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주

한국의 '부(副) 부통령'. 그것은 바로 제1공화국 말기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관이었던 한 인물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은어다. 진짜 부통령보다도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장·차관에게조차 전화로 호통을 칠 수 있었으니 경무대의 후광 속에, 역행된 그가 누린 권세는 실로 짐작이 가고도 남을 법 하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한 보잘것없는 말단순경이 어떤 연유로 출세의 준마(駿馬)를 타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바로 제1공화국 권력1번지인 경무대의 무소불위의 힘과 함께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에 암울했던 경무대 역사의 비화를 재조명해 본다.
                                                                      
                                                          

부(副)부통령 곽영주
경기도 이천 출생인 곽영주는 경성직업학교를 마친 후 일본군에 지원 입대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일제 식민지하에서 조선인이 조금이나마 출세할 수 있는 좁은 길 가운데는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만주침략 때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으로 조선인을 징집할 구상을 품고 있었던 일제는 조선 청년들의 출세 욕구를 이용하여 군에 지원하도록 유도했다. 그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청년들을 지원병 형태로 태평양전쟁에 이용하기로 하고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에 지원시켰다(1944년부터 지원병제도는 징병제도로 바뀐다). 헐벗은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아랑곳없이 단지 자신만의 출세를 위해 일본군에 지원한 자들 가운데에 ‘곽영주’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일본군에서 헌병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당시 조선인 지원병들 중에는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한 이유뿐만 아니라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유혹, 그리고 전시하의 극도의 궁핍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일본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원병 모두가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강제로 징집된 경우가 아닌,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일제의 전쟁에 참여한 것은 이미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것임에 다름없다. 물론 당시 일제에 의해 극도로 억압받던 전시 체제하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그들의 직책이 주로 일본군의 말단직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할 엄청난 죄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영주를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식민지 시대의 반민족적 행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죄악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이다.

▲ 박마리아 와 이기붕
권력의 날개를 달아준 ‘경무대’
곽영주는 해방이 되자 수도경찰학교에 입교, 그곳을 수료한 후 1947년 3월 수도경찰청 순경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경사로 승진하여 경무대 경찰서에 배치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경무대(당시엔 하지 미군사령관이 거주함) 경비경찰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948년 정부수립 후, 경무대 경찰 경호계 에서 줄곧 근무하면서 경위(1950년), 경감(1952년), 총경(1954년), 경무관(1957년)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승만의 초대 경호책임자는 김장흥(金長興)이었다. 김장흥은 미(美)군정기에 서울 중부경찰서 외근주임으로 계급은 경위였는데, 이승만의 거처였던 돈암장 경비책으로 배속된 이래 줄곧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경무대로 입성하고 나서도 그는 계속해서 경호실 책임을 맡았다. 당시 경무대 경찰서 인원은 약 400여명으로 김장흥이 이들을 지휘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대통령의 경호만을 따로 전담하는 경호계(警護係)를 별도로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무대 경찰서는 경무대 일대의 경비 임무를 총괄하고, 경호계는 이승만의 집무실과 침실 및 대통령 행차시의 신변경호를 직접 담당하는 부서로 나뉘어 지게 된 것이다. 경호계 인원은 약30명 정도였는데, 곽영주가 바로 이 경호계에 경사 계급으로 배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곽영주는 사격술이 뛰어나 경무대 경찰서의 사격대회에서 여러 번 일등을 차지하여 '명사수 곽 경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늘씬한 체격에 미남형인 그는 경호원 가운데서도 멋쟁이로 통하였고 윗사람에 대한 매끄러운 매너는 서서히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여사의 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장흥과 그 후임인 김국진(金國振)이 경무대경호책임자로 있을 동안은 아직 곽영주의 존재는 그다지 부각 되지는 못했다.

