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토 전 총리 암살 후 정정 불안 계속 돼

지난 2007년 12월 27일 불안하게 유지되어 온 파키스탄 정국에 드디어 핵폭탄이 터졌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의 권력분점 파트너로 알려진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라발핀디에서 총선유세 도중 자살폭탄 테러로 폭사했기 때문이다. 부토 전 총리의 암살 테러로 파키스탄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부토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흥분한 지지자들과 시민들은 수일 째 관공서와 은행, 상점, 자동차 등에 대한 무차별 방화에 나섰고, 무장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등 일부 도시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부토 전 총리 사망 후 발생한 소요사태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개의 관공서와 건물이 불에 타거나 습격을 받았다. 이번 폭탄 테러는 특히 1월 8일 실시 예정이었던 총선을 불과 10여일 앞두고 발생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컸다. 이번 부토 암살 테러로 파키스탄 정세는 60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온정과 민주를 추진해온 미국에 있어 이번 부토 전 총리의 암살사건은 핵무기에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암살된 부토 전 총리는 누구인가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부토는 과거 두 차례나 총리직을 지낸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여성 파워의 상징이기도 했던 부토 여사는 지난 10월 8년간의 긴 해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후 총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활동을 막 재개한 상태였다. 부토는 지난 1953년 6월 파키스탄 남부 항구도시인 카라치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파키스탄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줄피카르 알리 부토였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정치학을 전공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한 부토는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녀를 맞은 것은 아버지의 투옥과 사형집행, 그리고 오랜 가택연금 등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84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면서 영국으로 돌아갔던 부토는 아버지가 창당한 PPP의 당수로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며 아버지를 사형한 군부 독재자 무하마드 지아 울-하크에 맞서기도 했다. 지아 울-하크가 사망한 뒤인 1988년 총선에서 PPP가 승리하면서 35세에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부토는 자신이 주도하는 정부가 부패 혐의를 받으면서 이듬해 첫 번째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토는 93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지만 당시 대통령인 파루크 레가리의 부패 스캔들로 3년만에 중도하차했고, 이어 99년 자발적으로 해외망명길에 올랐다. 부토는 망명 후에도 불법자금 세탁, 전투기 구매비리 등 부토의 부패상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와 지난 2006년 1월 인터폴의 적색수배 대상자명단에 오르게 됐다. 부토는 이 같은 정치역정으로 인해 실제로 이뤄놓은 성과가 미미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특히 집권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했으며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한 게 오점으로 남아 있다. 부토의 정치 복귀는 지난 2007년 10월 무샤라프 대통령과의 권력분점 협상이 계기가 됐다. 대법원장 해임 이후 거센 퇴진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무샤라프는 PPP 당수인 부토와의 권력분점을 통한 정권연장 시나리오를 택했다. 총선에서 부토의 PPP가 승리할 경우 권력을 부토와 분점한다는 계획을 짜놓은 무샤라프는 부패혐의로 고발된 부토를 사면한 뒤 귀국길을 열어줬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정국의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부토는 과거 정치적 숙적이었던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와의 연대 의사를 천명하는 등 반(反) 무샤라프 투쟁을 밀고 나갔다.

