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문화를 이끌어갈 젊은 예술인

칸트는 실체와 우유성(偶有性), 원인과 결과, 교호작용을 관계의 카테고리로 보았다고 한다. 관계는 영향과 교섭에 의해 이뤄진다. 관계란, 상대성의 두 지점에 의해 발생한다. 여기 그 ‘관계’를 지향하는 조각가가 있다.


▲ 조각가 박재형
박재형의 조각은 ‘관계’를 지향한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환경조각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단원미술대전 우수상과 행주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한 촉망받는 젊은 조각가다. 2005년 COEX 야외조각전과 극장전 및 ‘직관과 은유전’ 그리고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시립조각전에 참가한 그는 최근엔 INDO-KOREA ART EXHIBITION과 단원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과 서울 메트로 비전 등에 참가하였다. 현재 서울 미술협회, 서울시립조각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그의 작품세계를 미술평론가 김종길의 평론을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박재형의 작품들이 내재적 의미로 함축하고 있는 상징어는 ‘나’와 ‘너’의 관계 맺기를 통해 드러난다. 이 의미는 사회 구성체로서 인간의 삶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듯 1980년대 후반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회구성체 논쟁은 삶의 계급성과 변혁성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박재형의 작품들은 이런 논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바라보는 사회 구성체로서 인간은 ‘나’의 자기복제에서 비롯된 ‘너’의 실체탐구이다. 나와 너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관계를 살피는 시선이 그의 언어란 얘기다. 그의 군상들은 동일개체인 ‘나’를 무수히 복제한 것이다. ‘나’를 더해 무리를 만들고, 조금씩 쌓아 올린 이 작품은 실존의 맥락에 가 닿는다. 존재에 대한 그의 물음은 사르트르보단 데카르트적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작품의 언어이기 이전에 작가에게 먼저 제시된 화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거슬러 오른다는 것〉과 〈배경이 된다는 것〉의 제작 동기를 안도현의 『연어』에서 찾았다.

“그건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야.”
“존재한다는 게 삶의 이유라고요?”
“그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 평소에 접하기 힘든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날들, 쉬운 거짓, 어려운 진실
내부로 향한 자기 세계의 확장은 그러므로 박재형의 조각이 도달한 간이역일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런 ‘나’는 다시 ‘나’에게 메아리를 되돌린다. 자신의 내부에서 요동치는 이 물음의 구체적 실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 형상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모래시계〉로 형상화되었다. 삶은 단지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반복의 시차를 거치면서 ‘동일한’ 일상을 재현한다는 이 조각은 ‘관계’의 구조를 탁월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관계항이 이렇듯 1인칭에 한정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 못한 말-key〉는 들숨 날숨의 원리처럼 안팎의 언어로 변화한다. 열쇠를 이어 붙여 자물통을 만들고 열쇠구멍을 닫아버린 작품은 관계란 것이 소통부재, 소통난해와 다르지 않음을 항변한다. 소통과 부재, 소통과 난해의 이중교합논리는 〈쉬운거짓〉과 〈어려운 진실〉에서도 투영되고 있다. 소통은 말의 주고받기가 아니다. 나와 네가 같은 방향에 서 있다 할지라도 이해의 교집합을 형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단절이며, 불통이다. 통(通)한다는 것은 서로를 꿰뚫는 행위다. ‘나’의 ‘나’를 놓아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통’이며, 관계의 행위로써 남성과 여성을 중첩해도 불가능한 것이 ‘통’이다. 작가적 체험에 의해 제작된 〈하지 못한 말-key〉는 그런 불통의 맥락이 함축되어 있다.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 적인 질문
겉과 속은 한 몸이다. 우리는 겉을 시각화하며, 겉의 언어를 기억한다. 겉은 모든 언어에 묻어있는 허구다. 반면, 속의 언어는 진실이 융기한 동굴의 그림자다. ‘하지 못한 말’은 열쇠의 그림자로 인해 속이 훤히 보이는 자물통마저 읽지 못한다. 진실의 그림자는 결코 자물통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날들〉을 보라. 나비의 몸은 가득 차 있거나 비어있다. 무엇이 가득한가? 풀리지 않는 욕망이다. 올가미에 갇힌 속은 겉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감춰진다. 무엇이 비었는가? 이 또한 욕망이다. 들고나는 욕망의 변주야 말로 ‘나’를 바로 보는 현상학이다. 편안한 인터뷰 분위기 속에서도 관찰력 있는 예리한 눈빛과 생각의 깊이, 사색이 짙은 세심한 예술인으로써의 모습을 내비췄다. 그러한 그의 관찰력과 사고력이 그의 작품 속에서 그대로 창작으로 표현된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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