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태어나다

모든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은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한 역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결국 그러한 고난과 역경에 이기지 못하고 꿈을 저버리는 사람들 또한 있다. 그러나“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처럼, 꿈은 그것을 저버리는 사람에게는 허황된 망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곧 다가오는 현실이 된다.


1903년 12월 17일 오전 10시 35분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안에서 인류 최초의 비행기가 이륙했다.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36세의 윌버 라이트(1867-1912)와 32세의 오빌 라이트(1871-1948)가 만든 플라이어 호가 12초 동안 36m를 나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당시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늘을 날고야 말겠다는 라이트 형제의 꿈은 주위 사람들의 수많은 비웃음을 샀으나 그들의 꿈을 향한 강한 의지는 마침내 인간을 공중에 띄우는데 성공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꿈의 힘이다. “진보란 만족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법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 사람이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을 향해, 행복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다.

세계화에 발맞춰 바이오기술(BT)산업을 육성하다.

▲ 지난 2006년 창사 이래로 최고의 매출액과 영업 이익의 실적을 올린 김 대표는『자유종』을 출간하기도 해 성공한 CEO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문학인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수도약품공업(주)(www.sudopharm.co.kr)은 1957년 설립한 이래로 우수한 의약품들을 생산해낸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다. 오랜 전통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제약환경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수도약품공업(주)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종합보건기업으로 우수치료의약품과 바이오(Bio)제품 의료기기 등을 개발하고 토털 헬스케어를 지향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김수경씨를 회장으로 선임한 이래로, 수도약품공업(주)는 세계화, 글로벌화, 정도경영을 추구한다. 다국적 기업과 함께, 정보역할과 임상실험을 할 수 있는 병원시설을 구축한 수도약품공업(주)은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최적의 조건인 최신정보와 지적 기술(자산)을 바탕으로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수도약품공업(주)의 김수경 회장은 주어진 환경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비즈니스를 창조, 연구하여 직원들이 근무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하고 직원들에게 인재의 중요성과 함께 열린 마음과 열린 시각, 다양한 사고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파한다. 지난 2006년 창사 이래로 최고의 매출액과 영업 이익의 실적을 올린 김 대표는『자유종』을 출간하기도 해 성공한 CEO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문학인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자유종』,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수도약품공업(주)의 김수경 대표는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자,『자유종』을 집필한 소설가다. 김 대표의『자유종』은‘마약’이라는 상징을 통해, 마약중독보다 정치, 권력 중독이 더 지독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소설로 1990년에 연재될 당시,‘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학 형태의 출현을 가시화시켜준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작가가 표현한 신(新)을 신(新)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쓴다는 의미라면, 이 소설이 1990년 계간 문예지‘외국문학’에 연재될 당시“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김윤식),“새로운 소설 쓰기의 시도”(구모룡) 라는 방법론에 관한 한 당시 평단의 평가는 무난하다 할 수 있다.

소재의 파격성과 각종 금기의 무시,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리얼리티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방법상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자유종』으로 인해 김 대표는 당시‘여자 마광수’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1985년 4월. 시인이자 해부학도이며 노처녀인, 작고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김명자는 10ㆍ26과 12ㆍ12와 5ㆍ18과 삼청교육대와 섹스와 모르핀 등으로 얼룩진 너절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어 프랑스를 타고 날아오른다. 소설은 정치나 사회, 도덕이나 이데올로기가 주는 억압뿐만 아니라 마약, 섹스, 죽음의 유혹, 성(性)으로부터 조차 자유로운‘김명자’라는 인물을 눈에 보일 듯 명확하게 그려낸다. 김 대표는 제5공화국의 억압이 극에 이른 1980년대, 비교적 국내 문제를 자유롭게 볼 수 있었던 파리에서 2년 동안, 이『자유종』을 썼다.



