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의 결별, 새로운 시작
“가슴 한가득 또 다른 감동을 품고서”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간이라는 거름종이에 나쁜 기억은 걸러져 버리고 결국 좋은 기억과 감정만이 남아 추억으로 변한다. 추억(追憶)을 사전에서는‘지나간 일이나 가버린 사람을 돌이켜 생각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의가 얼마나 딱딱하고 건조한지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변해버릴 기억, 그리고 그리움의 화석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추억 안에 보고 싶은 얼굴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신성아 기자

지나간 젊은 날은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추억은 언제든 되살아나 웃음으로, 눈물로, 그리움으로 흘러 우리들의 가슴을 적신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88년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에서 굴렁쇠를 굴려 전 세계에 진한 감동을 전했던 ‘굴렁쇠 소년’윤태웅이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 연기자로 데뷔했다. 지금 그는‘굴렁쇠 소년’이 아닌 연기자 윤태웅으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윤태웅은 최근 연극‘19 그리고 80’의 주인공 해롤드 역을 맡아 연극배우 박정자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는 지난 해 9월 해롤드 적역을 찾는 공개 오디션에서 수백 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해 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는 기쁨을 누렸다. 2005년 9월 15일 올림픽 17주년을 기념해 국민체육진흥공단에 굴렁쇠를 기증한 윤태웅은 여전히‘굴렁쇠 소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가 파란 잔디를 누비던 소년에서 진정한 연기자로 사람들 앞에 서는 날이 멀지 않음을 수줍은 만남과 신중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 이제‘굴렁쇠 소년’이 아닌‘나’로 남고 싶다
길을 걷다보면 문득 아스라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고개를 들 때가 있다. 이 답답한 도시 안에서 맑은 시골의 공기를 느꼈을 때나 내가 어렸을 적에 좋아하던 사람, 옛날에 친구들과 놀던 장난이 기억나 싱긋 웃음 지어질 때, 그리고 이렇게 잊혀져가던 기억들이 고개를 들 때면 우리는 한 없이 그 기억들 속을 헤집고 들어가 몇 시간이고 그 추억 속에 지내기도 한다. 비록 그 추억이 슬픈 것이던, 내 기억 속에 왜곡되어진 것이던지 간에 말이다. ‘88굴렁쇠 소년’이라는 이미지로 오랫동안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윤태웅은 더 이상 그때의 자신보다는 현재의‘나’로 새롭게 평가해 주길 원한다. 그는 굴렁쇠 소년으로 살아온 세월에 대해 물론 기쁘고 축복받은 일이었지만 자라면서 모두가 자신에 대해 인간 윤태웅이 아닌 굴렁쇠 소년으로만 관심을 가져 심한 스트레스와 부담이 컸다고 말한다.“굴렁쇠 소년이라는 타이틀은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중한 추억이자 값진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19세 해롤드로서의 윤태웅이지, 그 당시의 꿈 많은 어린 소년이 아니다. 굴렁쇠 소년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주시고, 이제 배우 윤태웅으로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 영화와 사진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그저 어린 소년이었던 윤태웅은 어느새 키 177cm의 건장한 체격에 태권도 4단의 만능 스포츠맨으로 성장해 있었다. 술과 담배를 못하는 그는 친구들과 만나면 주로 많은 대화를 즐긴다. 경기대 유아체육학과를 다니던 그가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결국 연기자의 길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단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에요. 전부터 영화를 대개 좋아했는데, 그저 막연하게 그 분야와 관련 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제 취미가 사진을 찍는 건데, 같이 사진을 찍는 형이 저에게서 다양한 표정의 얼굴이 나온다며 연기자의 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결국 이런 저런 현실을 부딪치면서 결심이 섰던 것 같아요.”그는 처음에 연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다 1년 동안 연기학원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연극‘19 그리고 80’의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했을 때야 조금씩 부모님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비해 더 완강하게 반대를 하셨던 아버지는 오디션을 합격하고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셨다.“다행히 어느 날, 이어령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때서야 아버지 마음이 조금씩 돌아서게 되어 지금은 부모님 모두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 배우로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
윤태웅은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총회장(IOC)에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선언한 81년 9월 30일 태어났다. 윤태웅은 만 7세가 되던 88년, 같은 날 태어난 1000여명의 경쟁자를 뚫고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으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는 행운을 안게 된다. 파란 잔디를 배경으로 홀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 윤태웅의 모습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꼈고, 그런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살면서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많은 사람들이 그 때의 제 모습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사람한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굉장한 일이구나’라는 마음으로 앞으로 연기를 통해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싶어요.”

#. 연극에 최선을 다하는 게 앞으로의 계획
아직은 연극 무대에서 윤태웅의 모습은 생소하지만,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가장 작지만 소중한 첫 걸음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주인공으로 첫 무대에 서는‘19그리고 80’은 노파 박정자와 열아홉 살 청년의 짜릿한 사랑이야기이다. 자살을 꿈꾸는, 삶에 별다른 애착이 없는 19살 해롤드가 80살의 노파 모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게 전체적인 줄거리다. 윤태웅은 이 연극에서 정말 훌륭한 선배님들과 연기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아직은 처음이기 때문에 내가 감히 대선배님들과 앞에서‘배우입니다, 연기자입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스스로의 자격은 없어요. 계속 배워나가야죠”라면서 이 연극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18년간‘굴렁쇠 소년’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관리하려고 노력해 왔고, 연기활동으로 그 의미가 퇴색될까봐 걱정도 많이 했다는 윤태웅, 이제 막 배우의 꿈에 한 발 나아간 그의 모습에서 굴렁쇠 소년의 한계를 넘어서는 맹활약을 펼치게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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