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집에 있는 사람, 아빠=돈 벌어오는 사람’ 공식 깨져

집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살림살이를 떠맡는 전업주부형 남성이 최근 3년 동안 34%가량 증가해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최근 고소득 전문직 여성들이 크게 늘어난 데다 가정 내에서 ‘육아와 가사는 아내 몫’이라는 인식이 바뀌고 있는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지난 10월 21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06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육아․가사활동을 하는 남성은 15만 1000명으로 집계됐다. 통계청은 초등학교 입학 전인 미취학 아동을 돌보기 위해 집에 있는 사람을 ‘육아활동 종사자’로, 초등학교 이상인 자녀를 돌보면서 가사를 수행하거나 가사를 돌볼 책임이 있었다고 답한 사람을 ‘가사활동 종사자’로 분류하고 있다. 이중 육아활동을 하는 남성은 5000명, 가사활동을 하는 남성은 14만 6000명이었다. 이는 3년 전 2003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42.5% 증가한 수치다. 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여성이 급여가 많은 직장에 다니고, 남성이 파트타임 직업을 가진 부부 중에 남성이 육아․가사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들어 전문직 여성과 여성 연상 커플이 증가한 것도 육아․가사활동을 하는 남성들이 늘어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남자도 살림한다’는 인식 변화에서 비롯
지난 2005년 종영한 SBS 드라마 ‘불량주부’에서 주인공 손창민의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영화 ‘미스터 주부 퀴즈왕’(2005)에서 한석규는 6년차 전업주부 역할을 맡았다. 한석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가사 관리에 천부적인 감각을 자부하는 일명 ‘엘리트 전업주부’였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남자주부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소재로 선택됐고, 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가정에서 가사, 육아에 대한 남성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엄마=집에 있는 사람, 아빠=돈 벌어오는 사람’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다. 과거 명예퇴직 후 집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영화 ‘해피엔드’의 최민식과는 전혀 다른 인물, 엄청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수동적으로 가정주부의 위치에 처해진 이들은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사회로 나가기를 희망했다. 자발적으로 가정주부의 꿈을 꾸는 남자들은 가정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지난 4월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남성 직장인 4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4.8%가 “배우자의 수입이 많으면 집에서 살림만 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같은 질문을 여성 직장인 319명에게 던진 결과에서는 응답자의 59.9%가 ‘있다’고 밝혀 남녀를 통틀어서는 전체의 절반 가까이인 45.2%가 배우자가 충분히 벌면 직장을 그만둘 의사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가사의 적절한 분담 정도에 대해서는 ‘사정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반반씩’이라는 응답이 64.8%로 가장 많았으며, ‘기본적으로 아내가 하고 남편이 조금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답이 33.8%로 뒤를 이었다. 하지만 남성은 ‘기본적으로 아내가 해야 한다’(49.7%)와 ‘기본적으로 반반씩’(48.3%)이라는 답변이 비슷하게 나타난 반면 여성은 ‘기본적으로 반반씩’(88.1%)이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아 시각차를 드러냈다. 기혼자를 대상으로 실제 가사분담 비율을 조사한 결과 남편과 아내가 각각 2대 8로 분담한다는 답변이 48.9%로 가장 많았고 4대 6도 30.7%에 이르러 아내의 가사 분담률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테크 전문가를 꿈꾸는 21세기형 전업주부
▲ 육아를 담당하는 남성
현재 육아와 가사를 이유로 통계상의 노동시장에서 벗어난 남자 비경제활동인구는 15만 1000여명이다. 대부분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아내에 기대어 사는 일명 ‘셔터맨’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의 전업 남자주부들은 앞치마를 두르는 것은 물론 재테크 전문가까지 꿈꾸는 21세기형 전업주부다. 전업주부 S씨는 “별 생각이 없다가 가정주부가 된 경우 못 견디겠다는 선배들이 많았다. 아직도 남자가 회사도 안 다니고 밥 짓고 살림한다는 것을 받아들이 지 못하는 세대 간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남성의 수는 외환위기의 후폭풍 속에 있던 1999년 7월 31만4000명에 달했지만 이후 조정기를 거치면서 현재 절반 수준으로 낮아진 15만명 선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
▲전업주부 2년 차인 K씨=그는 회사의 부도로 살림을 시작했다. K씨는 “주부생활을 하면서 음식남기는 것을 못 본다. 반찬, 밥 남은거 내가 다 먹는다. 아줌마들 주부생활 오래하면 왜 살찌는지 알겠다”고 말한다. 전업주부다 보니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많다. K씨는 “보통 아줌마들 애기 데리고 외출할 때 기저귀가방 들고 다닌다. 나 또한 애기랑 나갈 때 기저귀가방을 들고 다녀야 되는데, 일반 기저귀가방은 너무 여성틱(꽃무늬에 리본)해서 남자가 들고 다니기에는 민망한지라 저는 회사 댕길 때 쓰던 노트북 가방을 기저귀가방으로 썼다”며 “애기가 100일쯤 되었을 때 친구 결혼식에 애기랑 둘이 간 적이 있다. 그날도 노트북 가방에 여러 외출용 아기용품을 챙겨서 갔는데, 예식장 도착하자마자 애기가 배고프다고 떼를 써서 예식장 복도 한 귀퉁이에 서서 우유 타주고 나니까 아까 부조금 내면서 식권 안 받은게 생각 나 데스크에 식권 받으러 갔다 오는데, 노트북 가방 지퍼가 애기 분유주면서 열려 있었는지 식권 받고 돌아서는데 가방이 확 열리면서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기저귀, 물티슈, 분유통에 보온병까지. 쏟아지는 소리는 왜 그렇게 크던지. 정장 멋지게 차려입고, 어깨엔 노트북가방까지 맨 겉보기엔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이었는데 이게 왠 망신인가 싶었다. 기저귀 가방이라는게 내용물도 많아서 주워 담는데도 한참 걸렸다. 그 사람 많은 데서 주변 사람들 킥킥거리고 난리가 났었다. 그 후로는 기저귀가방을 바꿨다. 노트북 가방에서 위에서만 열리는 backsack으로. 그러고도 안심을 못해 자나깨나 가방 지퍼 열렸는지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고 전했다.
