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피플=이남진 기자] 여의도 정치판이 ‘탄핵정국(彈劾政局)’에서 ‘개헌정국(改憲政局)’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개헌’은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회자되고 있다. 독재와 쿠데타 등으로 얼룩졌던 우리나라의 헌법은 어두운 과거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독재시절 개헌은 정권의 연장과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만큼 개헌이란 화두가 정치권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산물로 변질되기 쉽다는 것이다. 권력이 한곳에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엄청난 부정부패를 묵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적 악순환의 원천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를 줄이거나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에 유력한 대권후보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지다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불행하게도 임기 중 친인척 비리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인데도, 이를 바로잡는 개헌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절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30년 만에 국회에서 합의된 ‘개헌특위’

여야 3당이 합의하면서 30년 만에 개헌특위가 닻을 올리게 됐다. 개헌을 위한 논의의 테이블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과정에서 험로가 예상된다. “지금 우리 국민과 역사의 명령은 낡은 틀, 낡은 제도, 낡은 시스템과 결별하라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무소불위 권한을 없애고 주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대표적인 개헌론자로 꼽히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손학규 전 대표의 개헌론에 김종인 전 대표, 김부겸 의원 등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 비문재인계로 분류되는 박영선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개헌, 올 것이 왔다. 예상보다 당겨진 느낌”이라며 “1인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시대는 바꿔야 하기에 개헌은 시대적 과제”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여권 개헌론의 선봉에 선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도 “대통령 5년 단임제 하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또 다른 최순실 사태가 생긴다”며 개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통치 원리다. 영국과 같은 불문헌법 국가에선 ‘법전’이란 눈에 띠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법전으로 기록돼 있다. 시대정신과 이념을 반영해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최고법이다. 우리나라는 총 9번의 개헌이 있었다. 미국의 수정헌법이 국민 기본권의 확장을 포함하는 내용이라면,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는 유독 독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발췌개헌’으로 불린 1952년 7월 7일 1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것이었다. 국회의원 간선제에서 국민 직선제로 바꿨고 이승만은 첫 직선제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인 2차 개헌에서는 이승만 정권 연장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했다. 이승만은 1956년 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헌 속에 숨은 권력욕

내각책임제 개헌인 1960년 6월 15일 3차 개헌은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로 개헌이 이뤄졌다. 이렇게 수립된 장면 내각은 1960년 11월 29일 4차 개헌인 소급입법 개헌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역사상 대통령 등 지도자 선출 방식과 무관하게 이뤄진 개헌이었다. 당시 3.15 부정선거 관련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해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쿠데타로 무너지고 박정희가 장악한 정권은 대통령 중심제로 복귀시키기 위해 1962년 12월 26일 5차 개헌을 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 발췌개헌안 통과시킨 지방대표들을 접견하고 연설하는 모습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를 4년 중임에서 3기 연임이 가능하도록 1969년 10월 21일 3선 개헌을 시행했다.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이 일요일 새벽에 국회 별관에서 2분만에 변칙 통과시켰다. 곧바로 1972년 12월 27일 7차 개헌인 유신개헌은 국회를 해산시키고 대통령 권한을 강화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1979년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전두환은 또다시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1980년 10월 27일 8차 개헌을 감행해 대통령 간선제를 단행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국민 직접선거를 관찰시킨 1987년 10월 29일 9차 개헌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직접선거를 통해 노태우를 13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헌법의 본질적 내용이 바뀌면 공화국으로 구분한다. 우리는 1987년 이뤄진 9차 개헌을 기점으로 제 6공화국에 속해 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여섯 명의 대통령이 거쳐 가며 30년 간 유지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집권 4년차에 ‘최순실 게이트’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것처럼, 역대 대통령 모두 임기 말 국정 실패 또는 측근 비리로 고개를 숙이는 불명예를 낳았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거론되는 ‘개헌’의 방향은 몇 가지로 나뉜다.

박정희 대통령 개헌에 관한 특별 담화문 발표

거론되는 개헌의 방향은?

