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는 용 ? 추락하는 이무기
근초고왕과 고국원왕



같은 영웅의 기상과 자질을 타고 났으나 한쪽은 계속 불운만 만나게 되고 한쪽은 도모하는 일마다 성취를 거듭하니 운칠기삼(運七氣三), 역시 세상의 이치 중의 하나임은 틀림이 없는가 보다. 그러나 운명은 돌고 도는 것, 당대의 성공과 실패는 두 세대 후에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윤 양 래 기자

영웅의 아들
미천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중국은 혼란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중원을 통일했던 진나라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왕족들의 세력 다툼이 아주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정권 다툼은 '팔왕의 난'이라 불렸는데 1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진이 이렇듯 팔왕의 난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반란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 진 주변에 소수민족들이 세운 나라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316년에 이르러 진은 몰락하고 5호 16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중국의 분열은 고구려에게는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미천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미천왕은 후조 등과 화친을 맺으면서 국가를 안정시켰다. 302년에는 미천왕이 직접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에 이주시켰다.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313년에는 낙랑군을, 314년에는 남쪽으로 가서 대방군을 점령하였으며 316년에는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한반도에서 한군현을 몰아내자 이것을 계기로 비로소 형제국 백제와 국경을 맞대게 되어 갈등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에게 가장 위협을 주는 적은 모용외가 이끄는 선비족 모용부였다. 모용부는 위나라 때부터 하북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여를 몰락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하였고 위나라 세력을 약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봉상왕 때는 여러 번에 걸쳐서 고구려를 위협했었다. 미천왕은 모용부를 적극 견제하는 정책을 썼다.  4세기 초 모용부가 요동 지방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모용부와 싸우게 되었다.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역시 선비족의 일파인 단부, 우문부와 더불어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뒤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자 더욱 긴장이 심해졌다.  319년 고구려의 장군 여노자가 모용부의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고구려는 요동을 자주 공격하여 밀고 밀리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330년에는 후조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용부를 견제하고자 노력했다.  미천왕은 수시로 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후조등과 친교를 맺으며 고구려의 안정을 유지하기에 힘쓰다가 331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정세를 날카롭게 꿰뚫어 그 허를 찔러 선조들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미천왕의 꿈은 모용부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외교적 노력으로 안정을 꾀했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추측케 하는 것이 미천왕 15년에 태자로 등극한 고국원왕의 이름을 쇠(釗)라고 지은 것만 보고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즉 자신과 달리 좌절을 모르는 강철같이 투철한 의지의 소유자로서 아들을 키우고 싶었고 또 그 아들이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뤄 주기를 바랐던 염원이 담긴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불행한 영웅
고국원왕의 일생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영웅적인 미천왕의 한군현 완전 축출이라는 대업에도 불구하고 이후 벌어진 모용부와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인해 국고는 바닥이 났고 일진일퇴의 전투 속에서 백성들의 사기는 바닥을 맴돌았다. 더욱이나 고국원왕 12년(342년) 모용황의 침략 당시 고국원왕이 대패하여 필마단기로 달아나자 환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대비인 주(周)씨와 비빈을 비롯한 왕족들이 모두 포로로 잡히고 환도성 내 남녀 5만여명 역시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고구려의 주력 부대가 달려왔으므로 모용황은 고국원왕을 더 추격할 수 없었다. 이에 왕궁을 불사르고 성벽을 허문 다음 포로를 이끌고 회군하려는데 좌장사(左長史) 한수라는 자가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하였다. “고구려 땅은 군대를 남겨 지킬 수 없는데 이제 그 임금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하나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을 터이니 대군이 가고 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그 남은 불씨를 거둬들여서 아마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 부왕의 시신을 싣고 생모를 잡아가두어 돌아가서 그(왕)가 스스로 몸을 묶고 귀순해 오면 되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십시오.”  이에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선왕인 미천왕릉을 발굴하여 그 시신을 싣고 미천왕비인 대비 주씨를 비롯한 비빈과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 급히 회군해 돌아갔다. 이로부터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야만적이고 비겁한 전술에 밀려 모용황과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저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국원왕은 13년(343) 2월에 왕제(王弟)를 연나라(모용부가 세운 나라)에 보내 신하를 일컫는 수모를 참아내며 부왕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러나 모후는 끝내 풀어주지 않아 주대비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모용황이 죽고 그 아들 모용준(儁)이 등극하여 수도를 계로 옮기고 황제를 일컬은 지(352년) 3년이 지난 뒤인 고국원왕 25년(355)에야 주대비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결국 원수도 갚지도 못하고 전진에 의해 모용부가 망하는 것(370년)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왕이었다. 이로 인해 웅혼한 고구려인의 기상은 바닥을 맴돌았고 국고는 피폐하기만 했다.