부토 전 총리 암살테러 후의 파키스탄
부토 전 총리의 피살 후 정국이 불안한 파키스탄은 현재 식량 위기까지 닥쳐 그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파키스탄 국민의 주식인 밀가루가 품귀현상을 빚어, 이대로 간다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카라치는 밀가루 때문에 그야말로 폭풍 전야다. 지난 주말 카라치 중심부의 생필품 가게인 ‘유틸리티 스토어’에서는 밀가루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은 300여 명의 시민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10여 명의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그나마도 판매 시작 20여 분 만에 밀가루가 동나 시민들이 1시간이 넘도록 거칠게 항의했다. 라호르와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된 라왈핀디 지역 역시 밀가루 품귀현상이 심각해 가격이 이전보다 최고 6배까지 올랐다. 이 같은 밀가루 파동은 부토 피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밀가루 운반 차량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정정 불안을 우려해 미리 식량을 확보해 놓으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분회사들은 밀가루 운송을 전면 중단했다. 여기에 일부 상인의 매점매석까지 가세했다. 또한 부토 전 총리의 피살 후 파키스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겨 관광업계는 아예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암살 테러 이후 정국이 혼미한 파키스탄에서 지난 1월 10일 또다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동부 라호르 고등법원 인근 광장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테러로 최소 22명의 경찰과 4명의 민간인이 숨지고 7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번 테러는 특히 파키스탄 수니·시아파 간 분쟁으로 얼룩져왔던 이슬람 신년 축제인 아슈라를 앞두고 발생했다는 점에서 추가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부토 전 총리 암살 주모자는 누구인가
▲ 지난 12월 28일(현지시간) 파키스탄의 TV 방송사 돈 뉴스(Dawn News)가 공개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피격 장면.암살범이 라왈핀디 유세장에 앉아 있는 부토(원안)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부토 전 총리 테러의 배후로는 국제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이슬람 반군세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들에게 부토 전 총리는 무샤라프 대통령과 함께 그 동안 공적 1호로 지목돼 왔다. 수차례 부토 전 총리에 대한 테러 경고도 잇따랐다. 부토 전 총리가 자신들의 대척점에 있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권좌를 지속시키기 위해 권력분점이라는 야합을 시도했다는 이유에서다. 애초 샤리프 전 총리와 함께 강력한 야권 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됐던 부토 전 총리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총리직을 보장받는 권력분점을 논의해 왔다. 이슬람권의 지지를 받는 샤리프 전 총리가 부토를 격렬히 비난한 것은 이슬람권의 지지를 잃은 현 정권을 향한 부토의 회색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더욱이 부토 전 총리와 무샤라프 대통령 간의 권력분점안이 미국 정부의 강력한 중재 하에 나왔다는 것이 파키스탄 국민의 반감을 부른 결정타였다. 미국은 대 테러전의 파트너인 무샤라프 정권이 이슬람권의 반감을 사면서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친미성향을 갖고 있으면서 야권에 상당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부토 전 총리를 끌어들여 무샤라프 정권을 연장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부토 전 총리가 수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지난 2006년 10월 귀국하게 된 데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슬람극단주의자와 알 카에다에게 부토 전 총리가 미국의 앞잡이로 비쳤던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했다. 또 하나 거론되는 배후는 파키스탄 정보부(ISI)이다. 요인 암살과 테러 사주 등 독재 권력의 수족으로 온갖 악명을 떨치고 있는 ISI가 ‘미국의 배신’이라는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해 미리 잠재적 위협 요인을 제거했다는 시각이다. 부토 전 총리 귀국 당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폭탄테러 참사의 배후로도 알 카에다와 ISI가 거론됐으나 결국 규명되지 못했다. 미국은 대 파키스탄 정책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파키스탄 내의 영향력도 급속히 위축될 것은 분명하다.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뒤 독재를 자행해 온 무샤라프 대통령을 ‘테러와의 전쟁’의 파트너라는 이유로 집착한 결과 부토 전 총리 암살로 이어졌다는 비판에서다. 부토 전 총리를 끌어들여 정정불안을 해소하고, 한편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 수행토록 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을 수 있는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토의 사망으로 야권의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한 샤리프 전 총리의 행보가 한층 주목받게 됐다. 특히 이슬람 보수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키스탄 정국 안정에 미치는 샤리프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연계돼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를 부토를 대신할 또 다른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분석은 이런 맥락에서다.

‘테러와의 전쟁’에 커다란 위협된 파키스탄
▲ 지난 12월 파키스탄 카라치 시민들이 망명생활 8년 만에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를 겨냥한 연쇄 폭탄 테러로 부상한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전략적 국가로, 세계 제일의 전략적 요충지인 걸프 지역에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그 주변에는 인도 이란, 중국 등 대국이 있으며 북쪽에는 안정할 줄을 모르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파키스탄은 인구 1억 6천만 인구로 이슬람권 나라 중 최대국이자, 이슬람권에서 유일하게 핵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핵무기, 기술유출 등의 우려가 존재하기에 파키스탄의 안정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2001년 후 반테러 동맹을 결성한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평행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독재를 실시해온 무샤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파키스탄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원조를 해왔다. 그러나 부토 전 총리 암살 테러의 성공으로 미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폭력적 소요 사태가 파키스탄 전역으로 번지면서 당장 올 1월 8일로 예정되었던 총선 등 민주화 일정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 카드를 다시 빼어 들 가능성도 있다. 이번 사태는‘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세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슬람권 유일의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이 극도의 정정 불안에 휩싸일 경우 45기로 추정되는 핵무기의 통제권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만의 하나 핵무기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손에 넘어간다면 세계는‘핵 테러’라는 전대미문의 공포에 떨게 될 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테러의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친(親)정부세력, 이슬람 과격세력, 알카에다, 정보계통, 군부 등 배후로 지목될 수 있는 세력이 너무나 많다. 수사가 미궁에 빠지면서 대립과 혼란이 극에 달할 경우‘테러와의 전쟁’의 또 다른 전선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접경 산악지대에 은신해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이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키스탄은 1998년 핵실험에 성공한 뒤 현재 80~12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러와의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는 미국 정부가 앞으로의 대 파키스탄 정책이 어떤 모습을 보일 지 속단할 수 없지만 핵무기 유출 방지가 강력한 명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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