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인의 억압과 경제자유화와 개방

미국에 의해 이란, 북한과 더불어 소위 ‘불량국가(rogue states)'로 낙인찍힌 바 있는 리비아가 2003년 말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였다. 폐쇄 속에서 벗어나 개방의 기치를 들고 국제사회로 복원하면서 국가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다. 40여 년 동안 성장보다는 사회적 폐쇄주의로 안정을 추구했던 리비아가 발전하는 개발도상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리비아는 지중해가 열려있는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나라이며 주변의 6개의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 나라들 중 아랍 국가가 셋이며 (동쪽에 이집트, 서쪽에 알제리, 그리고 북서쪽에 튀니지) 나머지 세 개의 국가들은 북아프리카에 속해 있다.( 남동쪽에 수단, 남쪽에는 차드와 나이지리아). 알제리와 수단에 이어 북아프리카에서 세 번째 큰 나라인 리비아의 국토면적은 1,759,540 ㎢이다. 북지중해성 기후에 2개의 섬(서쪽에 트리포리텐과 동쪽에는 키레나이카)으로 지형이 형성되어있다. 사막이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3개의 지방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북쪽의 시르트 사막, 리비아 사막( 리비아와 이집트가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패잔( 사리안 리비아의 남서쪽 1/4). 지중해연안 1770km 을 따라 생산인구의 90%가 집중되어 있다. ‘리비아’의 국명은 기원전 천년동안 지중해연안을 차지하고 살아온 ‘리부’라는 종족에서 유래되었다.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는 ‘리비아’ 라는 명칭이 아프리카에서 나일강 서쪽까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또 1911년에는 이탈리아인들이 트리폴리텐 지방과 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다시 ‘리비아’라 불렀다. 2004년 리비아의 인구수는 5백60만으로 산출되었다. 경제개방의 여파로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의 수가 전체 인구의 거의 20%에 달하고 산업인구의 50%에 이른다. 그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집트와 수단, 그리고 사할( 나이제리아, 차드,..등)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리비아인들의 조상은 대부분 ‘베르베르’인들이다. 8세기부터 아랍종족이 동쪽에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를 확장하면서 ‘베르베르’인들도 일찍부터 아랍문화에 동화되었다. 이슬람교는 국가 종교이고 1994년 이후로는 이슬람교의 율법이 법률에 적용되었다. 리비아의 거의 모든 국민이 이슬람 수니아파이다. 리비아 이슬람교는 수니아파 종교회에 소속되어 그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아랍어가 국가의 공식적인 언어이지만 베르베르어가 특히 트리폴리텐과 키레나이카의 오아시스 지대와 산악지역들에서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다. 리바비인들의 조상인 ‘리부’족은 기원전 12세기로부터 이집트의 파라오를 공격하였다. 그 이후로 리비아인들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남아있으면서 파라오의 용병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드트”에 의하면 기원전 945년서부터 연이어 2대의 왕조가 리비아인들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스 역사가들의 저서들에서 ‘리비아’라는 명칭은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대륙 북부 전체를 지칭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8세기서부터는 페니시아인들이 서쪽의 트리폴리텐 연안에 해외무역거점을 두었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에는 키레나이카(동부 리비아) 지방이 그리스인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1세기 중에는 실질적인 리비아가 형성된 트리폴리텐, 키레나이카, 페잔 지역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풍요롭고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던 리비아는 로마제국의 곡창지대들 중 하나였다. 