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 동희스님

범패는 깊은 계곡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와 같고, 천파만파의 파도를 그리되 속되지 않고, 장인굴곡하고, 일자다음하여 유장하고 심오한 맛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움직임 없는 움직임을 볼 줄 알아야 참다운 범패승이다.”

우리나라 비구니 최초로 영산재 일부인 범패승 계보에 오른 한동희스님에게 스승 송암스님의 이 같은 가르침이 있었다. 45년 동안 송암스님의 시봉으로 범패의 길을 걸어온 동희스님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스승의 완벽함 때문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소개했다.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인 동희스님은 한국 문화와 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불교의식의 하나인 영산재는 종합예술이다. 1973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다. 49재의 한 형태로 영혼이 불교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이다. 불교 천도의례 중 대표적인 제사로 일명‘영산작법’이라고도 불린다. 영산재는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 영산회상도를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행렬의식을 하는데 이때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각종 악기가 연주되고,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을 춘다. 소리, 무용, 악기연주까지 한번에 해내는 영산재이기 때문에 불교의식 중에서도 높은 수준에 속한다. 영산재는 전통문화의 하나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부처님의 참 진리를 깨달아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하고 공연이 아닌 대중이 참여하는 장엄한 불교의식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세계 공연을 통해 예술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동희스님은 범패와 작법이라는 예술 활동을 한다. 미국과 독일, 유럽, 일본, 대만의 주요 도시에서 범패를 세계무대에 소개했다. 1995년에는‘한동희스님 영산대작법’이라는 제목으로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불교의식을 최초로 무대화한 작업으로 교계는 감동 어린 불사로 보았고, 이는 문화예술계에는 산사의 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달 말에도 미국에 가서 미국의 주류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을 한 바 있다. 동희스님의 춤에 대해서는 어느 예술가가 보아도 불교 예술만의 독특한 경지에 오른 스님의 작법에 지금까지 이런 작법이 없었다는 감탄이 따른다.

작법무 전승을 위해 자인사 건립
동희스님은 1950년 전쟁고아가 되어 서울 청량사에서 조계종 비구니로서의 삶을 시작했다.“절에 살면서 전쟁고아의 아픔을 염불을 하면서 평상심을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 부모처럼 오로지 염불을 사랑했습니다.”동희스님은 9살 때부터 춤을 시작해 12살 때부터는 부처님께 봉양하는 몸짓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즈음부터 염불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는 동희스님은 비구니로서 최초로 범패승 계보에 올랐다. 범패는 외로운 자의 다문 입을 열게 했고, 작법은 인적 없고 또래 없는 산사에서 동희스님에게 유일한 벗이 되었다. 자인사의 주지스님인 동희스님은 자인사 건립과 유지에 우여곡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13살에 열반하신 스승님 밑에서 꾸준히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열심히 배워서 훗날 공부하고픈 스님이 계시면 내가 하는 만큼 전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지난 1976년에 땅을 매입해 78년도에 자인사를 세우게 됐습니다.”자인사는 전통 불교 음악과 작법무 전승을 위한 연구실로 지었으나 지금은 어엿한 절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인사를 찾는다. “지난 2004년부터 작년까지 약 3년간 자인사 바로 옆에서 행해진 아파트 시공기간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건설회사와 관할행정부서, 그리고 지역민들의 집단이기적인 동업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은 일이기도 합니다.”라며 힘들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비구니계보를 이끌어가는 선구자 동희스님
동희스님은“춤은 부처님께 바치는 지극한 마음의 봉양이며 그 마음 자체가 예술이라는 철학적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비구니가 영산재를 했다는 기록이 없기에 비구니는 오랜 시간 이수자로 선정될 수 없었다. 비구니라는 이유로 영산재 이수자 선정을 20년이 지난 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스님은 담담했다.“스님으로서 염불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수자 선정이 되면 어떻고 안 되면 어떤가,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데에 별로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기다렸다거나 연연해하지 않았어요.”동희스님은 비구니로서 첫 이수자이기 때문에 새롭게 비구니계보를 이끌어가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73년 태고종 봉원사 옥천범음회 2기 강의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스님들을 가르친다. 범패는 악보도 무본 없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지라 동희스님만의 독특한 악보와 무본, 즉 선율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동희스님은“배운 뒤에는 그림을 곧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갇혀있지 않은 바른 제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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