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8일(프랑스 현지시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부인 세실리아와 이혼에 합의했다고 프랑스 대통령궁이 공식 발표했다. 대통령궁은 "대통령 부부는 이혼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1848년 이래 배출된 프랑스 대통령 23명 가운데 임기 중 이혼한 첫 번째 대통령이다. 대통령 부부는 아들 루이(10세)를 두고 있으며 전 배우자들과 사이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고 있다. 사르코지 부부는 서로 협의에 의한 이혼이라고 대중들에게 밝혔다.
매우 정렬적인 정치인과 평범한 여자의 삶을 즐기는 세실리아의 사랑이야기는 처음서부터 매우 별난 구석이 있었다. 가수 다리다가 노래했던 “영원하고 평범한”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거라고 믿는 과오도 범했다. 첫눈에 반하고 혼란에 빠지고 다시 이성으로 돌아오지만 결국에는 결별로 치닫는 평범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들 부부는 열정들의 가장 인간적인 간이역을 두루 거쳐 온 셈이다. 세실리아는 니콜라와 동반하면서 그를 찬양했고 받아들이고 도왔으며 동시에 애인이자 부인이었으며 파트너이기도 한 다양한 모습으로 그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83년 세실리아 나이 26세 때 어떤 레스토랑에서 25세 연상의 유명 TV 진행자 자크 마르탱을 만나 첫눈에 반한 나머지 이듬해 1984년 8월 10일 첫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의 장소는 당시 뇌이쉬르센 시장으로서 주례를 맡았던 사르코지와 운명적으로 만났던 시청이었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고 두 딸을 두었다. 그 이후 3년 뒤에 니콜라 사르코지는 RPR당의 투사인 마리와 결혼을 하였지만 세실리아에 대한 연정에 눈이 멀기 시작하였다. 세실리아의 남편인 자크는 디망쉬 마땡의 녹화방송에 니콜라를 정기적으로 초청하였다. 니콜라 역시 그의 친구인 자크와 그의 부인 세실리아를 시민의회에 초청을 하곤 하였다: 꽃, 전화, 초청장을 서로 교환하면서. 자크는 일이 너무 많아 자주 집을 비웠으며 세실리아는 언제나 혼자 있게 되었다. 그녀는 현상적 생활보다는 내적 삶을 더 바라고 있었다. 마침 세실리아의 심리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던 사르코지에게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세실리아는 그녀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던 사르코지를 위해 자크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이후 12년간 은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다 각자 전 배우자와 이혼한 뒤 1996년 10월 23일 아이 둘씩 데리고 재혼했었다. 1997년 4월 28일 그들 사이에 아들 루이가 태어났다. 그해 RPR(Rassemblement Pour Republique: 공화주의 연합당)의 정당대회에서 당원들에게 사르코지는 그의 부도덕한 결혼에 대한 야유도 받기도 했다. 세실리아는 남편 사르코지가 정치를 그만 두기를 꿈속에서도 바랬지만 마지못해 그의 정치적 도약을 위해 그를 도왔다. 1999년 사르코지가 유럽의원선거에서 패한 후 세실리아는 그가 정치판을 떠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사르코지가 정치를 그만두고 살 위인이 아님도 동시에 알고 있었다. 2005년 5월, 그녀는 <뗄레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퍼스트 레디 자리에 있지 않다. 그 자리는 나를 망가지게 하는 자리이다. 나는 정치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다. 나는 청바지와 편한 복장으로 산보하는 것이 편하다. 나는 또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유럽연합구성에 관련된 프랑스 단체회의 캠프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세실리아는 그녀의 남편 옆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 언론매체에서는 세실리아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메아리치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러마뗑 드 스위스와 라 리브르 벨지크의 신문들은 세실리아가 뉴욕으로 떠났고 Publicis Events 사(社)의 실장인 리챠드 아띠아스와 연정관계가 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니꼴라 사르꼬지 역시 피가로 신문사의 기자인 안느 필다와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2005년 8월,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리챠드 아띠아스와 함께 파리-마치에 표지모텔로 보도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러 마뗑 방송국에서 자신의 부부관련 방송에 대하여 사생활 침해와 개인의 불행을 매도하는 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스위스와 프랑스 언론에서 사르코지 부부에 관련된 무성한 소문들이 언급된 후, 결국에는 2007년 10월 18일 엘리제궁에서 사르코지 부부가 협의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세실리아의 정치적 역할