그 이후 리비아는 급속하게 라탄화(化) 되기 시작했다. 몇 세기가 지난 A.D 455년에 반달족에 의해 리비아의 일부지역이 침략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하였으며 533년부터는 반달족이 비잔틴제국에 의해 또 다시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 7세기 정확하게 641년에, 아랍인들이 먼저 키레나이카를 정복하고 나서 트리폴리텐을 정복하였다. 이 지역들은 아랍화되지 않으면서 이슬람교화가 된 베르베르족들을 제외하고 점차적으로 이슬람교화 및 아랍화되어갔다. 이슬람교 정복자들은 666년에 페잔사막까지 진격하였다. 그 이후로 19세기까지 이 지역은 명확한 역사적 행보를 해왔다. 13세기부터 이 지역은 차드제국의 지배권 하에 놓여졌고 16세기에는 마로코인들에 의해 모로코왕조가 성립되었다. 키레나이카 지역과 트리폴리텐 지역의 베르베르인들은 이슬람교 하리지파를 업신여기는 아랍인들에 저항하였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엄격한 근본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12세기에 이 지역들은 노르망디인들이 정복했다가 곧 알모하드족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1551년부터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텐은 국가의식이 변했고 오트만의 지배 하에 놓여졌다. 터키 해적선의 활동 근거지인 주변 항구들의 중심도시는 트리폴리였다. 서구인들은 오트만족들이 리비아에서 영역을 넓히려는 야욕과 열정을 차단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다. 20세기의 반세기 이후로 키레나이카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던 이슬람교 수니아파 종교회는 1911년 리비아 정복에 나섰던 이탈리아인들에 맞서서 저항을 이끌어 갔다. 결국에는 오트만제국이 1912년 리비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포기하였다. 반면에 이탈리아인들의 정복은 1932년에야 완료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트리폴리텐, 키레나이카와 페잔 세 지역을 하나로 합병시키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지방이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의 통치는 리바아인들을 매우 비참하게 만들었다: 1911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이탈리아인들은 지방인구의 반을 몰살시켰거나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인들은 나라의 행정업무를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식민통치하에서 이탈리아어는 학교의 교육어 이었으나 이슬람교 아이들의 극소수만이 이탈리아식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영국이 리비아에 대한 통제권을 서로 분할하였다. 프랑스 경비군 들은 1955년까지 페잔지역에 주둔하였다. 리비아는 유엔(UN) 덕분으로 1951년에 아프리카에서 제일 먼저 독립국가로 출범하기 시작하였다. 리비아는 트리폴리텐, 키레나이카, 페잔, 세 역사적 지방으로 구성된 연방왕국으로 조직되었다. 리비아 국회는 수니아파 종교회 수장인 Muhammad Idris as-Sanusi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1951년 12월 24일, Idis 1세 왕은 리비아왕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곧 리비아는 1953년에 아랍연합기구에 가입하고 1955년에는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새로운 리비아는 자국 내에 군(軍)주둔을 대신해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받고 국가적 이득을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영어와 프랑스어가 리비아 행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아의 1958년과 59년에 석유지층의 발견은 리비아의 위상을 바꾸어놓았고 외국군대철수에 대한 협상이 1964년에 시작되었다. 사실, 리비아는 1956년 소련과 외교관계는 정상화하였지만 소련의 경제원조는 거부하였다. 1964년에는 석유개발을 위해 연방주의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국내에는 급속하게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불만의 분위기가 쌓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범아랍주의가 아랍세계 내에 창궐하게 되었다. 서방국가들의 이익에 따라 리비아의 증폭되는 종속관계는 크고 작은 사회소요들을 유발시켰다.

