을 것이다. 또한 운급헌원기라는 책에는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 라고까지 썼을 정도이다. 치우천황은 더욱더 군대를 정비하여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 10년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치우천황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대는 물러설 줄 몰랐다. 헌원은 매번 지기만 하여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헌원 역시 군대를 재정비하고 치우천황의 신시를 본따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싸움터마다 출전하자 치우천황은 불같이 진노하여 형제와 휘하 장수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크게 떨치자 헌원은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였다. 그러다 치우천황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자 헌원은 지남거를 만들어 도망갈 길을 찾기에 바빴다. 여기서 적이지만 헌원의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지남거의 발명이다. 그러나 지남거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철수가 이뤄 지지 않자 헌원군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치우천왕이 몰아쳐 부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 할 정도의 전멸에 이르렀던 것이다.  헌원이 항복하자 치우는 헌원을 조선의 5제 벼슬 중 으뜸가는 벼슬인 황제(黃帝)로 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어떤 영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우천황의 품격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연전연승이라 해도 10여 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헌원을 중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예부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했는데 바로 이곳을 헌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동이겨레에 의해 지배받던 화하족과 그들의 영토가 중국인의 자치권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후 치우천황은 수도를 청구(지금의 산둥반도 일대)로 옮기고 그의 치세를 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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