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와 민주화 세력간의 대립이 부른 피의 학살

나이지리아 국기는 초록과 흰색으로 조합되어있다. 초록은 국토(농지)를, 가운데 흰색은 평화와 화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의미와는 달리 정권찬탈을 둘러싼 부족간 내분에 휩싸인 국토는 피로 물들었고 화합과 평화는 먼 이웃나라 얘기처럼 사분오열되어 갔다.


나이지리아는 아랍과 서부유럽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나이지리아 토착문화로부터 직접 생겨난 풍부하고도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유럽인(포르투갈인)이 처음으로 나이지리아 해안에 상륙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들은 베냉족을 노예로 잡아갔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 노예선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에 밀어닥치면서 대부분의 노예무역은 나이저 강 유역과 그 주변에 사는 여러 종족들을 상대로 행해졌다. 그러다가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폐지했으나, 다른 나라 선박들이 대서양을 통해 계속 그 맥을 이어갔다. 이에 아프리카 서부해안에 영국 함대가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저지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나이지리아의 내륙오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몇몇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61년에 라고스를 합병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는 1886년 별개의 영국 식민지로 출발해, 1914년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내전발발 원인

지구상에서 벌어진 거의대부분의 내전은 정권을 둘러싼 복잡 다양한 종족대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나이지리아역시 문화적·경제적으로 앞서 있던 동부주민 이보족(族)과, 보수적인 북부주민 하우사족(族) 사이의 대립이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령 카메룬을 분할 점령하고, 그 점령지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으로 하여 나이지리아와 함께 통치하였다. 그 무렵 남부에서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났으나, 그것은 이보족·요루바족 등의 부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남부에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나 북부에 파급되었다. 나이지리아는 1947년과 1951년 두 차례 헌법제정을 거쳐 1954년 3차 헌법에서 연방제가 확립되고, 1960년 10월, 연방 총리 직선과 형식적인 국가수반을 골자로 하는 연방헌법을 채택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듬해 주민투표에 의해 북부 카메룬을 병합하고, 1963년 10월 동부·서부·중서부·북부의 4개주(州)로 나뉜 연방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250여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종족구성으로 인해 해묵은 종족·지역 간의 대립과 지역간 교육적·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대두했다. 그 결과, 동부, 서부, 중서부, 북부 등 4개 지역의 자치주의와 연방주의의 대립이 차츰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무엇보다도 1964년의 연방선거 거부사태는 나이지리아를 붕괴직전까지 몰고 갔다. 마침내 1965년 10월의 부정선거로 서부지역이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일단의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발레와’ 연방 총리와 주 총리 2명을 살해하면서 연방정부를 전복시키고 군사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정정은 바야흐로 정권장악을 둘러싼 갈등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미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내전은 대학살로 이어져

쿠데타에 성공한‘이론시’는 이보족 출신이다. 이론시 소장이 이끄는 군사정부는 지역 권력을 해체하고 중앙집권정책을 시도했으나, 이는 북부지역에서 강력한 반(反)이보족 봉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이론시는 1966년 6월 암살되고, ‘야쿠부 고원’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권력을 장악했다. 고원 정권은 연방의 헌법상 장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려 했으나 1966년에 발생한 종족 대학살로 무산되었다. 하우사족과 이보족 사이의 무력충돌로 하우사족이 대부분인 북부지역에서 이보족 1만∼3만 명이 학살되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이보족 100만여 명이 이보족이 지배하는 동부지역으로 도망가는 참극이 벌어졌다. 1967년 1월 정국수습책의 일환으로‘오두메구 오주쿠’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이끄는 동부지역 대표들의 동의하에 중립국인 가나의 아부리에서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문에 대한 해석 차이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그해 5월 27일 동부지역 자문회의는 오주쿠에게 동부지역에'비아프라 공화국'을 수립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날 연방군사정부는 기존의 4개 지역(북부·동부·서부·중서부 지역)을 북부 6개 주, 동부 3개 주 등 12개 주로 분할하는 법률을 공포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5월 30일 오주쿠는 동부지역 3개 주의 연방을  탈퇴하고‘비아프라 공화국’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연방군사정부는 즉각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첫 교전은 7월 6일 벌어졌다. 비아프라 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원 정권은 처음에는 소위 '치안 활동'의 수준으로 대응했으나 몇 주 후부터는 전면전에 나섰다. 그해 8월 비아프라군은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티를 함락하고 라고스까지 진격하는 등 승전을 올렸다. 그러나 연방군은 비아프라군을 오레에서 저지하는 한편 에누구로 진격해 이보족의 심장부를 타격했다. 내전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비아프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한 채 완전 고립되었으나 정부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영국·소련은 연방 군사정권에 무기를 지원했고, 프랑스는 비아프라에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비아프라를 독립국으로 승인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중재도 받았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는 동안 비아프라 어린이들은 굶어 죽어 갔다.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를 내면서 2년 6개월 이상 계속된 비아프라 내전은, 1970년 1월 11일 오주쿠가 코트디부아르로 피신하고 1월 15일 비아프라 대표단이 라고스에서 공식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종식되었다. 1970년 1월까지 2년 반에 걸친 이 전쟁에서 이보족은 200만 명의 희생자를 냈고 전쟁 후에도 50만 명이상의 아사자(餓死者)를 내는 너무도 끔찍한 피의 아비규환을 겪고 말았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비아프라 내전이 딱 사흘 그친 적이 있다. 양측은 1969년 1월 사흘 동안만 휴전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전투를 벌이는 병사는 총살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유인즉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하러 브라질팀을 이끌고 온 펠레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부군은 펠레를 전투 접경지로 에스코트해 다리 중간에서 반군들과 만나게 해줬다. 축구경기가 끝나자 살육전은 다시 시작됐다.