혁명과 공화국

1969년 9월 1일은 리비아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27살의 현역(現役)군인인 무아마라 카다피가 지위한 군사 쿠데타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무아마라 카다피 대령이 이끄는 혁명정부는 단번에 강력한 국가주의를 선포하고 영-미 주둔군과 기업들에게 즉각적인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독립이후 무아마라 카다피는 리비아에 남아있던 이탈리아 교민들을 1970년에 추방하였다; 25,000명의 이탈리아 주민이 강제로 리비아를 떠나게 되었다. 국가정체는 이집트 나세르를 본떠 그대로 모방하였다. 행정, 교육과 문화영역은 통합적으로 아랍화 되었다. 언어정책은 아랍화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반-이탈리아어, 반-영어(미국어)와 반-프랑스어의 기치를 들었다. 모든 교통신호표지판, 도로표지, 상점 간판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도록 요구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시행령은 개인의 여권에 기재되는 모든 개인정보들도 아랍어를 사용하도록 하면서 아랍화 정책은 1973년에 최고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석유개발회사는 모두 국영화되었다. 리비아의 새로운 지도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외교관계에 지대한 역할을 천명하고 아랍과 이슬람세계의 통합자로 위치하게 되었다.

카다피(Kadhafi) 대령
카다피는 1976년 그의 유명한 <그린북(Green book)>을 출간하였다. 이 저서 속에 카다피는 민주주의, “제 3세계이론”의 사회적 기본들, 경제적 문제들을 포함한 자신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저서에서 카다피는 독재로 간주하는 “서방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외부세계의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내부(국내)반대자에게도 폭력으로 맞섰다. 어떤 한 개인의 부(富)의 축적은 다른 개인의 손해를 발생시킬 뿐이라는 이유로 카다피는 개인의 부(富)를 반대한다고 <그린북>속에 썼다. 1977년 카다피는 “민중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는 인민위원회에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부여하였다. 이 정치체제는 실제로는 카다피 개인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어떤 독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리비아의 정체는 근본주의화 되었다. 카다피 정책에 다른 관점들을 표현하려는 목소리 혹은 모든 반대여론은 제거되었다. 1980년에 카다피는 가장 근본 주의적 성향을 가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한 분파인 무장세력 Al-Fatah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다른 국가주의자 혁명운동들은 제일 먼저 미국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의 이름으로 카다피 정권의 경제와 군사기술의 원조를 받았다.

리비아의 외교고립

아랍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리비아의 외교정책,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폭력행위, 세계에 대한 제3세계국가독립운동의 지지와 이웃나라들에 대한 간섭들은 국제사회협의회에서 고립을 자초할 뿐이었다. 왜야하면 리비아정권이 국제 테러리스트단체들에 지원과 원조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1986년 4월 100여명의 희생자를 낳은 리비아공습을 감행하였다. 미국의 기습공격들은 리비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국가들과 소련의 조직적 저항들만 유발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리비아는 공중비행 테러에 연루되어 미국,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국제사법에 의한 제소를 당했다; 1988년 미군군용기 폭발, 1989년 프랑스군용기 폭발. 1986년 1월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언된 리비아에 대한 금수조치가 확대되어, 1992년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해 항공, 군사의 출항금지조치가 결정되었다. 국내에서는 카다피 대령이 베르베르인들을 억압하고 공격하였다. 모든 베르베르인 군인들과 대변인은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숙청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젊은 베르베르인 Ferhat Ammar Hleb가 그의 고향인 Zouara 의 어떤 광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좋은 일자리를 얻어 잘 살고 있었다. 리비아정부는 그가 미국에서 리비아에 반대하는 자들과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하고 교수형에 처한 것이었다. 베르베르어(語)는 공공에 금지되었고 베르베르어(語)로 저술된 책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모두가 리비아정부에 반대자인 베르베르인 군인들은 유배지까지 추격을 당했으며 거기서 리비아정부의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당하기도 하였다. 80년대 말에, 카다피 정권은 이슬람운동을 하는 이슬람형제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슬람주의의 상승세를 꺾기 위해 리비아정부는 이슬람형제들을 강력하게 억압하면서 1994년 리비아 헌법의 기본이 되는 <Charia>를 채택하였다. 카다피는 천국에서 권위 있는 구어(口語)는 아랍어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카다피 대령은 이집트와 아랍-이슬람교의 나라들의 정부의 협력을 얻기 위해 이슬람주의자의 위협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그 당시에 수많은 해외거류민들이 리비아에서 거주하며 일을 하였고 추방당할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1995년 이집트인과 수단인 몇 만 명이 추방당하기도 했다.