‘안하무인’ 대통령 경호 책임자
곽영주가 권력의 축에 우뚝 서게 된 것은 한마디로 정치적 비리가 만들어준 산물이었다. 그 비리의 서곡은 1956년 5월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이 낙선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이기붕이 낙선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내무장관 김형근(金亨根)이 사임했고, 치안국장 김장흥은 강원도지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김국진이 경무대 경찰서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에 바로 곽영주가 발탁되었던 것이다. 곽영주는 이렇게 이기붕의 낙선 후유증인 인사파동에 편승하여 대통령 경호책임자로 기용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당시'폭력계의 대부'이정재(李丁載)의 보이지 않는 도움도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차장 이라는 감투를 얻어 쓴 이정재는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경무대 경감으로 있는 동향후배 곽영주와 의형제를 맺었다. 이정재는 자신의 기반이었던 폭력배들을 이용해 곽영주를 돕는 한편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에게 곽영주를 인상 깊게 심어놓았고, 박마리아는 이승만 대통령부부에게 수시로 곽영주에 대한 칭찬을 들려주곤 했다. 사실 1955년 무렵까지 대통령 경호실은 권세와는 무관했다. 묵묵히 경호 소임만 다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있어 대통령 경호관이란 배경을 이용해 경무대를 드나드는 윗사람들인 장관이나 국회의원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횡포는 당시로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경무대를 등에 업은 권력 수혜자 곽영주가 경무대 경찰서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돌변하고 만다. 경무대 비서실에서 경리를 담당했던 김상래(金相來) 비서관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곽영주 씨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경무대 경찰서장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경무관으로 승진했는데 그때부터 권력을 남용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그래서 주위의 핀잔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안하무인격이었다.”
경무대 경호책임자라면 글자 그대로 경무대라는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잘 경비하고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위해 호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면 된다. 경호책임자의 행정적 신분은 경찰관이므로 경찰관 신분으로서의 직책 수행에 그쳐야만 한다. 대통령의 정치적·행정적 업무를 보좌하는 직분은 경호관이 아니라 비서관들의 몫이다. 그러나 곽영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월권을 마구 행사했다. 그는 대통령의 건강과 경호 문제를 구실로 경무대 비서관 가운데서도 박찬일(朴贊一)만을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여타의 비서관들은 무력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경무대 주변에서 '박찬일 부통령' '곽영주 부부통령'이라는 은어가 나돈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곽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에도 손을 뻗쳤다.  종로 영보빌딩을 차지하는 등 축재에 대한 소문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 꾸지람을 듣게 되자, 그는 프란체스카여사의 비서인 이무기(李無忌)가 밀고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심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정치깡패와의 결탁과 비호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로 정부 여당을 성토하는 정치 강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인 1957년 5월24일, 적어도 5만 여명의 청중이 장충단공원에 운집할 것으로 추정한 경찰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곽영주와 이정재 사이에도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대통령 경호실장은 야당 강연회 봉쇄를 암시했고, 이정재는 심복인 유지광(柳志光)을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다음날인 25일 토요일 오후 수만의 인파로 뒤덮인 장충단공원. 청중들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조병옥(趙炳玉)이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40~50명의 괴한들이 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강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지만, 이미 자유당 사병으로 타락해버린 경찰은 괴한들이 유유히 사라질 때까지도 불구경하듯 사태를 방관하기만 했다. 기자들에 의해 괴한들의 신분이 이정재가 거느린 깡패집단인 ‘화랑동지회’ 회원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행동조 두목인 유지광은 권력의 비호아래 숨어버렸고 곽영주는 그에게 치하의 전화까지 거는 웃지못할 한심한 작태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었다. 민심으로부터 이미 멀어진 이승만 정권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는 도저히 선거에서 승산이 없자 금권과 강권을 총동원한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선거결과는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쟁의 물결은 이후 정권타도 투쟁으로 이어졌다. 1960년 4월18일 오후. 고려대 학생시위대 6백여 명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며 3·15 부정선거를 성토한 후, 저녁 7시경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경찰 백차의 길 안내를 받으며 천일백화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로 무장한 1백여 명의 괴한들이 달려들면서 이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이로 인해 10여 명의 고려대생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대 뒤를 따르던 청소년 수십여 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이들을 취재하던 기자, 보도원들까지 부상을 입는 등 정치깡패의 존재가 또다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폭행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경찰은 이날 밤 조무래기 몇 명만을 연행했다. 부하들의 연행사실을 유지광으로 부터 보고 받은 이정재와 임화수는 곽영주에게 석방을 부탁했고 이에 곽영주는 동대문 경찰서장을 전화통에 불러 불같은 호통을 쳤다. “이 개놈의 새끼, 누가 잡아넣으라고 했어. 시경국장도 모가지를 뗀다” “그들은 애국적인 반공청년단원이야. 화랑동지회 회원이란 말이다. 훈장은 못 줄망정 체포하다니 당신 정말 정신 나갔어? 당장 석방해!” 곽영주의 이 같은 말 한마디에 연행됐던 폭력깡패들이 풀려난 것은 물론이다. 훗날 경찰은《한국경찰사》에서 이 습격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데모대를 습격한 깡패들은 경무대 경호관 곽영주 지도하에 있는 임화수, 이정재, 유지광 등 정치세력과 결탁한 정치깡패들이었음이 뒤에 판명되었으며 18일의 고려대 데모와 깡패들의 테러는 혁명의 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자극하여 줌으로써 전 서울의 대학생들은 익일 총궐기하여 4월 혁명의 노도를 이루게 되었다]