떠오르는 영웅
백제사를 통틀어 근초고왕만큼 눈에 띄는 인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 백제는 북방의 강성대국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도하고 남쪽으로 가야를 지나 멀리 왜와 통했을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중원대륙의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함으로써 동방의 강국으로서의 위세를 안팎으로 떨쳤다. 따라서 왕에게는 '대백제의 건설자'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근초고왕은 비류왕(304∼344)의 둘째 왕자이지만 체격이 웅대하고 식견이 깊고 뛰어나 계왕( 344∼346)의 뒤를 이어 백제 제13대 왕이 됐다는 게 삼국사기가 전하는 그의 초기 행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장자상속(長子相續)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왕권을 장악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근초고왕 이전 백제가 처해 있던 대내외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안으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북쪽으로 영토확장에 나섰던 책계왕(286∼298)과 분서왕(298∼304)이 중국 군현세력에게 암살당했는가 하면 분서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국가적으로 고이왕(234∼286)대 이래 발전해온 고대국가 백제의 시련이었고, 정치적으로는 고이왕계의 후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등장한 집단이 근초고왕의 부왕인 비류왕 세력으로서, 비류왕은 고이왕계와는 구분되는 방계왕족인 초고왕(166∼214)계를 자처했다. 그 밑바닥에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생생히 굽이치고 있었다. 비류왕 때는 한반도에서 한군현(漢郡縣) 세력이 마지막으로 축출된 시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한군현 세력의 최후 거점인 낙랑군을 쫓아냄으로써 백제와 고구려는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서 국경을 맞대게 됐다. 현대의 군사전략적인 개념에서 말하면 이른바 완충지대(buffer zone)가 없어진 셈이다. 한 마디로 고구려와의 충돌은 국가생존 차원에서 피할 수 없었다. 근초고왕의 시대는 바로 이 같은 정세 속에 개막됐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며 5부에 지방 행정관을 파견하는 등 내부역량을 튼튼히 했다. 이 시기에는 전쟁보다는 화평정책에 주력해 신라와의 동맹체제, 즉 나제(羅濟)동맹의 기틀을 닦았고 동진과는 조공관계를 맺어 외부역량을 키워나갔다. 근초고왕의 치적은 정복전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박사 왕인(王人)과 아직기(阿直岐)를 일본에 파송해 천자문을 전하고,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역사책인「서기」를 편찬하게 하는 등 고대국가 경영자로서의 탁월한 식견과 역량을 과시했다. 근초고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한 인물이었다. 고이왕대에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그 뒤 몇 번에 걸쳐 직계와 방계사이의 왕위교체 이후 근초고왕 대에 와서 직계인 초고계(肖古系)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왕명(王命)이 초고왕과 구수왕의 왕명에 근(近)자 를 관(冠)하여 이루어진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초고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한 근초고왕은 당시 대표적인 귀족세력인 진씨(眞氏)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아신왕대까지 진씨 왕비족 시대를 열게 되었다. 왕귄을 강화시킨 근초고왕은 지방통치조직으로서의 담로제(擔魯制)를 실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이처럼 내적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은 현실을 잘 극복해나가는 한편 연거푸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우호의 뜻으로 말을 바치면서 환심을 샀다. 대외 정복 활동을 위한 포석으로서 신라에 환심을 사기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백제의 이와 같은 행위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신라와의 동맹을 맺어 북쪽의 강국 고구려를 견제하고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라와의 화친이라는 제스처를 취하였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 백제 단독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시 예상되는 신라의 침입을 막아보자는 생각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고국원왕이 369년(근초고왕 24) 가을,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이끌고 치양(현재의 황해도 백천)으로 쳐들어 왔다.






