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단체와의 협상불가 원칙 깨

아프간 피랍사태 41일 째인 지난 8월 28일, 정부 협상단은 탈레반과 남은 인질 19명의 전원 석방에 전격 합의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시각으로 오늘 오후 5시48분부터 7시20분까지 탈레반과 대면협상을 벌였다”며 “한국군 연내 철군과 아프간 선교 중지를 조건으로 피랍자 19명 전원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통신인 <파지와크 아프간통신>은 이날 탈레반 협상 대표 카리 바시르의 말을 따, 양쪽이 한국군과 한국인 선교사·비정부기구 회원의 철수와 탈레반의 수감자 석방 요구 중지 등을 담은 5개항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이 수감자 석방이라는 핵심 요구사항을 철회한 데 대해, 카리 유수프 아마디 탈레반 대변인은 “한국 정부의 권한 밖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쪽은 탈레반 수감자 가운데 노약자 등이 사면을 받도록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피랍자 석방 시기에 대해, 천 대변인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지금까지 피랍자 12명과 통화를 해 신변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직접 대면 협상 나서
▲ 아프간에 피랍되었던 한국인 23인.
탈레반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학생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강경 수니파 무장 정치세력이다. 탈레반(Taleban)이라는 단어 자체가 ‘학생’이라는 뜻으로, 1990년대 중반에 활동을 시작해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결속한 탈레반은 지난 1996년 가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고, 2001년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의 공격에 붕괴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 이미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번번이 외국인을 납치해왔던 탈레반 무장세력은 지난 4월과 7월 초에도 외국인을 납치했다가 풀어줬고, 7월 18일에는 독일인 2명과 아프가니스탄 6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처음 아프간 피랍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장기화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추측처럼, 그동안 수차례의 협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미 탈레반은 남성 인질 2명을 피살했으며, 여성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또한 서슴지 않았다. 아프간에 피랍된 한국인 23인은 현지시각으로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를 향해 버스로 이동하던 도중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현지 무장세력인 탈레반에 납치됐다. 피랍된 한국인 23명 중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는 이미 지난 7월 탈레반 무장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인질 석방 협상 과정 중 탈레반 측은 여성 인질들의 육성을 공개하는 등의 치밀한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정부는 백종천 대통령 특사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지난 8월 13일 김지나씨와 김경자씨 등 2명이 풀려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을 납치한 탈레반은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수차례에 걸쳐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이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자 정부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에 나서, 피랍 26일째인 8월 13일 탈레반은 남은 21명의 인질 중 2명의 여성을 석방시켰으며 피랍 41일째인 8월 28일 남은 인질 19명의 전원 석방에 합의를 했다.

향후 유사 사태 재발 가능성 높여
그동안 이슬람권과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는 우리 외교의 불모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아프간 피랍사태로 시험대에 오른 정부는 이번 사태 직후 총력을 기울였다. 이번 사태 전 아프간에는 겨우 외교관 3명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우리 정부가 제3세계와 이슬람권을 얼마나 경시해 왔는지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석방 교섭 과정에서 아프간에 나간 정부협상팀은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의 한 외교관은 “남북 정상회담과 함께 아프간 인질 사태는 노무현 정부의 임기 말 외치(外治) 성과를 좌우할 변수였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7월 21일 1차 살해 시한을 몇 시간 앞두고 CNN 방송을 통해 “우리 정부는 조속한 석방을 위해 관련된 사람들과 성의를 다해 노력할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으며, 탈레반이 요구했던 다산, 동의부대 철군 요구에 대해서도 “연말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대응을 했다. 인질 전원 석방 합의안은 ▲아프간 파견 한국군의 연내 전원 철수 ▲아프간에 체류 중인 한국 민간인 8월 내 전원 철수 ▲아프간에 기독교 선교단을 다시는 보내지 않을 것 ▲탈레반 죄수 석방 요구를 접기로 했으며 ▲한국인 인질들이 아프간을 떠날 때까지 공격하지 않겠다는 5개항이다. 이번 아프간 인질 전원 석방 합의는 한국 정부로선 낯선 이국땅에서 발생한 집단 피랍 사태를 해결했다는 측면에서 외교적 성과가 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부가 ‘테러세력과의 협상 불가’라는 국제 사회의 원칙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지적도 있으며 비슷한 시기 독일인들이 인질로 잡힌 다음 아프간 주둔 독일군을 증파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결단과 비교하는 시각도 있어, 한국은 국제적 이미지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정부가 직접 나서 탈레반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연출됨에 따라 앞으로 세계 각지의 충돌ㆍ위험 지역에서 한국인이 주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져, 향후 유사사태의 재발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우려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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