▲전업주부 9개월 차 L씨=23살 L씨는 아무것도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아빠가 되었다. 미용을 배우는 아내로 인해 L씨는 부득이하게 살림을 전담할 수밖에 없었다. L씨는 “처음, 출산 후 3개월 동안은 내가 일을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렸다. 그런데, 와이프가‘어린 나이에 남자한테 발목 잡혀 애 낳은것도 억울한데, 이 나이에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아이나 키우라고?’하며 항의를 했다”며 “할 수 없이 아이가 백일 지나고 목을 가누면서부터 내가 집에서 살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L씨는 “살림이라는 게, 꼭 힘들지만은 않다. 처음엔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정신도 없고, 힘들었었는데, 차츰 시간이 가면서 노하우가 생기기 시작하니, 오히려 재미있고 편하더라”며 “내가 워낙 짠돌이 기질이 있어서, 헛돈 새나가는건 죽어도 못 참는다. 심지어는 아이 분유 값까지 아까워서, 경품으로 분유를 타기도 했었다”고 덧붙였다. 아이 낮잠 재우고 나면 주로 인터넷 하느라 시간을 보낸다는 L씨는 혹시라도 육아 도움이 될까 싶어, 분유 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분유 한 박스가 경품인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단다. 체험후기를 쓰는 이벤트였는데 마침 L씨의 아이도 그 제품을 먹고 있어서, 그날로 당장, 실험에 몰입을 해 매일 매일 변을 체크하고, 직접 먹어보고 비교까지 해보고 하면서 결국 1등을 했단다. L씨는 “시장에서 물건 하나 살 때에도, 절대로, 절대로 창피해 하거나 대충 대충 해버리면 안 된다. 솔직히 시장 사람들도 장사꾼들인데, 남자들이 장을 보면, 가격도 괜히 더 부르고, 거기에 맞춰 가다보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나 역시도 그런 일을 몇 번 겪었다. 그러니 먼저, 남자라고 쉽게 보기 전에, 나서야 한다. 먼저,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 다음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어필로(?) 가격 흥정을 한다. 대부분, 시장에 장사하시는 분들은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남자가 물건 사면, 하나라도 뭐 더 얹어 주신다”라고 장 볼 때의 노하우를 밝히기도 했다.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발언권 확대
▲ 자녀 교육에서의 부부권력 변화
지난 10월 26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9,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수집한‘부부권력 관계’에 관한 설문조사를 분석한 결과, 2003년 조사 때보다 아내 권력 강화 추세가 뚜렷했다. ‘투자ㆍ재산 증식에 대한 결정을 누가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2003년에는 남편이 결정한다는 비율이 16.1%였고 아내가 결정한다는 비율은 14.8%였다. 하지만 2006년에는 남편 비율은 3년 전과 동일한 반면 부인이 결정하는 비율은 16.1%로 1.3%포인트 높아졌다. ‘자녀 교육’에서도 남편이 결정한다는 비율은 2003년 4.5%에서 지난해 3.1%로 하락했으나, 아내가 결정한다는 비율은 36%에서 39.2%로 상승했다. ‘아내 권력’ 강화 현상은 20대 부부 보다는 30대, 30대보다는 40대 부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 재산 관리와 관련, 아내가 결정하는 비율이 20대 부부에서는 12.6%에 머물렀으나 30대 부부에서는 16.1%, 40대 부부에서는 17%에 달했다. 반면 50대 이상에서는 다시 15.9%로 하락했다. 일상적 지출 결정에서도 아내가 우위인 비율이 20대 부부에서는 51.7%였으나 30대와 40대에서는 각각 65.9%와 68.3%로 높아진 반면, 50대 이상에서는 64.6%로 하락했다. 이는 가부장적 전통이 남은 50대 이상 계층과는 달리, 50대 이하에서는 결혼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내의 권력이 강해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동안 한 집안의 경제 중심이자 주 소득원이었던 남편 입지가 명예퇴직 임금 피크제 등으로 좁아지면서 중년층에서도 아내 입김이 세지고 있다. 노후를 대비하는 재테크에도 아내 발언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실 재테크에 는 남편보다 아내가 더 유리한 측면이 많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인터넷 등 간접 정보에 의존하지만 아내는 풍부한 ‘아줌마 네트워크’를 통해 살아 있는 정보를 접할 수 있어 투자 감각이 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물건’을 꼼꼼히 따져 보기 때문에 노후준비는 아내와 함께하는 것이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더욱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고소득자 중년 가정일수록 아내가 부동산 투자 주체로 나 서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상대적으로 남편보다 각종 여건이 유리한 측면도 있지만 커뮤니티를 통해 고급 정보를 나누고 공동 투자에 직접 나서는 등 재산 의사결정권에서 아내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재산관리에서의 부부권력 변화
가정 내부에서의 가부장적 전통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아내의 파워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와 사회적 지위 상승은 양성 간 평등 추구, 개인적 권리 존중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한 과제다. 기존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가족 구성원의 욕구와 가치관이 충돌할 수 있지만, 상호 존중과 신뢰 속에서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수정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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