세 번의 전투, 엇갈린 명암
고구려군은 2만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 대군을 맞아 수성(守城)을 한 것이 아니라 태자 휘수(근수구왕)가 직접 5천의 군사로 고구려군을 요격(邀擊)한다. 고구려 진영에서 사기(斯紀)라는 자가 은밀히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이 자는 근초고왕이 이날을 대비하여 고구려군에 침투시켜 놓은 고정간첩이었던 것이다. 사기가 전한다. “고구려 군사는 수는 많으나 오합지졸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하며 그중 제일 강한 군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이니 그 부대를 먼저 공격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 부대는 고구려군의 최정예 고국원왕의 근위부대였던 것이다. 이에 태자 휘수가 붉은 깃발의 부대만을 집중 공격하여 적병 5천여명의 머리를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사기의 말대로 고구려군은 흩어지고 내빼기에 바빴다. 백제군의 대승이었다. 여기서 태자는 단순한 태자가 아닌 근초고왕이 수행한 대외 정복전쟁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에 앞장섬으로써 부왕 사후 백제의 극성기(極盛期)를 열 수 있었다. 고구려와의 첫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근초고왕은 같은 해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했다. 근초고왕은 이 열병식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남정북벌을 선언한 것이다. 고구려와의 두 번째 전쟁은 371년(근초고왕 26년) 봄에 불붙는다. 당시 고국원왕은 2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대병력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해 온다. 고구려의 침공 소식을 들은 근초고왕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북상해 패하(예성강) 유역에 매복해 있다가 고구려군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삼국 간 전쟁에서 보기 드물게 나타나는 복병전을 통해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섬멸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후로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공세수위가 아닌 수세적 입장으로 돌변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의 후연에 대한 견제를 위해 국경지대의 병력을 뺄 수도 없는 긴박한 처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백제에 대비한 수도방위군은 약할대로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서기 369년 과 371년 봄의 두차례의 전투에서 백제군은 고구려의 수도방어망을 철저하게 분쇄시켰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371년 9월 마침내 근초고왕은 아들 휘수태자와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아닌 요동지역에 있는 평양이다.(실제 고구려가 평안도 평양으로 옮긴 것은 서기 427년 장수왕 때임.) 이때 동원된 백제군은 대륙백제군과 백제수군, 한반도 백제군 등 3만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이 전쟁은 백제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이미 이때의  백제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훨씬 더 컸다. 당시 중국의 사서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백제의 실제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더 큰 세력이었고, 전병력이 30만에서 40만에 달하고 있었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백제가 강성기 때는 30만대군을 동원하였다고 하여 고구려의 국력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고구려군은 수도 방어망이 다 깨져서 평양성의 얼마 되지 않은 군대로 백제군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백제의 3만대군과 싸울 수 있는 고구려군은 1만도 채 안되었다. 이런 열악한 전력으로 버티다가 고구려군은 지리멸렬되고, 고국원왕은 371년 10월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절명한다. 이 소식을 접한 만주국경의 태자 구부가 다급하게 8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태자 구부(소수림왕)는 만주의 국경지대에서 후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만주국경지대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평양이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이 소식을 접한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거의 다 점령해 놓고도 철군을 결정하게 되는데 태자 구부의 8만대군만 전멸시키면 고구려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음에도 고구려의 저력을 지나치게 의식한 그는 삼국통일의 결정적 찬스를 잃게 된다.

결정적인 찬스를 잃은 백제는 불과 20년 후에는 광개토태왕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진사왕(385∼392)이 항복하고 개로왕(455∼475)이 고구려군에 사로잡혀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대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만다.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광개토대왕의 호태왕비에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한 데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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