카다피 정권의 무력함의 쇄신

리비아의 외교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카다피 대령은 사하라 지역의 나라들에 방문자들을 늘렸고 수단과 말리에 리비아들의 투자를 재개(再開)함을 발표하였으며 차드와 다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10월 리비아를 방문했던 닐슨 만데라 남아프리카 대통령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만데라 대통령은 유엔의 리비아에 대한 출항금지 조치를 비판하였고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98년 6월 아프리카통합기구는 리비아에 강요한 일방적인 비행이륙금지조치를 풀도록 결정하였다. 2003년 6월 모하메드 카다피는 <<혁명지침서>>에 1969년 카다피 자신이 국영화 시켰든 기업들 특히 국가 기간산업인 석유개발회사들을 민영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국영기업들의 폐지는 국가경제를 쇄신하고 발전시키자는 끈질긴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카다피는 평가, 도덕성과 애국심의 부족으로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본 공무원들을 비난하면서 "무책임성"의 리비아 공직을 비판하였다. 그는 국가공무원들이 이제부터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는 경제를 향해 매진하도록 지시하였다. 2004년 11월 리비아 대통령 모하메드 카다피는 리비아에서 사형(死刑)이 없어지길 간곡히 바란다고 알렸다. 그는 이런 결정은 외부세계의 압력 때문이 아님을 법관, 변호사 그리고 대학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어느 때부터 미국과 이탈리아 회사들이 리비아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지금은 리비아정부가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영역인 관광산업에 개방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카다피 대령의 <그린북>에 정의된 소수민족
소수민족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들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가? 제3세계이론의 일반적 원리들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소수민족들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소수민족들은 2가지 형태만 있다. 사회적 터전을 그들에게 제공하는 국가에 속하는 소수민족과 그들 자체가 순수한 터전을 잡아 국가에 속하지 않는 소수민족으로 나누어진다. 국가에 속하지 않는 소수민족들은 운명적 공동체와 소속행위 그리고 국가를 형성하는 행위를 통해 허용해야만 하는 역사적 전통들을 축적한다. 이 소수민족들도 그들에게 순수한 사회적 권리들을 가지는 것은 명백하다. 다수에 의해 이들 권리들의 변질은 어떤 부정의(不正義)를 만들어낸다. 소소민족의 사회적 특징들은 무기력하고 특정화될 수도 없고 지탱될 수도 없다.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권력, 부와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 다수파(민족)가 속해있는 대중사회 안에서만 문제를 풀 수 있을 뿐이다. 소수민족들을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소수파로 인정하는 것은 독재와 부정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어떤 언어학자에 의하면, <그린북>과 같은 텍스트는 “밀림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학적 문제의 말이 아니다. 문제는 리비아정부가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강압된 아랍화 정책을 실행하는데 있다. 만약에 이 소수민족들이 아랍화 정책에 대한 동화를 거절하고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를 지탱한다면 리비아정부에 의해 필연적으로 위협을 당할 것이다. 리비아정부는 아랍어 사용지역들에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모든 공무원들을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르베르어 사용 지명들을 실제로 삭제하였고 베르베르어로 저술된 책들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리비아정부는 베르베르어사용자들을 더 잘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위해 베르베르어 사용인구들을 아랍어-베르베르어 사용하는 시, 읍, 면으로 재집결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아랍화 시키기 위해 아랍어사용자들과 결혼을 하도록 베르베르인들을 부추기는 선전공세캠프가 조직되었다. 어떤 시기에는, 베르베르어로 전화 통화하다가 일단 감청되면, 전화통화는 자동적으로 차단되었다. 당연히 베르베르인 출신 성(姓)은 리비아 행정부에 의해 금지된다. 부모들은 아랍 성(姓)의 사용을 강요받고 갓 태어난 아이들은 베르베르인의 성(姓)을 선택할 수 없다. 베르베르인에 대한 억압의 또 다른 실례로, 주민 대부분이 베르베르인들인 Zouara 지역에 있는 유일한 병원이 80년대 내내 폐쇄되었다. 이 지역에 베르베르어가 사용될 시에는, 건강관리 및 치료기회를 박탈당하며 사는 주민들의 지역에 병원설립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교육과 아랍어