2007년 프랑스 대통형 선거이전에 세실리아는 정치적 다른 활동 속에서도 남편인 사르코지 내각의 편에서 항상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2002년부터 사르코지 내각의 일원으로서 언론매체에 등장하기 보다는 개인성이 앞선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결국에는 세실리아에 대한 모든 논쟁을 피하기 위해 사르코지가 그의 부인 세실리아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 세실리아는 그녀의 남편인 사르코지 사무실에서 공식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내각과 경제, 재정과 산업부의 기술자문원이었다. (2004년 4월 24일 토요일 공식적인 언론보도자료) 2004년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내 몸 속에는 프랑스인의 피 한 방울도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한 그녀의 말을 보도 하였다. 그녀의 말은 마린느 르뺑의 아버지이자 극우당의 당수인 쟝-마리 르뼁이 “이민(移民)의 출구”의 대통령 후보라고 니콜라 사르코지를 비판했던 이후로 2007년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에 마린느 르뺑에 의해 다시 언급되었다. 2005년 11월 16일 르 까나르 채널에 따르면, 2005년 11월 9일 니콜라 사르코지는 내부부 장관에게 “법적이고 다양한 수단의 강력한 조치”로 사르코지를 위협하는 출판사 퍼스트의 사장을 소환하도록 한다. 이 출판사는 바레리 도멩이 기자 갈라에게 싸인한 <마음과 이성 사이의 세실리아 사르코지>라는 표제의 저작물을 11월 24일 출판정지를 단행하였다. 2005년 11월 18일 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책의 출간에 관해서 그녀의 남편인 사르코지에게 주의를 준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고 밝혔다. “나의 사생활이 언론출판에 공개되는 것을 진정 바라지 않는다”, 라고 그녀는 단언하였다. 그러나 작가인 바레리 도멩은 그의 저작서가 출판되고 출판인 페이야르와 접촉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아쉐뜨 구룹의 책임자인 아르노 라가르데르가 페이야르 출판사의 책임자에게 행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바레리 도멩이 쓴 세실리아 사르코지의 전기가 페이야르 출판사에서 소설형식으로 <마음과 이성사이에>라는 제목을 달고 2006년 2월 8일 10만부가 출간되었다. 세실리아는 작가와 다양한 주제로 대담을 하고 난 후 출판에 대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자신의 전기에 대해 동의를 한 상태였다. 사실 세실리아와 사르코지 부부에 의한 법적 조치의 위협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어떤 정치인의 아내 쎄리아 미쑈-꼬르디에>>라는 문구 때문 이었다. <<어떤 여자가 또 다른 남자를 위해 한 남자 곁을 떠난다. 권력의 남자, 이 다른 남자는 이번에는 세 번째 남자를 위해 자신을 떠나는 그녀를 보게 된다. 그때부터 이 남자는 그녀를 다시 정복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라고 작가는 요약하고 있다. 몇 주 동안 언론에 노출되지 않아 무수한 소문이 퍼지고 있을 2007년 프랑스 일차 대통령선거 때, 세실리아는 그녀의 남편 사르코지와 그녀의 두 딸들과 함께 투표장에 나타났다. 그러고 나서 2차 대통령 선거 10일전인 2007년 4월 26일 외국의 다양한 신문들이 세실리아와 사르코지가 또 다시 별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알렸다. 반면 프랑스 언론들은 지나칠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은 법에 의해 보호되는 사생활의 존중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에 눈치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되는 프랑스 언론의 독립심 부족을 지적하였다. 그이후로 그녀는 2차 대통령 선거기간에도 사르코지 캠프에도 전혀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선거사무실에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르코지 편에서 더 이상 투표하지도 않았다. 일요신문 사설에 따르면 그녀는 아예 대통령 2차 선거에 투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밤 11시쯤 대통령당선자인 남편과 함께 꽁꼬르드 광장에 다시 나타났다. 대중운동연합이 사르코지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대중운동연합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역할은 하지않지만 2007년 대통령선거캠프를 위해 그녀의 남편의 캠프본부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타임즈에 의하면 세실리아는 그녀의 친구의 남편인 프랑스와와 리챠드 다티를 사르코지 진영에 합류시키라고 사르코지를 설득하였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13일, 일요신문은 세실리아가 2007년 5월 6일 제2차 대통령선거에 기권을 했다는 확인 기사를 발행하지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리베라시옹신문의 기자를 지냈던 Rue89.com 인터넷 사이트의 편집장은 사르코지 정부에 의해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아쉐트-라가르데르의 기자노동조합은 2007년 5월 14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고 정부에 항의를 하기도 하였다.