먼저 미국과 같은 4년 중임 대통령제가 꼽힌다. 4년 중임제는 현 임기에서 1년이 줄어든다. 그러나 국민의 신임을 얻으면 4년 더 집권할 수 있다. 연임을 위해 대통령 스스로 더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점이 장점이다. 5년 단임 대통령은 다시 선거에 나설 수 없다보니 언론이나 국민의 신임을 얻기보다는 ‘제왕’이 될 수밖에 없다. 긴 안목에서 중장기 국가사업을 펴기보다는 단기간 반짝하는 사업에 몰두하게 되고 결국 이를 중심으로 부정부패도 발생할 개연성이 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4년 중임제도 단점이 있다. 이른 시간 인기를 잃은 대통령은 집권 3년차부터 레임덕에 시달리다 물러나야 한다.

또 다른 개헌의 방향으로 의원내각제가 있다. 주로 국왕이 존재하는 영국이나 일본 등에서 상징적인 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내각을 책임지는 형태다. 내각제 국가에서 법정 임기는 의미가 없다. 총리는 지지율이 높을 때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러 정당 기반을 더 강화할 수 있다. 의회의 든든한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지율이 하락하면 임기 초반이라도 사퇴하게 돼 정치적 변동성이 크다는 게 단점이다. 여론 반응도는 대통령제보다 훨씬 높아 민심이 변하면 권력구조가 신속하게 재편돼 대의제를 극대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제2공화국 때 내각제를 도입했지만, 집권 내내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됐고 결국 쿠데타로 무너졌다. 당시 집권 민주당 내 신·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계파 나눠 먹기 차원의 개각이 빈번했다. 계파 이익이 개각의 주된 기준이 되면서 정치 안정을 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특히 극한 대치를 벌이는 우리 정치 풍토로 볼 때 내각제를 도입하면 내각 총사퇴와 국회 해산이 일상화할 우려도 있다.

대통령과 책임총리를 2개의 중심축으로 한 이원집정제도 거론된다. 외치(外治)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담당하고 내치(內治)는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이원집정부제다. 박근혜 대통령이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국회에서 한 때 거론되던 형태이기도 하다. 과거 제2공화국 내각제 때 이원집정부제의 요소가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공존한 것이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사이에 분쟁이 빚어지면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내각제 하 국군통수권을 두고 총리와 대통령의 마찰이 발생했고 이런 갈등이 결국 5·16 군사정변의 빌미가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손익계산 따지는 정치권의 이해관계

정치권은 최근 개헌특위에 합의하면서 그간 논의되던 개헌 시나리오에 현실화에 무게감이 실리게 됐다. 개헌파들의 이합집산도 속도감 있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개헌에 반대하는 문재인 전 대표와 선긋기에 나선 반(反)문재인 계파가 개헌을 매개로 정파 간 연대를 모색하는 방안도 대두되고 있다. 현재 여권에선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해 나경원, 정병국 의원 등 현역의원 40명이 참여하는 개헌추진회의가 개헌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중도계파를 형성한 정진석 의원 등도 개헌에 적극적인 입장이고, 새누리당 이정현 전 대표 또한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닌 분권형으로 권력구조 개편 필요성을 피력했다. 야권에서는 김종인 전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차기대통령 임기 단축과 함께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김부겸 의원도 분권형 권력구조 개편을 주장하고 있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독일식 의원내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개헌 전도사’로 불렸던 이재오 전 의원과 정의화 전 국회의장, 탈당한 남경필 경기지사까지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를 위한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이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도 임기 말 개헌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유야무야(有耶無耶)됐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조기대선이 이뤄질 경우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등 야권 대권주자들은 개헌에 거리를 두는 모양새다. 이들은 차기정권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에서 임기단축 등 불리한 카드를 피하려는 의도다.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는 “개헌은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지금 개헌을 하면 모든 문제를 법적, 제도적으로 완전히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데 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가 반대하고 있다”며 “문 전 대표가 개헌하자고만 하면 2~3개월이면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직 국내 정치에 몸담고 있진 않지만 유력 대권주자의 한 명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측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개헌에 반대하는 문재인 전 대표와 명확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여야를 아우르며 ‘개헌파’와 ‘호헌파’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제3지대론 급부상

