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열정적이기에 더 힘들었던 그녀, 서갑숙의 이야기

사랑에 대해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서로에게 이끌림의 감정을 느끼는 그 둘 사이에서 생겨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그들의 행위까지. 사랑,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단어이지만 때문에 가장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단어일수도 있다.

임보연 기자

벌써 7년 전이다. 99년 10월이었고 사람들은 한 여배우의 발칙한 도발에 흥분하여 그녀를 매스컴 앞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으로 자신의 섹스체험을 밝히면서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렸던 배우 서갑숙. 그전까지 그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내는 주인공이 아닌 한 명의 여배우였다. 공인이 성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으며 그녀는 그 일로 남편 노영국과의 이혼도 감수했으며 자유로운 성을 구가하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방송가의 섭외를 받고 있었다.

서갑숙을 만나러 가는 길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었을텐데 사람들은 그 모습만이 마치 그녀의 전부인 것인 양 평가하고 바라보았다. 이전에 그녀는 옆집 아줌마의 모습도 학교선생님의 모습도 연기했다. 그러나 책을 출간하고 물의 아닌 물의를 일으킨 후 학교선생님 역할을 하던 드라마에서는 도중하차를 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쓴 책에 담긴 진심이나 전하려는 메시지보다는 책이 가지는 선정성만을 확대하여 바라보려 했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처럼 사람들은 자꾸만 그녀가 가리키는 달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만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책을 내놓았을 때 그녀를 향해 쏟아지던 질책들이 조금은 수그러들고 사람들은 조금 여유로워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머리를 하고<추파>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또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뚜렷하게 언제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과연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새로운 시도를 꿈꾸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자그마한 체구에 평범한 코트를 입은 서갑숙이라는 배우가 서 있었다. 짧았던 머리는 어느새 어깨를 덮을 만큼 길었으며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설명했다. 기자를 보고 생긋 웃으며 다가오는 친절함이 예상과 많이 다르다.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 서갑숙, 그녀는 현재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어떤 일에 열정을 쏟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흔히 생각하는 여배우의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눈길을 돌리며 한 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예상을 뒤엎고 튀어나온 단어는 잡지 창간이라는 말이었다. <차이나 포커스>라는 제목의 중국 전문 시사 잡지를 창간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고 있다고 한다.“2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이라는 나라의 실정에 대해 잘 몰랐어요. 하지만 알고 보니 공산 국가라는 것. 그래서 언론이 통제되어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죠. 인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들의 언론은 통제된 뉴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깊이 있게 접근해서 진실 된 뉴스를 전하고 싶었어요. 중국인들의 밝은 미래라든가 그들이 누려야 할 문화를 찾아주고 싶었어요.”서갑숙은 이 일을 위해 이번APEC정상회의가 열리는 부산에서 파룬궁 시위를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부산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내고 결정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을 전했다. 얼마 전 드라마 출연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연기 복귀는 언제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나는 평생 연기자이다. 현재는 외주 제작사와 방송국 측의 협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다. 좋은 작품에 대한 기대는 항상 열어두고 있죠.” 그녀를 이번 작품에 추천한 사람이 그의 전 남편인 노영국 씨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자리라는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과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던 것 - 그 사이에서 방황하다
서갑숙이라는 여배우가 했던 발언들은 어찌 보면 한국사회의 닫혀 있던 성을 열린 성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언론재판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마광수 교수 이후 전기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용기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성의 성을 내놓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던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 이후 트렌스젠더가 표면으로 떠오르고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당시에는 반대의 입장에 서서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잠자리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물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므로 어떠한 현상에 대하여 평가를 내릴 때에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 당시 서갑숙은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내가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은 자유로운 성을 구가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상처받는 것, 사랑이라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 솔직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고 할까. 그래서 천진난만하게 써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의도가 많이 왜곡되어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보려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보더라.”그때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조차 싫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궁금해 했다. 예를 들면 책이 얼마나 팔렸는가, 얼마를 벌었는가 혹은 책에 언급된 인물들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들에 대한 관심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녀가 <추파>라는 책을 들고 다시 대중 앞에 섰을 때,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어왔다. 잃은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 때마다 그녀는“난 잃은 거 없다.”고 대답했단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녀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처를 깊이 받았다. 내 마음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감옥에 갇힌 느낌? 오히려 더 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그 때 갑상선으로 몇 년 아프고 나니 머리가 푸석거렸다. 그리고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스타일이기도 해 아주 짧게 머리를 잘랐다.“그랬더니 또 소문이 돌더라. 서갑숙 암에 걸려 투병중이라더라.(웃음)”그녀는 스스로를 충동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짧게 자른 머리 역시 반은 충동적이었다. 대신 소신있게 살아야한다고 매번 느끼며 살아간다.“잡지 창간도 마찬가지이다. 진실을 몰랐을 때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알고 난 후에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죠.”그리고 그녀는 인생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인생은 계획대로 가지는 것이 아니더라. 인생은 연극이다. 연극 무대 위에서 맡은 역할을 힘찬 몸짓으로. 그것뿐이다.”(웃음)

서갑숙과 사랑을 논하다
그녀의 글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려고 하는 것 이외에도 그녀의 글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또 책을 낼 생각이 없는지에 대해서 물었다.“아직은 쓸 계획이 없어요. 그런데 쓴다면 이런 거 한 번 써보고 싶어요. 여성이 아름답게 나이 먹는 거. 요즘 들어서 느끼게 되는 건데 언제나 젊을 수만은 없잖아요. 젊음이 가는 게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말죠. 그렇다고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녀와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물었다. 과연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아직도 나는 잘 말할 수 없다. 생각이 변하니까. 암만 해도 사랑에는 집착이라는 것이 더해지더라. 나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고, 나만을 사랑했으면 좋겠고. 그런 거 말이다. 결국은 집착이 배제된 관계가 타인 간에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랑은 그걸 배워가는 과정이다. 현재는 수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배워가려고 노력중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슴에 남는 사랑은 누구인가 물어도 될까?“가슴에 남는 사랑이라. 내가 이주 힘들었을 때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을 때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일깨워준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죠. 그 이후에는 아직 사랑이 없어요.”왠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말끝의 흐림이 쓸쓸하여 물어본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늘 운명의 사랑은 만나고 싶죠.”기자가 만난 서갑숙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스스로 어떤 색을 입혀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매력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을까 궁금해진다.“열정적이예요. 그렇게 추구해왔던 것 같고. 항상 행동이 먼저였어요. 그러니까 넘어지는 경우도 많았던 거죠. 유난히 엎어졌어요. 그래도 툭툭 털고 일어나고. 그런 거 보면 씩씩한 사람이죠.”지금은 연기를 잠시 쉬고 있지만 그녀는 연기라는 것에 적을 둔 사람이다. 어떤 배역을 맡아보고 싶을까. 그녀는 이 물음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엄마!”라고 답했다. 이제 엄마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단다.“엄마는 큰 바다 같죠. 한없이 아량이 넓고 따뜻한.”
눈빛이 맑은 사람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 맑은 눈빛에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7년 전 사람들이 서갑숙이라는 여배우를 향해서 쏟아냈던 말들은 그녀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바람에 휘어지고 폭풍에 꺾여나가는 우리의 믿음들이 만들어낸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요즘, 아직도 운명의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서갑숙이라는 사람에게 사랑의 의미를 물어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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