내전 후 계속된 군부쿠데타

내전이 끝난 후 고원 군사정권은 황폐복구 및 옛 비아프라 지역주민의 처우 문제 등 국가 재건, 국민 재통합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976년으로 약속한 민정이양 일정을 연기하면서 권력의 유지를 꾀하다가‘무르탈라 모하메드’준장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한편 무르탈라 모하메드는 1976년 2월 암살되고, 올루세군 오바산조 중장이 권좌에 올랐다. 국가 재건과 국민 재통합의 과제를 떠맡은 오바산조는 1979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야당 후보 ‘샤가리’가 승리해 그해 10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2번째의 민간정부를 이끈 샤가리는 특히 원유가의 폭락으로 곤경을 겪었으나, 1983년 중반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샤가리 정부는 그해 12월‘모하메드 부하리’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군사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고 부하리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다시 1985년 8월‘이브라힘바방기다’가 일으킨 군사쿠데타(20년 만에 6번째 쿠데타임)로 전복되었다. 바방기다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경제개혁에 전념했으며, 1990년대 초까지 권력을 민간정부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1993년 1월 그는 최고권력기관인 군사통치위원회를 해산하고, 군부위주의 국가안보위원회와 민간각료회의를 포괄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 후보‘모슈드 아비올라’가 당선하자 국가안보위원회는 선거를 무효화했다. 이로 인해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됐고 와중에 바방기다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해 11월‘사니 아바차’장군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아비올라를 1994년 6월 국가반역죄로 투옥하는 한편, 1995년 11월에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저명한 극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켄 사로 위와’를 비롯한 인권운동가 9명에 대한 교수형을 감행했다. 1997년 3월에는 아프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망명 작가 올레 소잉카 등 반정부인사 15명을 반역죄로 기소하는 등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민주화운동을 줄곧 탄압했다. 그러던 아바차가 199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뒤를이어 아바차의 오른팔인‘압둘살람 아부바카르’군참모총장이 권력을 장악하고 '1999년 5월 29일 민정이양'을 골자로 한 민주화 일정을 제시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투옥된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지방선거와 주 총리 선거, 총선이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이 대통령선거에서 과거 군사정권의 수반을 역임하고 군부독재를 비판해 아바차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은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승리를 거뒀다. 이로서 나이지리아는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전기를 맞이했고 오바산조는 제4공화국의 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니 그가 현재 나이지리아연방정부를 이끄는 대통령이다.

치유되지 않는 종족간 관습

나이지리아는 1999년5월, 오바산조 대통령 취임으로 군부통치를 끝내고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나, 나이지리아의 고질적인 종족분쟁이 종교·경제문제와 결합하여 내분이 끓이지 않았다. 특히 북부의 하우사족이 장기간의 부정부패 및 무질서를 척결하기 위해 강력한 회교율법을 시행하려하자, 남부지역 출신의 기독교계 요루바족 및 이보족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종교폭력사태가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남부지역에서는 북부지역에서 회교계가 기독교계를 박해한다는 이유로, 기독교계에 의한 역 박해가 자행되고 있어 종교분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바산조 대통령은 회교율법 시행을 반대하고 있으나, 종교분쟁 속에서도 북부지역의 지방정부들이 연이어 회교율법의 도입을 강행하고 있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북부지역은 정치적 부패와 공공연한 강도행위를 강력히 처벌하기 위해 회교율법을 채택하고 있어, 회교율법 시행에 의한 북부지역의 질서회복의 가능성도 있으나, 종교분쟁으로 연결된 종족분쟁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오바산조 대통령의 군대개혁 및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 만성화된 부정부패로 국가, 특히 경찰조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함에 따라 지역정부는 자경단(vigilant group)을 지원하며 치안유지를 꾀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들의 횡포로 인해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수백여개의 부족이 공존하는 나이지리아에 부족간의 관습적인 갈등(농경민과 유목민)은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있고 이에 더해 회교율법의 시행으로 기독교 대 회교간의 갈등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또한 남부 유전지대에서 발생하는 석유수익의 분배문제를 둘러싼 지방정부간의 갈등도 쉽게 해결점을 못 찾고 있고 만성적인 사회부패 및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 시행하는 회교율법이 오히려 또 다른 분쟁의 소지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해결방안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방정부는 군대를 강화시켜 질서회복에 총력을 기울이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이를 통한 질서회복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나이지리아에서는 1960년 독립이후 1998년까지 38년간의 헌정사에서 7번의 쿠데타와 역쿠데타가 발발하는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했었다. 30년간의 오랜 군부독재와 짧은 기간의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민간통치가 번갈아 가며 계속되어 온 나이지리아는 20세기 말까지도 정정 불안과 종족·종교 간의 반목 외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구와 정부의 만성적인 부패, 1970년대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을 낭비함으로써 빚어진 과다한 외채 부담, 기대 이하의 경제성장 등, 복잡한 문제에 신음했다. 나이지리아는 하루 24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다. 아프리카의 맹주로 떠오른 21세기의 나이지리아의 모습,   그 검은 대륙의 내일은 평화스런 모습일까.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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