개헌에 대한 여야의 손익계산이 분주한 가운데, 여야 비주류 세력과 손학규 전 대표를 비롯한 이른바 ‘제3지대’ 인사들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할 조짐이다. 권력 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정계개편을 꾀하는 것이다. 여야 정치권과 국민 상당수가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구심점으로 하고 있다. 실제 지난 12월20일 중앙일보-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는 개헌에 찬성한 응답자 비율이 71.1%로, 반대 비율(20.4%)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람직한 권력 구조로는 38.5%가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줄이고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대통령 중임제’를 꼽았다. 대통령은 국방·외교 등을, 총리는 사회·경제 등 내치를 하는 ‘권력분산형 대통령제’는 33.9%,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하고 총리가 모든 권한을 갖고 국회 해산도 할 수 있는 ‘내각책임제’는 13.0%로 나타났다. 또 최근 리얼미터 조사결과에 따르면 개헌 찬성 여론이 41.8%로 우세했다. 반대는 38.8%였다.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대통령 4년 중임제가 33.5%, 분권형 대통령제 28.3%였고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14.2%로 나타났다. 국민의 다수가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민 더민주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개헌을 연결고리로 한 제3지대 연대와 관련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항하는 정치그룹, 새누리당의 이른바 비박 그리고 국민의당 이렇게 연대할 수 있다. ‘연대의 정치’는 약자들이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의 하나로서 본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처럼 친문 진영이 의도적으로 ‘박근혜 개헌’에 대한 찬반 프레임을 형성해 개헌을 무산시킬 경우,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제3지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쏠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달 국회에서 열린 개헌추진회의에서 김종인 전 대표는 “현실에서 누누이 제왕적 대통령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촛불 집회에서 보는 것처럼 국민의 역량도 엄청나게 성숙했고 정치권도 그만큼 성숙했다고 하는 전제하에 이제는 정치권 스스로 우리나라의 제도상 모순이 무엇인지 인식을 하고 처음으로 정치권이 개헌을 심도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을 겨냥한 강도 높은 발언도 했다. “정치인들이 권력이나 나눠먹으려고 개헌을 하려고 한다며 배척하는 피상적인 자세는 옳지 않다”며 “개헌 임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우리나라 실상을 냉정히 판단하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서로 토의해나가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같은 당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권 잠룡 중 개헌 반대론자들을 향해선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과 같은 소위 헌법 체제처럼 편안한 게 없다. 되기만 하면 내 멋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라며 “다소 모자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할지라도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갖고 5년 동안은 자기 맘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게 지금의 헌법”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인식에 공감하는 정치권이 개헌을 화두로 제3지대로 합종연횡(合從連橫)하게 될 것인지가 향후 대선정국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 제5공화국 헌법공포식 참석

반기문의 파괴력은?

제3지대에 개헌에 찬성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해 합류할 경우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으로 관측된다. 반 총장 측은 국내 정치 상황 변화에 따른 대권 구상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문재인 대세론’으로 굳어지는 듯했던 대선판에 메가톤급 파장을 예고한다. 새누리당의 ‘친박 대 비박’의 분열과 함께 대항마를 찾는 이들을 끌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 총장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개헌에 반대하는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와 명확하게 갈리는 부분이다. 이는 여권 일부 세력과 제3지대를 개헌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해석된다. 반 총장은 내년 1월 귀국 후 기존 정당과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행보를 보일 것으로 보인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만일 여당 붕괴의 시나리오로 가게 된다면 제3지대로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며 “일단 보수에서 개혁을 논하는 사람들이 스노우볼링(snowballing·세력확장) 형태로 세력을 모으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대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하게 되면 친박과 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독자행보를 하다가 제3지대로 모두 모여 경선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개헌을 매개로 대권을 거머쥐기 위한 정치권의 향배에 귀추가 주목된다.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