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의 정신적 스승 송기인 위원장

<호국보훈의 달 특별인터뷰>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5년 출범 당시, 논란과 갈등을 부추겼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역사의 바로잡기 보다는 노무현 정부의 한나라당을 저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지적과 함께 국민분열위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 폭력, 학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역사적 소명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없는 것처럼, 과거 없는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가 존재하기에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이다.

2005년 12월 1일, 과거 100년간의 역사적 의혹과 묻혀 진 진실을 재조명하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재작년 5월 여야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제정한 뒤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제2조 2항은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한다고 하면서, 다만, 소송법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비밀누설금지조항을 두어 조사대상자의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도록 규정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으로 더 유명한 송기인 신부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느 부처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독립기구이며, 항일독립운동부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유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안을 조사하고 있다.

앞으로 할 일 많은 진실화해위원회
지난 4월, 진실화해위원회는 2월말까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민간인집단희생사건 7,533건을 검토 분류한 결과, 모두 1,222건의 단위사건으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미군과 유엔군 공격에 의한 민간인 희생 155건을 조사 중이며, 506명이 중복 대표 신청한 미군과 유엔군 관련 사건들을 분석했는데, 371명이 공중폭격에 의한 사건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지상군에 의한 사건이 120명, 함포에 의한 사건 10명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진실화해위가 조사에 착수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익산역 미군 폭격사건 : 1950년 7월11일 오후2시40분께 전북 익산시 창인동 익산역(舊이리역)에 미공군기 2대가 출현해 익산역과 주변 민가를 폭격, 300∼400여명이 숨졌다는 주장.
- 단양 곡계굴사건 : 1951년 1월20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느티 곡계굴에 피난해 있던 민간인 360여명이 미공군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학살됐다는 주장.
- 아산 둔포리 미군 폭격사건 : 1951년 1월 충남 아산 둔포마을 창고를 미전투기가 폭격해 창고 안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 300여명이 숨졌다는 주장.
- 대전역 미군 폭격사건 : 1950년 8월16일 미공군기가 보급로 차단을 목적으로 4시간에 걸쳐 대전역과 경부선, 호남선 철로 일대를 폭격해 1천여 명이 숨졌고 성남동 옛 굴다리 등에 유해가 그대로 묻혀있다는 주장.

Q .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위원회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 알고 싶다.
- 5월 말로 위원회가 출범한지 정확히 1년 6개월이 된다. 물론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진실규명 신청기간이 법적으로 1년이기 때문에 지난 해 11월 말까지는 국민들을 상대로 전국을 순회하며 홍보를 했고, 10,860여건의 많은 사건이 접수됐다. 출범 당시부터 직원채용으로 6개월이 소요됐는데, 결과적으로 하반기에 홍보가 집중되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지금도 많은 신청 문의가 쇄도하고 있어 신청 기간 연장을 위해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2006년 4월 25일 첫 조사개시를 시작한 이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김익환 일가 고문·가혹행위사건 등 인권침해사건 7건, 나주 동박굴재 사건 등 한국전쟁전후 민인 집단희생 사건 1건, 박창래 여수수산학교 학생독립운동사건 등 항일독립운사건 6건 등 총 14건 대해 조사결과를 밝혔다. 올해에는 본격적인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 연말에는 더 많은 성과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Q . 진실화해위원회가 2005년 출범 이후,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이러한 논란과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책이나 위원회 입장은 어떠한가?
- 물론 초반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위원회는 엄연히 여·야간의 합의로 법이 통과돼 설립된 독립적인 정부 기관이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혀 역사의 대의를 바로잡자는 것에 대해 국민 모두가 동의 한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 논란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자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진실을 밝히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가기 힘들다. 당시의 피해자와 남은 유족들의 아픔은 한겨레 같은 민족의 상처이고 아픔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한국전쟁 때 민간인 희생자만 1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유도 없이 강제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 역시 연좌제로 인해 이후 취직과 진로선택의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있으며 이는 곧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등 여러 피해를 입고 있다. 그 후손들은 최소한 부모와 형제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사망했는지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을 밝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제 날짜에 부모님 제사라도 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신청한 사람이 대다수다.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고 비난하는 것은 두 번 상처를 주는 것이다. 오히려 많은 국민들이 진실을 밝히는데 서로가 응원해주고 자료 제보도 하면서 그렇게 도와줘야 몇 십 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힐 수 있다.