리비아가 독립되기 직전에 넓게 퍼져있던 문맹인구에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등교육은 무상교육이자 의무교육이 되었다. 2001년에는 어른 인구의 96,8% 이상이 문맹에서 벗어나서 문해자(文解者)가 되었다. 90년대 초에는, 12세에서 17세 사이의 청소년들 거의 80%가 교육을 받았다. <혁명지침서>인 <그린북>속에 교육과 언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 교육
지식과 교육은 청소년들이 교본에 충실하고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교육을 받는 태도와 교육방법의 프로그램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실제로 지배하는 이런 교육은 자유에 반하는 방법이다. 모든 국가들이 자랑하는 의무교육은 학생들을 강제하고 자유를 억제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 중 하나 일뿐이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재능에 대한 독단적인 "소인(消印)찍기"이고 인간개인의 선택에 대한 독재적 방향이다. 거기에는 자유에 무익한 독재행위가 있다, 왜야하면 인간에게서 그의 선택의 자유, 창조성과 재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서 교육받도록 의무화하는 것과 그들에게 어떤 교육 자료들을 강요하는 것은 독재적 행위이다. 의무교육과 표준교육은 사실 대중을 우둔하게 만든다. 교육 자료들과 교육지식을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교육을 조직화하려는 국가들은 시민들을 구속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의 모든 현행교육방식들은 인간정신을 광신적 교육에서 그리고 취미, 판단과 인간존재의 지성에 대한 권위적인 지도방향에서 해방시킬 목적을 가진 세계의 문화혁명에 의해 폐지된 듯 하였다. 그렇지만 학교를 폐지해야한다거나 혹은 천박하고 무익한 강의로 여기고 교육에 등을 돌려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사회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싶은 과목들을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용하면서, 모든 교육적 행위들을 제공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교육과목들을 위해 충분한 숫자의 학교들을 필요로 한다. 학교들의 부족은 선택의 자유를 구속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인간에게서 선택할 자연권의 박탈을 강제로 받아드리게 한다. 반동적 사회는 결과로서 무지를 초래하면서 자유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이고 지식을 제한하고 그것을 독점한다.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 모습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금지하는 사회, 종교교육을 독점하거나 다른 민족의 종교, 문명 혹은 관습에 대하여 매도하는 교육을 하는 사회, 기술적 지식을 금지하고 독점하는 사회 등이 무지를 초래하고 자유에 적대적인 반동적 사회인 것이다. 인간존재에 있어, 지식은 자연법이며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그것을 박탈할 수가 없다. 무지는 모든 사물이 현실에 제시되었을 때 그리고 모든 지식이 각 개인에게 일임되고 개인의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사용될 때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린북>의 원칙들은 적용되어졌고 아이들은 아랍어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74년 교육개혁에 관해 아래와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이슬람종교를 믿으면서 시민의 미래와 아랍성의 자랑스러운 미래를 형성하는 것에 관계된다." (Taoufik Monastiri, 사회와 문화의 연대기, AAN 1974). 리비아에서 교육은 모든 시민에게 권리이자 의무이다. 국가에 의해 보장된 그리고 의무적인 취학에 관련된 1975년 헌법 95에 의거하여 의무취학은 초등학교까지이다. 국가는 1992년 헌법1의 입법에 따라 고등교육 무상교육권을 역시 보장하였다. 국가는 무엇보다도 특히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자유의 신장에 관련된 헌법 23조항은 모든 시민은 교육권리, 정보권리 그리고 적합한 지식의 선택권을 가진다고 역시 규정한다. 리비아 공립학교들에 허용된 유일한 언어는 고전아랍어이다. 즉,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공립교육기관들에서 교육언어는 고전아랍어이다. 그러나 많은 수업들이 영어, 프랑스어 혹은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 사립학교들도 존재한다. 예컨대, 트리폴리 시(市)에 있는 프랑스 공동체학교는 대략 30개국 국적을 가진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이것은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그들의 아이들이 고전아랍어로 보다 영어, 프랑스어 혹은 이탈리어로 수업을 받기를 더 선호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베르어는 리비아교육의 혜택에 수여받지 못하고 있다. 베르베르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베르베르어 사용자들의 의도로 아무것도 해석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리비아의 교과서들에 역사와 문명 속에 베르베르인들의 성과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리비아의 최초의 거주민들(베르베르인)을 언급할 시에는 모든 베르베르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고대 아랍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1988년에 공포된, 민중의 시대에 인간권리에 대한 <초록색 대헌장>은 개인의 자유를 찬양하고 보호하며 사회의 모든 부류들에 온당한 삶을 보장하는 목적을 가진 수많은 원칙들을 규정하고 있다. <초록색 대헌장>의 원칙16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Jamahiriya의 사회(아랍근본주의)는 성스러운 곳을 위한 인간적 가치들과 원칙들을 지키고 적대성, 전쟁, 착취와 테러가 없는 인간사회를 (즉 자신보다 타인을 더 중요시여기는 사회, 모든 나라, 모든 국민과 모든 국적자들이 그들의 선택에 따라서 자유롭게 살고 그들의 국가정체성을 설정하는 만큼 자신들의 미래도 정하는 권리를 가지는 사회, 그리고 소수파(민족)들은 그들의 정당한 열망을 억압당하지 않거나 혹은 그들을 선택의 여지없이 그 어떤 다른 국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의 구성원들과 상속재산들을 보호할 권리를 갖는 사회) 갈망하는 미덕과 고양된 사회이다. 그러나 수수파인 베르베르어사용자들에 대한 <<혁명지침서>> 의 태도는 언제나 적대적이다: “ 베르베르어를 사용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제국주의에 의해 고취된 반동적 의도이다.” 70년대의 아랍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리비아에서 두 번째 중요한 언어로 더욱더 자리를 잡아나갔다. 영어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우고 있었고 대학에서는 과학, 기술과 의학 등 많은 수업들이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되었다. 1986년카다피 대령은 모든 수준의 분야에 러시아어도입을 위해 영어교육의 폐지가 목적이었던 새로운 언어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전혀 적용되지 못했다: 영어가 러시아보다 당장 더 많이 보급되어있는 현실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론매체

