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피플=이남진 기자] 권력과 친분을 바탕으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 게이트’는 민주주의를 통째로 흔드는 헌정 초유의 사태다. 시민들은 국민이 모르는 강남의 한 아줌마가 대통령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이게 나라냐’라는 조소는 국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난맥상은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국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 정치를 우려하게 된 현실을 짚어본다. (이 기사는 월간지 시사뉴스피플 12월호에 실렸습니다.)

열심히 사는 게 의미 없구나!

# 아침 7시. 미생(未生)의 하루가 시작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한다. 옷을 갖춰 입고 나오면 8시. 숨 막히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 지하철로 향한다. 터질 듯 밀고 밀리는 인파를 헤치고 나오며 고단한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미생은 또다시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집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킨다. 온통 ‘최순실 게이트’로 가득한 뉴스를 보면서 지루함을 느끼며 다시 내일 하루를 기약한다. “누군 대통령 믿고. 온갖 사치를 누렸다는데…” 당장 내일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그는 잠을 청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야말로 ‘헬조선(hell·朝鮮)’이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지옥’에 비유한 이 단어는 한국의 옛 명칭인 조선에 지옥이란 뜻의 접두어 헬(Hell)을 붙인 합성어다. 한마디로,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말이다. 수십 년간 경제의 급성장을 몸소 체험한 윗세대와 달리, 젊은 층은 현재까지 경제가 멈춰있거나 후퇴한 경험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사회에 대한 분노는 젊은층에서 더욱 거세다. 30대 이하 실업률은 전체의 평균 실업률의 2배 이상이다.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태반이다. 아니 좋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더라도 턱없이 높은 집값에 대출로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난 11월12일 광화문 광장의 밤을 물들인 100만개의 촛불은 헬조선의 ‘성난 민심’을 눈으로 확인하게 했다. 비선(秘線)에 의한 국정 농단으로 헌정을 파괴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드높았다. 특히 20, 30대 젊은이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 여론조사(한국갤럽, 11월2째 주)에서도 20대 연령층 ‘0%’, 30대 연령층 ‘3%’라는 수치로 오롯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정치외교)는 “20대들이 희망을 찾기 어려워 분노하고 있다”며 “때가 덜 묻고 정의감이 있는 이들이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의 판단에 의구심을 가질 만큼 신뢰를 잃었다”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고 했지만, 정작 지금 비정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갓 성인이 된 20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헬조선의 그림자로 얼룩진 어두침침한 앞날에 처해지는 현실이다. 높은 취업의 장벽에 좌절감을 맛보면서 어른이 되는 셈이다. 이런 현실에서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라고 일컬어지는 최순실이라는 대통령의 40년 지기 친구는, 그의 영향력을 이용해 딸 정유라를 위해 모든 특혜를 제공했다. 같은 세대의 또래가 겪어야하는 험난한 길을 모두 뛰어넘어 각종 특혜를 받으며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대기업들의 지원으로 개인 승마 훈련소를 차려놓고 사치와 호화로움을 누렸다는 사실은 헬조선의 현실에 좌절하는 젊은 층에게 감내하기 힘든 박탈감을 촉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 국민이 힘을 모았고 두 자릿수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그 힘들다는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전설을 남긴 박정희의 후광을 등에 입은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60대 이상 노인층으로부터는 10%대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현재 5%의 지지율로 역대 대통령 최저치를 나타냈다. 당초 그가 공약했던 ‘경제의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고 국민적 대혼란만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헬조선’은 이제 넋두리가 아닌 현실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신나는 K팝 뮤직, IT기술은 허울 좋은 가식으로 느껴질 뿐 정략적으로 주판을 두드리는 정치나 한자리로 뒷걸음치는 경제를 보면 실낱같은 희망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변되는 경제적 양극화는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 놨다. 우리사회의 현 단면은 각종 통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무역협회가 10월18일 내놓은 통계자료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삶의 질은 세계 47위에 그쳤다. 1~10점 척도로 구분한 삶의 질 지수는 4.95점으로 전년의 40위보다 7계단 떨어진 것이다. 미국(8.26점·18위)이나 일본(8.11점·20위)은 물론 중국(5.26점·45위)보다도 낮은 순위다.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위스(9.83점)였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7195달러로, 세계 32위임에도 삶의 질이 거기에 미치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높은 노동강도와 실업률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노동시간(2015년 기준)은 2113시간으로 세계 3위다. 실업률은 3.6%로 14위를 기록했다. 반면 경제성장률은 2.6%로 104위에 불과했다.

일자리는 적고 그나마 근로자는 세계 어떤 나라보다 오랜 시간 일하지만, 경제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니 살림살이가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각국의 2014년 출산율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산율은 1.21명으로 최하위다. 우리나라는 2001년 출산율이 1.3명 아래인 ‘초저출산 사회’로 진입한 이후 한 번도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OECD 회원국 중 초저출산 현상을 경험한 10여개국 가운에 단 한 번도 탈출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통계청이 최근 내놓은 ‘2016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헬조선’의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우리나라 출생아 수다. 제2차 ‘베이비부머’ 세대인 1970년생은 출생 당시 100만7000명이었지만 2015년생은 43만 8000명이다. 사실 결혼 자체가 부담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51.9%에 불과하다. 지난 2010년에는 64.7%, 2014년에는 56.8%였다. 결혼은 부담이지만 동거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이는 48%에 달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녀 출산에 대해서는 75.8%가 반대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대학 교육 이상의 학력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이런 탓에 10대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을 해 본 10대 중 48.1%가 그 이유로 성적, 진학문제를 꼽았다. 20대 중 52.5%는 자살충동 요인을 경제적 어려움과 직장문제라고 답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비중은 58%에 달한다. 취업은 어렵고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이 점차 줄면서 20대들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젊은이들이 취업의 높은 문턱에서 좌절감을 느끼면서 부모를 부양하는 사람도 줄어 부모들도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부모들 스스로 생활비를 해결하는 비율은 52.6%로 2년 전보다 2.4%포인트 증가했다. 이와 함께 부모 생활비를 자녀가 대주는 경우도 4년 전에 비해 3.3%포인트 줄었다. 특히 부모 부양은 가족이 돌봐야 한다는 인식은 30.8%로 8년 전 조사 때보다 10%포인트나 줄어들었다.