Q . 많은 사건 가운데 위원회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조사가 있다면?
- 총 14건에 대해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경우 2건에 대해서는 증거 부족으로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진실을 규명한 사건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특히 항일독립운동의 경우, 1937년 발생한 러시아 동포들의 강제이주 사건의 진실을 밝혔고, 집단희생사건의 경우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남 나주시 봉황면에서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국군에 의해 나주 주민 36명이 억울하게 집단 희생된 사건을 밝혔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인권침해사건의 경우에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7~80년대 각종 간첩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혔다. 이것은 피해 당사자의 해원(解寃)만이 아니라, 정권 유지를 위해 힘없는 국민들에게 저지른 당시 정권의 인권침해 사례를 정부기관이 밝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지난 4월 20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에서 나주 동박굴재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관련 <나주 동박굴재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나주 동박굴재사건>은 1951년 2월 26일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뒷산(속칭 동박굴재)에서 나주경찰서 소속 특공대에 의해 철천리 주민 등 약 40여 명이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나주경찰서 특공대가 빨갱이로 지목한 송현리 원봉마을 주민 3명과 봉황면 선동마을과 철야마을 주민 중 입산자(入山者) 가족과 젊은 남자들, 가족의 연행에 항의하는 여성 등 29명을 철천리 뒷산(동박굴재)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는데, 그 중 4명은 현장에서 달아나 생존했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은 비무장, 비전투원인 민간인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20~30대가 가장 많았고, 여성도 7명이 포함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경찰이 주민분류 기준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을 사용했다는 증언을 통해 볼 때 이 사건은 계획적인 ‘입산자 가족 및 부역혐의자 임의처형(任意處刑)’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경찰기록에는 작전 중에 사살된 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민간인 희생의 실상이 은폐된 채 공비토벌 전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나주 동박굴재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국가는 사건 희생자 및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법제도 정비, 역사기록 등재와 평화인권교육 강화, 위령사업의 지원, 호적정정 등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Q . 임기 도중에 위원장을 사직하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언제 무엇 때문에 그랬나, 그리고 이를 어떻게 극복했나?
- 무엇보다도 과거 몇 십 년 전의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많은 증거 자료와 제보가 중요하다. 지난 해 접수 마감된 1만 860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전국형무소재소자희생사건과 같이 위원회가 필요해 직권조사 결정을 내린 사건을 조사하려면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요한데, 한시기구로서 다해 낼 수 있을 지 솔직히 걱정이다. 위원회 출범 전부터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은 위원회의 인력부족을 거론했고, 지난 해 두 차례에 걸쳐 위원회 사무실에서 항의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이후 외부에 조직진단을 용역을 맡겼고, 그 결과 올해 1월에 139명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토대로 관계부처와 협의에 들어갔고 결국 지난 15일 국무회의에서 32명의 증원 안이 통과됐다. 우리 위원회가 조사해야 할 사건 수가 9,150건이지만 아직도 많이 모자란 조사관 숫자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 갈 것이다. 사람이 힘든 상황에서 늘 견지해야 하는 것은 초심이다. 남북협력의 시기에 동서 간, 계층 간의 갈등을 풀지 않고서는 세계 속 하나가 될 수 없다. 아픔을 치유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은 결국 밝은 미래로 다함께 나아가자는 것인 만큼, 그 초심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간 중간 난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국 16개 시·도와 일본, 미국 등에도 신청 홍보를 하기 위해 뛰어다니면서 직접 국민, 동포들을 만나 그들에게 적극적인 신청을 당부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Q . 진실화해위원회의 존속의 당위성과 위원장님이 생각하는 역사란?
- 곪은 상처는 짜내야 새 살이 돋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이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가가 가해자로 전락한 시절이 있었다. 이에 국가는 당연히 진실을 밝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된다. 해방 후, 친일파청산이 실패한 것은 반민특위의 해산이 상징적이다. 4·19 이후 잠시 과거청산의 기회를 맞았지만, 이 역시 5·16 쿠데타 세력에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7·8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 국민의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일부 고령의 당사자가 살아 있는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진실규명을 해야 우리 후손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밝은 미래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란 고정된 학문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변하고 자라며 진전되는 것이 역사다. 19세기 초,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의 세례명은 여태껏 알렉산드르(Alexander)로 불리어 왔는데, 다시 자료들을 찾아보니 알렉시오(Alexio)이었다. 이렇듯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던 사실들도 그릇되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릇됨의 바로잡기’는 쉬어서도 안 되고, 쉴 수도 없는 과업이다. 올바른 사실을 덮어두고 잘못 알고 산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 모두가 손실을 입는 것이다. 관습을 바꾸는 아픔을 감내하더라도 참됨은 절대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바른 발전이 지름길’이다. 과거는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Q . 점점 세대가 변하면서 역사에 대해 무관심해져가는 것 같다. 이에 자성할 수 있도록 충고나 조언을 한다면?
-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없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이고 평론가인 ‘조지 산타야나’가 남긴 말이다. 특히 이 명언은

▲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이 실시된 5월17일 금강산청년역에서 송기인 위원장이 동해선 북쪽 열차에 올라 밝게 웃고 있다.
폴란드에 있는 옛 나치 독일의 유태인수용소 아우슈비츠의 돌 벽에 새겨져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서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정부가 처음으로 진실규명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말한다. 위원회가 발족됐다는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동안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수많은 억울한 피해자들의 누명을 벗겨주고 그들의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국가에 대한 ‘신뢰 회복’의 문제와 ‘사회 정의’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앞으로 후대들에 대한 인권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다시는 과거의 잘못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Q . 위원장으로서 임하는 각오와 6월, 호국보훈의 달 메시지를 부탁드린다.
- 오늘날 우리가 행복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부모세대와 그 윗세대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역대 군사정권 하에서 많은 시대적 고통을 함께 한 분들이다. 과거 우리 민족의 큰 상처였던 한국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모두가 상생하는 길이다. 지난 5월 17일 56년 만에 다시 이어진 통일열차를 타고 북녘 땅에 다녀왔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우리 민족의 혈맥이 다시 이어져 통일이 한층 앞당겨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통일은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원래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서로의 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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