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소설 속으로 끌어담기

이명랑 작가를 만나기 위하여 그녀의 집을 찾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친근한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사람을 순간 무장해제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그렇게 현실감각이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사람과 가까이 어울릴 수 있는 그녀의 타고나 능력 때문이었을까.

임보연 기자

“카푸치노 좋아요?”라고 물어온다. 물론 좋다. 이명랑 작가는 정성스레 커피를 내리고 우유로 거품까지 내서 카푸치노를 만들어왔다. 계피가루가 없어서 카푸치노 같지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커피 맛이 참 좋았다. 그러면서 커피에 대하여 잠깐 수다를 떨었다. 카푸치노를 만들다보면 우유로 거품을 내느라고 내려놓은 커피가 식어버리는 것이 흠이라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만다.
이명랑 작가는 최근<수가푸시>라는 제목의 신작 소설을 발표했다. 주인공 소희는 두 돌이 조금 못된 아이를 가진 스물일곱의 젊은 주부이다. 67kg의 몸무게만큼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그런 여자이다. 결혼 전만 해도 50kg을 넘나드는 날씬한 몸매였었는데, 지금은 자포자기 상태의 우람한 체구의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자포자기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엄마였다. 엄마의 지론에 따르자면 아름답다거나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지 대가리에 똥만 잔뜩 든 미친년들의 짓거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소희가 백화점의 문화센터 광고지를 보고나서 라틴댄스를 배우러 가기로 결심을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반역의 의미이며 동시에 자신을 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움직임이었다고 해석된다. 라틴 댄스를 가르치는 선생은‘여자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명랑, 그녀에게 궁금한 아홉 가지 이야기

하나. 거울과 마주하기
그녀의 이번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거울을 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과연 거울은 소설 속의 소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인가 궁금하다. 과연 이명랑 작가는 거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에서 처음에 등장하는 거울은 라틴 댄스의 전단지를 보고난 후였다. 욕실의 문을 잠그고 거울을 본다. 문은 일종의 장벽 같은 것이고 그 문을 닫는다는 행위는 일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세면대 위에 걸려있는 거울이 민망하게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나의 얼굴, 나의 손, 나의 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거울 앞으로 가서 나는 나를 바라본다. 정면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 현기증이 난다. 한시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어떤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늘 내 삶에서 분리가 되지 않는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리하자면 처음으로 거울과 대면을 하는 행위는 진실과 대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대상, 그것과의 대면이다.
두 번째 거울과의 대면은 슈거푸시를 하면서이다. 구두를 신고 머리를 풀고 거울 앞에 선다. 일상에서는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기 힘들다. 거울 앞에서 일상에서 벗어나 여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와 하나 되는 것.‘거울 앞에 서 있는 동안만이라도 구두를 신자. 그리고 머리를 풀자.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내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손바닥과 나의 손바닥을 맞댄다. 그런 느낌으로 손바닥을 거울에 가져다댔다. 거울 표면과 내 손바닥의 지문이 맞닿았다. 거울은 사물이다. 온기가 없다. 그런데도 제게로 맞부딪혀 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리지 않고 비춰준다. 꺼리지 않는다. 앞으로 쭉 뻗었던 팔을 가슴 옆으로 넓게 벌린다. 이제 손바닥 대신 나의 가슴이 거울과 닿는다.’라고 책에서 말한다. 거울은 스스로를 비추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비추는 것이다.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작가가 갑자기 거울에게도 기억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길을 지나다 빌딩의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거울을 보면서 이 작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거울에도 기억이 있다면, 저 거울에는 수백 수만 명의 기억을 가지고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여자의 일생 역시 그런 거울의 이미지와 통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몸을 섞고, 남자가 떠나가고 그런 과정이 있은 후에도 그 남자의 애무 방식이라든가 채취라든가 그의 애무에 반응했던 내 모습 등이 기억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여자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울 역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반복적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앞에 서는 모든 것들을 비추는 것. 그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기에게 오는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성숙해가는 모습을 말이다.

둘. 춤이다. 왜 하필 선택한 것이 춤이었을까 궁금하다.

춤은 바로 몸이었다. 나에게 춤은 몸이었고 문학이었다. 그것을 상징하고자 함이었다. 나는 굴곡이 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발육도 빠른 편이었다. 초등학교 3, 4학년이 되면서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고, 여성적인 몸이었다. 그러나 그게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산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부끄러워했었다.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여성의 굴곡이 있는 몸이 가십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지적인 사회에서 성적인 아이콘이 되는 거다. 가슴이 크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플레이보이의 표지 모델을 보면서 성적인 쾌감을 느끼고 결혼을 할 때에는 상대가 요조숙녀이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심리가 있지 않은가. 섹시하기보다는 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여성들의 외모 지상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를 통해서 거래라는 것이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몸은 꼭 아름다움을 추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흔히‘마음을 가꿔라’라는 이야기는 하지만‘몸을 가꿔라’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도구로서의 몸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자는 의미이다. 여자의 몸, 가슴, 엉덩이 라인, 생리를 하는 여성의 몸을 제대로 바라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춤은 그야말로 몸으로 하는 것이었다. 리듬과 follow가 있다. 춤을 추기 위해서 손을 잡으면 상대의 좋고 싫음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또한 춤을 오래 춰온 사람들은 춤이 익숙해지면 내 몸이 음악, 리듬, 동작, 그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가진다고 한다. 그것이 행복하다고 이야기들 하곤 한다. 내 몸이 내 생각대로 되어질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춤이 상징하는 또 하나, 그것은 문학이었다. 나에게 시라는 것이 돈이나 명예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추운 방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시를 소설을 읽는 것은 다른 세계로 훌쩍 뛰어넘어 들어가는 행위였다. 일상을 견딜 수 있게 버틸 수 있게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슈거 푸시>에서 보면 6-70이 된 할머니들이 라틴 댄스를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뒤에서 이야기한다. 저 나이에 저걸 배워 어디에 써 먹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아줌마들 역시 춤을 배워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는 삶들이라는 것이다. 일상에 지친 아줌마들에게 춤은 내가 하루에 한 번씩 소설과 시를 읽으면서 보내던 그 시간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 꿈을 꿀 수 있는 시간, 환상, 혹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춤은 더 이상 내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렇다면 내 몸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행복을 주자는 것, 그것이 바로 춤이었다.