▲ 4.19혁명 당시 독재자 이승만이 집무하던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는 시위군중의 모습
피의 화요일
다음날, 학생들의 분노는 마침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고려대생 습격사건을 계기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은 4월 19일을 총궐기의 날로 정하고 경찰의 저지선이 놓인 교문을 뚫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 시위대는 정오를 전후하여 국회 앞과 세종로를 중심으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중앙청으로 향했다. 이때 중앙청 정문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동국대생 한 명이 쓰러지게 되자 시위대의 분노는 한계를 넘어서 경무대를 향하여 밀려갔다. 경무대 책임자이던 곽영주는 여기서 해서는 안 될 최후의 만용을 저지르고 만다. 혁명재판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곽영주는 경무대로 달려온 국무위원들과 장성들의 신중론을 뿌리치고 오히려 권총을 빼들고 경비 현장에 달려 나가 시위대에 실탄 총격을 가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경무대 저지선과 시위대간격이 10m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실탄 사격이 가해졌다. 경무대의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시체가 나뒹굴었다. 달아나는 시위대를 뒤쫓은 경찰은 사정없이 이들을 구타하면서 끌어갔다. 이날 경무대 앞의 시위 희생자는 사망 21명, 부상 172명으로 '피의 화요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의 교훈은 곽영주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정권하의 범죄자들을 엄벌에 처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곽영주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발포명령 혐의 등으로 마침내 6월1일 서대문형무소에 정식 구속수감 되었다. 곽영주는 법정에서 자신은 결코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발포 명령자는 경찰책임자급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곽영주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로부터 한 달 반 뒤, 세칭 '10·8 판결'로 불려  지는 선고공판에서 발포명령 사건의 피고인인 유충렬(전 서울시경국장)에게 사형이, 백남규(전 서울시경 경비과장)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리나 사형을 구형받았던 곽영주는 살인과 조세범처벌 위반 혐의가 무죄로 인정되어 징역3년을 선고받는다. 형량이 예상보다 너무 가볍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전국은 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사법부를 비난하는 성명이 사회단체 및 각계에서 연일 쏟아져 나왔고 비판은 성명서에 그치지 않고 시위로 연결되었다. 이런 가운데 10월11일 오전 부상학생 50여명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밀고 들어온 세칭 '의사당 난입사건'이 발생하였다. 국회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론의 힘에 밀려 결국'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켜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 임시처리법은 10·8판결로 석방된 피고인들을 재수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임시처리법으로 모든 혁명재판을 중지시킨 국회는 특별법 제정 절차를 밟아 헌법 개정안을 가결, 공포함으로써 특별 법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1961년 1월4일, 피고인 48명을 특별재판 해당자와 일반법원 관련자로 나누어 처리하게 되었다. 여기서 임화수, 유지광 등과 더불어 곽영주는 특별재판소와 일반법원 양쪽에서 다스릴 자로 분류되었다. 특별검찰부는 같은 해 4월8일, 새로운 사실로서 4·19 발포에 앞서 홍진기(洪璡基), 조인구(趙寅九), 곽영주 등 세 명의 피고가 발포 모의를 했다는 증거를 잡기에 이르러 공소장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5·16 군부쿠데타의 발발로 2회 공판을 끝으로 이 사건은 미결로 남게 되고 결국 곽영주에 대한 처리 결과는 5·16 군부쿠데타 이후의 혁명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 곽영주의 사형 집행후 다시 끌어올려 사망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독재권력 하수인의 허무한 종말
5·16 군부쿠데타가 일어난 뒤 혁명재판이 재개되었다. 이 재판에서 곽영주는 의형제인 이정재와 더불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경무대의 비호아래 권력의 최대 수혜자중 하나였던 곽영주는 1961년 12월21일 37세를 마지막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국혁명재판사》에는“곽영주는 '정치깡패의 비호자' '경무대 앞 발포 명령자'이자, '대통령 측근에 있음을 기화로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격으로 정부의 인사 및 제반 처사에 있어 모략중상하고 거액의 축재를 한 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곽영주는 경무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극우단체 및 정치깡패들과 함께 폭력을 교사, 비호하고 국민들의 정치 권리, 생존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반민족적, 반민주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이나 개인적 성향 뿐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기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한 개인에게 주는 삶의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곽영주에게 해방은 친일행위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찰신분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함을 망각하고 민중의 지팡이가 되기는커녕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권력자에게는 아부하고 힘없는 국민들에겐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반민주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곽영주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들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그러나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주변에는 아직도 그러한 행태의 부정적 유산이 수법을 달리하며 관행의 형태로 잔존해 있다. 또한 이러한 부정적 유산과 관행은 물리적인 억압과 사실의 왜곡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우린 지금 민주정부에서 살고 있다. 때문에 다시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끔씩 망각의 기억을 되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들추기 싫은 우리의 과거지만 그러하기에 필자는 이러한 역사의 비화를 재조명 하고 싶은 것이다. NP

<참고문헌>
한국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한국혁명재판사》제1집, 1962.
편집부 편,《4월혁명 자료집-혁명재판》, 학민사, 1985.
이경남,「副부통령 곽영주 東카포네 이정재」,
내무부 치안국,《한국경찰사》2, 하권, 1972.
사월혁명연구소 편,《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한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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