레이디 퍼스트의 역할
사르코지와의 이혼 전에 세실리아는 언론위원과 사르코지 진영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르몽드지의 기자인 라파엘과 엑스프레스 편집장인 크리스토프 바르비에에 의하면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대통령 진영 안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의 특별보좌역을 선택하고 이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르코지 대통령 집정 초기에 외교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니꼴라 드 라 그라빌르(45살)는 세실리아에게 외교업무 인수인계에 대한 조언자였다. 2007년도의 그녀의 첫 번째 외교활동은 유럽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중재를 다한 후, 리비아 트리폴리에 두 번을 방문하면서 불가리아 의사와 간호원들의 석방에 같이 수행하였다. 2007년 7월 12일 리비아 대통령 무아마르 카다피를 만나러 리비아로 갔다. 어린 환자에게 에이즈균을 전염시켰다는 죄목으로 1999년부터 리비아감옥에 구속되어있던 불가리아의 의사와 간호원을 구출하기 위한 외교적 행보였다. 이들 불가리아 의사와 간호원들은 2006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았고 유럽연합은 3년 동안 그들의 석방을 위해 중재를 한 사건이었다. 결국에는 불가리아 의사와 간호원들은 불가리아로 추방되는 형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세실리아는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하였다기보다는 프랑스 대통령의 권위를 이용한 휴머니즘적 활동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사실상 이 사건은 유럽연합과 프랑스 그리고 리비아간의 리비아병원의 현대화와 유럽연합과의 관계정상화의 합의를 본 후 불가리아 의료진들은 2007년 7월 24일 아침에 석방되어 22일 일요일부터 트리폴리에 체류하고 있던 대통령궁 비서관인 끌로드 게앙과 세실리아 사르코지와 함께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리바아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외교적 활동은 자격시비와 함께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프랑스 의회조사위원의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2007년 10월 20일 엘지와 인터뷰(요약발췌)
“(사르코지와)의 이혼은 명예로운 행위” 라고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엘(Elle)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것으로 끝이고 대통령부부는 서로 헤어졌다. 그녀의 고통의 시간들이 끝나고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는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진솔한 평범한 여자로 돌아갔다.
엘지: 당신들의 부부는 시련과 어려움들을 건너왔다고 알고 있고 당신의 남편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곁에서 레이디퍼스트의 역할을 맡기로 사람들은 믿고 있었지만 끝내는 협의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세실리아: 니꼴라와 나 사이에 많은 시련들이 있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고 다시 관계회복과 새롭게 시작하려고 서로 노력하였다. 나는 내 가족을 지키려고 시도했고 최선을 다하고 내 마음과 성심을 다했지만 위선 속에서는 살 수 없었다. 어떤이들은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안거다: 나는 의무 속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니꼴라에 대해 무한한 존중심을 갖고 있다. 20년 동안 니꼴라와의 부부기간은 축복이지만 쉽지는 않았다. 20년 동안 그를 위해 음지 속에서 살았다. 나는 불평도 하지 않았고 내 자신의 소리도 듣지 않았다. 나는 내 남편과 내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였고 그 점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또 다른 장을 넘긴다. 나는 타인들과 더불어 명예로움 속에서 살고 싶다. (니꼴라와)이혼하는 것, 그것은 어떤 명예로운 행위이다. 내 자신 속에서 비난받을 행위가 아니다.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위선적으로 사는 것이다.
엘지: 금화와 궁전, 편안한 삶, 명예들, 퍼스트레이디 역할 등. 당신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세실리아: 맞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두렵게 하였다.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막강한 권련을 갖고 갑자기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 그것은 고급드레스를 입고 미장원이나 상점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여자로 매우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마도 나는 다른 여자들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쉬운 것은 내 아들 루이와 함께 슈퍼마켓에 장보러 갈 수 없다 것이다.
엘지: 당신의 의무가 대통령의 영역으로 당신의 남편과 함께하였다고 생각하는지?
세실리아: 그렇다. 그것은 아내의 의무였다. 나는 내 남편을 위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곁에서 그의 야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니꼴라는 국가의 위대한 인물이고 프랑스를 위한 첫 번째의 인물이라는 점은 언제나 나의 확신이다. 20년 동안 밤낮으로 그를 나는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나를 필요하지 않는 시점이다.
엘지: 앞으로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세실리아: 우리 국가가 필요한 위대한 정치인이 되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내 자신이 좋지 않다면 그를 내 행복 속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엘지: 당신이 이혼의 결심을 한 순간 누구를 생각했나?
세실리아: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니꼴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하였다: “너를 위해 너의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하실까!” 이 순간에도 내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고 내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특별한 성격의 힘을 가졌고 옳음과 존엄성의 철학을 갖고 우리를 키웠다: 인생에 있어서 품위를 갖고 곳곳하기를 바라셨다; 자신과 타인들과 나란히 옮음을 행하기를 바라셨다. 내 어머니가 내게 오늘 말한다면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왜야하면 네 자신의 마음의 소리와 일치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