<국경 없는 기자협회>는 2004년 10월 리비아에서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상항에 처해있음을 알렸다. 한 부분을 발췌하면: 인간의 권리들에 대한 존중을 위해 더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주기위한 리비아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들의 자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국경 없는 기자협회>는 선언하였다. 신문과 방송매체들은 여러 해 동안 리비아정부에 예속되어있었다. 리비아대통령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되지 않으므로 모든 언론인들은 대중에 보도되기 전에 미리 자기검열을 스스로 실행한다. 리비아에 파견된 외국기자들은 철저하게 감시를 받는다. <국경 없는 기자협회>는 리비아정부는 어떤 기자 한명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동안 감옥에 구속시킨 슬픈 기록을 갔고 있었다는 것도 역시 알렸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이 두 언론매체는 공권력의 절대적 독점으로 또한 국가선전의 그리고 정보의 왜곡의 특권적 장소로 남아있다. 언어적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신문과 잡지는 아랍어로 불리어지는 매체임을 알 수 있다: Al-Fajr Al-jadeed, Azzahf Al-Akhdar, Akhbar Libya, Al-Aml, Al-Bait, Al-Fatah, 등등. News Libya라는 유일한 아프리카 잡지만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제공된다. 베르베르어로 사용된 언론매체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언론매체들 역시 거의가 아랍어를 사용한다. 라디오방송국들 <LJB Benghazi Radio(Benghazi), LJB Jamahiriya Radio(Tripoli), LJB Arabic(Misurata), LJB Arabic(Tripoli), LJB Arabic(Tobruk), LJB Tripoli(Tripoli), LJB Holy Koran(Gharghur), LJB Holy Koran(Tripoli), 등등...)은 아랍어로 방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방송사인 Jamahariya Broadcasting Corporation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방송을 한다. 리비아정부는 국가의 소수민족의 언어들, 특히 베르베르어와 나일-사라센어를 무시하면서, 강요된 아랍화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리비아에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리비아정부의 단정은 어떤 정보들에 따르면, 민족적 혈통의 이유로 차별받고 희생된 베르베르인, 트와르인, 아프리카흑인, 나일인종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리비아정부는 비-아랍어사용자들에게 아랍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억압, 고통들이 리비아에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 동안 알려져 왔다. 카다피 정권에 의해 강요된 관점들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나 모든 반대는 엄격하게 억압을 받는다. 베르베르어 사용자들은 리비아의 아랍화 정책이 비난받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카다피 정권의 희생대상들 중에 하나이다. 리비아의 언어정책은 비-아랍어사용자들, 특히 베르베르어자들에게 더욱 화해적이고 친화적이어야 할 것이다. 리비아정부는 국립학교들의 프로그램들 속에 베르베르어교육을 넣는다면 베르베르인들이 더 많이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재판소나 행정기관의 여러 정부서비스에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도록 베르베르어 사용자들에게 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에는 정부가 언론매체들,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베르베르어로 방송을 하는 프로그램 일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랍화 정책이 소수민족동화정책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불행한 사실이다.

경제의 자유와 개방

2003년에 시작된 리비아의 경제자유화는 매년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리비아의 경제자유화프로그램은 크게 다음과 같다: 사기업과 시장경제의 장려, 공기업의 사기업화,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세계무역협회 가입결정. 경제, 무역 그리고 투자관련 리비아 정부 장관에 의해 조직된 리비아 기업인들의 첫모임은 리비아 공화국 권력자들에 의해 가결된 경제자유화에 대한 선택조항협의회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리비아인민위원회의 새 사무총장인 Baghdadi Mahmoudi는 리비아의 경제자유화의 정책의 지속적 유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였다. 사기업과 시장경제의 장려, 공기업의 사기업화,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세계무역협회 국가가입결정과 국제통화기금에 협조 등은 이 같은 경제정책으로 확정된 개혁들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또 리비아 정부에 의해 리비아에 상업유통의 활성화와 성장을 목적으로 여러 다른 결정들이 확정되었다. 특히 리비아의 두 번째 큰 도시인 Benghazi와 Muserata(트리폴리 동쪽 220km)에 자유무역지대들을 설치하고 리비아에 외국자본의 유치를 요청하였다.