문학, 그 끝없는 열정을 향하여<김수경 대표 인터뷰>

Q. 수도약품공업(주)의 CEO로서 한마디
-경영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는 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헬스 케어 산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의사 마누라’인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남편을 따라 해외 세미나를 참여하면서 (그녀의 남편은 우리나라 최초의 척추전문병원을 세운 우리들병원 이상호 이사장이다) 의료기기 제조, 제약 등 고부가가치 토털 헬스케어 산업이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점점 소프트웨어화 되어 가는 의료기기와의 만남을 통해 부가가치가 높은 신개념의 제약 산업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또한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통해 주주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키고 기업의 과실을 사회와 공유하고 지속적인 개발과 투자로 수도약품공업(주)가 다음 세대의 건강과 질병의 예방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Q. 문학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아이 셋을 낳고 빨래하고 남편 바가지도 긁는 평범한 전업 주부로 살아가던 어느 날, 아마 새벽 4시쯤 저절로 눈이 떠졌다. 보부아르 같은 전위적인 문학인을 꿈꾸며 살던 처녀 시절의 나에게서 멀리 동떨어져 버린 걸 깨달아 버린 뒤였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을 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곤 아무 버스나 잡아탔다. 종점까지 다녀오는 동안‘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세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독립된 존재로 나를 일으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Q. 문학인의 길을 걷는데 있어 영향을 주었던 이들은
-원래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정치적 억압 속에서 혼자 방 안에서만 있어도 검열을 받는 듯한 억압감과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했던 김지하와 백낙 청 등의 민족주의자와 민중주의자들이 나의 양심에 부과하는 부담으로 인해 이중으로 괴로웠다.『자유종』을 쓰기 시작해서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그들이 나의 글쓰기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특히 백낙청 교수의 리얼리즘에 대한 불만이 내게 계속적으로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Q.『자유종』의 재출간에 대하여
-소설『자유종』을 출판한 것은 1990년이었으나,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니 그후로 무려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오래된 책을 다시 출간한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낯 뜨겁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책이 한권도 없이 완전히 절판되다시피 하여 어렵사리 재판을 찍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내용을 대폭 퇴고할 생각도 하였으나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찬찬히 읽으면서 내용을 확인하고 간단히 교정만 보고 출간할 것을 결정했다. 이번『자유종』재판 작업을 하면서 <문학정신>과 <외국문학>을 만들었던, 한국문학과 살을 비비며 살았던 때가 기억이 난다.

▲ 수도약품공업(주)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종합보건기업으로 우수치료의약품과 바이오(Bio)제품 의료기기 등을 개발하고 토털 헬스케어를 지향하고 있다.
Q.『자유종』의 집필 계기에 대하여
-나는 스토리텔링에는 소질이 없었다. 내게 삶의 찰나들은 서로 교차하고 입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어서 시간적 순서대로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행동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1984년 세 아이의 엄마와 개업의의 마누라인 나의 일상에서 얼마 동안 떠나 있을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빗장이 열린 나는 바람난 망아지처럼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 다녔다. 하지만 동료 작가들은 감옥에 있었거나 혹은 거리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좀생이처럼 숨어 있는 순수파들에게는 분노를 느꼈으며, 외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나 자신에게는 한심함을 느꼈다.

Q.『자유종』출간 당시 반응에 대하여
-운동권 문학 잡지 쪽에서는“이것이 무슨 노동자나 민중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논리로 부르주아 문학이라며 공격해왔고, 한쪽에서는 소설의 성적 표현의 수위에 대해 논하며 소설의 본질과 무관한 평론의 글을 내놓기도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심지어“마약 중독자들을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제보를 해달라”고 까지 했었다. 마광수 사건이 터졌을 당시 나는 각종 시사프로의 패널로 참석해 마광수씨 구속을 반대하기도 했다.『즐거운 사라』의 작품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가 단지 자기 표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이 되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어느새‘여자 마광수’가 되어 있었다. 마약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에, 마광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Q. 문학인으로서의 계획에 대하여
-문학에 소질이 없다고 판단하여 문학을 떠난 지 10여 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난 2006년 사진작가 김중만과 화가 김점선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그만‘엑스터시’를 쓰기로 그들과 약속을 해버렸다. 그날 밤 이야기로 시작했던‘엑스터시’를 사실 지난 여름 외출도 삼가고 좋아하는 탱고도 추지 않고 초고를 마쳤다. 올 겨울에는 찬찬히 읽으면서 퇴고하여 내년에 출판할 생각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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