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길에서 문화도시로
성남문화예술회관 개관을 통해서 본 성남시

36년 전 개발독재 정치가 정점에 이를 무렵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던 무허가 판자촌의 주민들을 위한 새로운 삶터, 성남이 급조 되었다. 당시 이들을 따라 왔던 은막의 스타가 있었으니 그가 이대엽시장이다.

특별취재반

그만이 안다
잘나가던 그가 왜, 굳이 철거민들과 같이 이주했을까? 여기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국외자들과 같이 하려 했다는 것이다.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건강한 몸 하나만을 믿고 지방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 와 겨우 겨우 움막 같은 터전을 일구고 명줄 하나 부지하기에도 힘들었던 이들에게 또 다시 불모지로의 강제이주는 사형선고에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수라장에 그가 동참했다. 하여 최하류층의 서민과 호흡을 같이하며 지냈고 이런 그를 성남 시민들은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줬다. 마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최고학부까지 나온 그가 성남을 고향으로 여기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원주민이 이대엽을 원주민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이후 몇 차례의 격변기를 거쳤음에도 그는 성남에서만 3선을 기록한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호적까지도 바꾸어 버리는 정치판에서 이례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문화 불모지에 깃발을 꽂다
1989년 성남에 새로운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분당 신도시 발표가 그것이다. 이후 성남은 남과 북의 대치 상황처럼 도시가 반으로 나뉜다. 같은 이주민들임에는 전혀 다름이 없는데 이들은 출신이 달랐다. 철거민과 강남에 생활근거를 둔 중산층.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빼내어 버리는 형국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도시가 갈라질 가능성 또한 없지 않았다. 여기에 그가 해법을 제시했다. 국제적인 문화예술회관이 바로 그것이다. 광역시에서도 어려운 대역사(大役事)를 인구 100만의 기초자치단체장인 그가 해 낸 것이다. 하여 분당예술회관이 아니라 성남예술회관이라 명명하고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를 망라한 명실상부한 성남시민 전체의 문화적인 자존심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일구어 냈다. 동일한 문화적 토양이라는 인식을 성남문화예술회관을 통해 이루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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