석유개발 외 대체산업 찾기
공기업의 적자(赤子)와 십 여 년의 금수조치(禁輸措置)와 마찬가지로 관료정치의 질곡들에 의해 거의 삼십 여 년 동안 허덕였던 국가경제가 경제개혁을 위해 2002년 카다피 대통령에 의해 발의된 리비아국가계획경제총회의 개회(開會)로 새로운 기운이 감돌 때, 2003년에 이러한 리비아의 경제자유화의 발전은 시작되었다. 이 총회가 끝나고, 리비아인민위원회총장은 국가기초공사의 재건, 석유산업의 현대화, 그리고 관광, 통신, 의료, 항공, 전기, 어업의 분야에서 지방과 외국의 투자자가 혼합된 회사의 창업을 위해 하부조직의 인민회의로부터 350억 달러의 예산을 수령하였다. 리비아 인민정부 관리들이 언제 가는 고갈될 수 있는 부(富)인 석유의 대체자원들을 찾아야할 필요성이 점점 더 의식될 때 이러한 경제개혁방향이 설정되었다. 그래서, 관광업과 더불어 자유무역지대의 설치로 무역업과 같은 매우 유망한 기업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360개 회사의 사기업화(私企業化)

2004년 1월 1일, 그때까지 공기업을 근간으로 했던 리비아경제의 복구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2008년 12월까지 삼 단계로 시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제조업, 농업, 축산업과 어업과 석유산업 부문에 활동하고 있는 360개의 기업의 사기업화를 목적으로 소유권이전을 겨냥하고 있다. 경제복구프로그램은 외국계 회사들에게 리비아의 경제를 개방하면서 은행들에게 신용과 재정능력의 기준을 부여하여 금융 산업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2005년 에 더욱 뚜렷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것은 공기업의 소유권이전을 통해 사기업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역시 2005년도에는 경제인들에게 관심을 높이기 위해, 경제자유화와 사기업화 과정에 관련된 여러 가지 모임과 학문 강연이 많이 열렸다. 2005년 12월 11일 트리폴리에서 열린 <<경제발전과정에서의 증권거래소의 역할, 경험들과 비전들>>에 대한 강연은 기업인과 경제인들에게 증권거래소의 설치 규칙들, 불리한 점과 닥쳐올 어려움, 이 문제에 아랍인들의 경험의 시험과 아울러 리비아에서 증권거래의 활성화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진취적인 정신

2006년 3월 초에 새롭게 구성된 리비아인민위원회의 사무국은 경제자유화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호전적인 경제정세의 혜택을 받으면서(특히, 국가의 중요 자원인 석유 값의 지속적 상승) 인민위원회는 "이 자유화가 가속화되고 세계경제에 역동적인 나라로 기록되기를 원한다“고 리비아인민위원회의 경제사무장인 Tayeb Saffi가 Benghazi에서 경제인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선언하였다. 이것을 위해 경제부의 전문가들은 직면하는 장애물들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를 위해 야심적인 국가경제발전프로그램실행 연구를 실제로 하고 있다고 경제부장관인 Tayeb Saffi는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취적인 정신을 가지고 회사를 창업하도록 리비아 경제인들과 젊은이들에게 권고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회사 창업에 모든 것을 뒷받침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임명권에만 집착하고 있는 정부의 공직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정부부처들이 1억3천3백만 디나르의 융자특혜를 주어 어떤 구(舊) 항공사를 혁신시켜 새로운 회사를 만든 Al-Buraq 항공사를 예를 들며 설명하였다. 지금 이 항공사는 성공의 모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리비아의 경제를 자유화시키고 경제를 더욱 능률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리비아정부가 참여한 프로그램발전은 최고점에 달했다 그러므로 이 프로그램은 더 경쟁력이 있고 특히 세계경제의 현실에 더욱 잘 적응된 경제와 리비아기업들이 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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