능력 없으면 부모를 원망하라고?

당장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한 ‘헬조선’의 시민들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셈이다. 부모세대는 그들이 살았던 60, 70년대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80년대 민주화를 목격했다. 그러나 현 세대는 단지 어두운 현실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금수저’로 대변되는 일부 특권층은 온갖 특혜를 받으며 대기업의 좋은 직장에서 높은 샐러리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흙수저’는 진흙탕 속을 맴돌며 간간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절박한 당시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국민들은 부채를 갚아야 한다며 너나 나나 집에 있는 금을 들고 나와 ‘금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희망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라의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내놓는 자발적인 희생정신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었다. 전국 351만여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 시가로 약 21억3000달러(약 2조3000억원)에 상당하는 금이었다. 국가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국민이었다. 이후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가정, 희망을 잃었다. 문제는 그 좌절이 다시 잃어 설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장벽’에 의해 고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앳된 여학생의 목소리가 광화문 촛불의 행렬 속에 힘차게 울려 퍼진다. 촛불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지방의 한 여고 학생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민주주의 국가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자명한 원칙이 무너졌다.” 이들의 외침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평선고 1학년 이보영(17)양은 “흔히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한다. 주변 친구들은 ‘난 이민갈거야’ ‘내 자식은 여기(대한민국)에서 키우지 않을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 선거권도 없는 이들의 ‘분노’는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정학하게 꿰뚫는다.

‘흙수저’ ‘금수저’ 논리에 젊은이들은 이 좌절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암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헬조선’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보루마저 흔들린 셈이다. ‘금수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면 이정도로 분노하진 않을 듯 싶다. ‘출발선’이 다르더라도 노력이 더해져 성과를 낼 경우 인정하는 게 당연하지만, ‘결과’까지 규정 지어버리는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평등의 원칙까지 위협하는 이유다.

대통령과의 친분을 배경으로 최씨 일가와 측근들이 행사한 권력은 정·재계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일상적인 영역에서까지 침범했다. 이른바 ‘갑(甲)질’이라는 단어로 함축된 사회 곳곳의 부조리까지 건드리고 있다. 정유라가 청담고등학교를 단 17일 출석하고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로 드러난 교육 당국의 엉터리 학사관리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했다.

정유라가 2년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적은 속내가 그렇잖아도 답답한 현실 속에 갇혀있던 민심에 불을 지폈다. ‘기회의 평등’이 무너지고 새로운 신분제도가 고착화한다는 불안감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정의를 흔들어 댄다.

‘기회의 평등’은 어디로…근대사회 ‘능력주의’ 붕괴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제도와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신뢰가 최순실·정유라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졌다”며 “근대사회 이후 계속된 능력주의나 노력주의가 흔들리고 카스트, 신분사회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특권층에게 기회가 독점되거나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으면 안 된다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이 원칙이 송두리째 뽑히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1972년 미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미 유력지 워싱턴포스트(WP)는 ‘최순실 게이트’가 워터게이트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라고 했다. WP는 스티븐 해거드 UC샌디에이고 한국학 교수를 인용하며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 “워터게이트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라고 전했다. 해거드 교수는 “국가기밀 유출, 재단 불법 모금, 대학 특혜 등 6건에 이르는 별개 사건의 불법이 유력하다”며 “수많은 일련의 법 위반이 자행됐다”며 이 같이 분석했다.

신문은 또 “30여 년 전 군사정권 시절과 비견될 정도로 규모가 컸던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를 계기로 박 대통령이 퇴진할 가능성이 커졌다”며 “리스크 분석 정치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은 박대통령의 퇴진 가능성을 70%까지 예측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첫 문민정부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취임하면서 한국병을 치유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치 부패는 더욱 고질화하고 있다”며 “부패와 뇌물, 횡령, 권력 남용 등 한국의 고질병이 박근혜 대통령을 옭아매고 있다”고 지적했다.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를 적절하게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국민이 각자의 삶에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만족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거기에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난국의 해법이 있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해 촛불을 들지 않게 만드는 사회다. 각자 다양한 삶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회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걱정하며 사람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사회가 아니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절망적인 사회를 살아온 청년들은 분노하고 있다. 학생들은 “공부하면 뭐 하나?” 구직자들은 “흙수저라 취직 안 된다” 직장인들은 “일해서 낸 세금 최순실 복채에 쓰였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당장 한두 사람 처벌하고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제왕적 정치 권력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공화국은 왕을 두지 않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원수가 있을 뿐이다. 분노한 민심은 더 이상 그 원수가 그들을 대변하지 않고 있다며 ‘변화’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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