셋. 변화.
소설 속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것을 꿈꾸며 하나같이 궁극적으로 변화하기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변화를 꿈꾸는가.

나는 한계나 상황을 박차고 나가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쓰리라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기 이전에 내 삶의 방식은 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한계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했다. 내 소설 쓰기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거푸시>에서 주인공 소희는 변화를 꿈꾼다. 소희의 현실은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희의 내면에는 변화가 있다. 좌회전했다가 베이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의 유명한 말씀인‘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예로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 말은 이미 경전에 나와 있던 말이고 성철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전‘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과 깨달음을 얻은 후의‘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분명히 다르다. 소희는 베이직 그리고 좌회전, 다시 베이직으로 돌아왔다. 결국 다시 베이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미 출발할 때의 베이직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이에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변화는 자아를 만나고,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 사이 억눌려 있던 나를 만나는 행위이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변화 역시 이런 것이다. 나의 인식이 변화하기를 원한다는 것.

넷. 일상 그리기
당신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당신을 평가하기를 당신이 소위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무엇을’쓸까와‘어떻게’쓸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항상 고민을 한다. 이것의 대립이 항상 있다. 이 둘을 다 포기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쓰다보면‘어떻게’라는 문제에 치중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쓰려는 대상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쓰려는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민, 그들의 일상의 삶이라, 그것을 위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한다. 작가로서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그럴 것이다.

다섯. 여성,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또 한 가지, 여성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냥 여성과 아름다운 여성, 뚱뚱한 여성과 날씬한 여성,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과 사랑받는 여성 등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기준들이 있다. 당신이 보는 여성을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은 이제까지 내가 소설에서 다루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그동안에는 자기의 힘으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그렸다. 그들에겐 싸워야 할 적이 있었다. 적은 가난이고 생활이었다. 오로지 그것만 해야 했다. 힘들지만 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분명했다. 그러나 <슈거푸시>에서 문화센터를 찾는 여성들은 그들이 싸워야할 대상들이 불분명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아이에게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데 정작 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면 삶을 무엇으로 버텨야 하는지 모르는 여자들의 삶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설득을 하는 사람과 설득을 당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삶에 대해서 혹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더라도 주체가 되는 사람이 있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소희의 경우 처음에는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지만 말이다.

여섯. 이야기
그렇다면 당신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너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기적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손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것, 혹은 오랜 시간의 외출을 하고 난 뒤 돌아와서 발을 주물러주며 고생했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사랑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라고 하면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하다. 자기 몸을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나 자신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역시 나는 내 주변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쓸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써야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항상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이 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혹은 작두를 탈 때, 그 굿판의 신명남과 같은 문장을 쓰고 싶다. 힘 있게 꿈틀대는 문장을 쓰고 싶다.

일곱. 터닝 포인트
당신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나.

소설 <삼오식당>을 내고 나서다. 삶과 소설 모두에서 터닝 포인트였던 시기이다. 그때까지는 나의 어머니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집은 나의 어머니가 가정의 경제를 꾸려나갔다. 내 현실을 책임지는 것은 어머니였다. 때문에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내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모습을 쓰려고 한다. 현재 한겨례 신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대하여 글을 쓰는 연재를 하고 있는 것과 문화 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과정이랄 수 있다. 자꾸 사회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려는 시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여덟. 창작
시와 소설, 각각의 매력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다. 당신의 소설 쓰기는 어떤 작업인가. 힘든가. 고통스러운가. 즐거운가. 일상인가. 특별함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인가.

시를 쓸 때는 행복하다. 현실적인 시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지 못한 것,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꿈꾼다. 그러나 소설을 쓸 때는 괴롭다. 계속해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현실과 맞짱을 뜨는 거다. 나를 들여다보고, 내 상처를 후벼 파고, 그 상처를 내 몫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힘들다. 그러나 내가 창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요즘에는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환장할 대상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겠다고 말이다. 하나에 미쳐 삶이 끝날 때까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아홉. 이명랑. 그 이름에 대하여
이명랑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가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를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다인은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사실 고3때까지 나는 이명량이었다. 아버지가‘랑’의 중국식 발음인‘량’으로 부르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3때 담임선생님이 왜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하느냐고 묻더라. 그리고 대학교 입학원서를 낼 때,‘랑’으로 표기하면서 이명랑이 된 것이다. 사실 아직도 이 이름이 낯설다. 나는 음주가무에 약하다. 술도 잘 못하고 원래 음치로 유명하다. 춤은 배우는 것은 자라는데 응용은 안 되는 것 같더라. 그런데 이름 때문인지 사람들의 기대가 있다. 명랑이가 왔으니까 분위기 명랑하게 해 주겠네 라는 식이다.
이름이 바뀐 후에 성격 역시 외향적으로 바뀐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은 나를 말없고 조용한 친구로 기억한다. 사실 약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정말로 외향적이거나 정말로 내향적이거나 말이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은 말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아이인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오버스러울 정도로 소란스러운 아이로 기억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이명랑이다. 현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소설 안으로 쏟아 붓고 있는 작가 이명랑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사람이기에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작가 이명랑이었던 것이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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