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혁명은 진행 중인가?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 40주년
- 아직도 혁명은 진행 중인가?

1968년 5월 봄에 프랑스 사회운동이자 동시에 학생·노동자운동이었던 프랑스 5월 혁명(Mai soixante-huit)이 일어 난지 올해로 40년이 되는 해이다. 프랑스의 수많은 학생들이 물꼬를 튼 이 운동은 프랑스 외 다른 지역 특히 독일, 미국, 체코, 일본, 이태리, 멕시코와 브라질 등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크고 작은 사회적 사건들을 유발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이 사회적 사건들이 역사적 혁명의 파장을 일으켰다. 왜야 하면 이 사건들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들을 수반했으며 1935년 좌파성향의 정당들이 연합하여 저항했던 <대중연합전선> 이후로 가장 심각한 파업들이 파생하였고 국가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이 사회운동은 공식기관들, 회사, 관청, 고등학교와 대학교, 극장, 청소년관과 문화회관 내부에 수많은 비공식 모임들을 결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샤르르 드 골> 대통령은 이런 저항운동들을 과소평가하며 “난장판모임”이라 하여 일축하였다. 결국에는 <샤르르 드 골> 대통령도 그들의 문제를 국회에서 논하게 되었으며 조기선거를 준비하게 되었다.


혁명의 발단
무정부주의자들과 과격파학생들의 소규모 그룹들에 의해 사회문제를 제기했던 3월 22일의 운동은 <낭떼르 대학교>(파리 10대학) 주변들을 시위대가 점령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들의 중요하고도 강력한 요구는 베트남 반전 시위 때 작동된 체포, 구금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은 일상적 생활에 연관된 개혁안들도 포함되고 있었다.(예컨대 대학교기숙사의 여학생동에 남학생들의 출입허용요구). 선진적인 활동가가 수업중인 교실로 순회 돌입하는 등 반란적인 직접행동으로 대중반란을 조직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방식이 68혁명의 특징인 행동위원회 운동의 시작이다. 반란투쟁은 대중과 대결하여 대중을 반란행동에 연대하는 부분과, 반대 행동하는 부분, 중간적인 동요부분으로 분열시키고 반란에 적대적인 부분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대중의 분해와 분열을 철저하게 촉진한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주동자는 <Daniel Cohn-Bendit>였다. 그는 전제주의를 반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낭떼르 대학교>의 영어과 교수이자 1949년 <공꾸르>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인 <Robert Merle>는 ‘3월 22일 날’을 묘사한 완벽한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 속에 이 사회정치운동의 원인과 이상에 대해서 서술하였고 시대의 많은 지도자들을 등장시켰다. <프랑스 국립영상 자료원>의 자료들에서도 대학생들의 시위와 1천5백만 명의 파업자들이 집결한 공장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분석가들에 따르면, 이 운동의 원인들은 다양하다고 한다. 그들의 분석들을 보면, 어떤 과도한 경직성이 인간관계들과 관습들을 격리시키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에 따른 재건시기 이후로 물질적 토대의 빈약함에서 그 원인들을 찾고 있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도시빈민가가 수도에 형성되었으며 특히 <낭떼르> 주변에 많이 형성되었다. 그 주위의 학교를 오가던 학생들이 이 지역의 가난과 노동자의 조건들을 들추어내고 이슈화하였다. 학생들에 의해 싹튼 사회불만은 여러 해 동안 쌓여있던 노동자지역으로 그 불만이 이어갔다. 이로써 1963년 광부들의 대파업 이후로 1966년과 1967년 사이에 과다한 파업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사회운동은 ‘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베트남전쟁의 잔혹성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냉전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동시에 극좌파 투사들은 소련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프랑스공산당을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두 노동조합의 하나인 CFDT(프랑스민주노동조합)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운동을 지지하였고 또 다른 CGT(노동일반조합)은 처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젊은 노동자들은 <그르넬>(중재장소)의 동의들을 거절하고 “시작일뿐이다, 투쟁을 계속하자”고 외치면서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급속하게 상황은 협의회들과 토론과 행동의 또 다른 단체들 속에서 비판들과 새로운 중재자들을 찾고 있던 조합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최근에 산업화된 서부지방에서 노동자, 농민과 학생들이 조합을 초월하여 새로운 단체들을 결성하였다.


경제, 정치와 문화적 상황
프랑스는 경제계획에 따라 2차 세계대전 후의 재건시기인 1945년에서 1973년까지 경제발전은 최고점에 달했다. 반면에 많은 빈민가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소비사회의 모든 결과와 경제발전의 세계적 불균형에 대한 사려 깊은 인식 없이 소비사회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얼마 전부터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악화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실업자수는 규칙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1968년 초, 실업자수는 이미 50만 명에 달했다); 실질봉급은 하향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실생활의 조건들은 국가차원에서 타격을 받았다. (예: 1967년 사회보장법령). 정치적 상황을 보면,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식민지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958년 외부상황들(알제리에 무력행사와 폭동) 덕분에 권력을 쥐게 된 <드골>은 시대가 요구하는 추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행정부를 강화하는 구조조정(보통선거와 국민투표의 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강화된 정부)과 자유진영과 좌파의 소수파들과 더불어 드골이 실행했던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의 자본주의 국가의 재정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 나갈 수가 없었다. 높아만 가는 국민의 불만 앞에서 <드골>은 단지 국가위신을 높이기 위한 외교정책만을 제안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프랑스는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던 식민지들마저도 곧 잃게 되었다. 국제정치의 분위기는 자본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 사이 냉전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모든 국가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어떤 정치체제이던 젊은이들은 그들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맞서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저항하였다. 이것은 ‘좌익성향주의자들’(트로츠카파 사람들, 마우찌뚱주의자들…)의 재등장의 단초가 되었다. 이 ‘좌익성향주의자들’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가시화된 ‘미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대다수가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베트남연합’ 단체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냉전시대’는 세계의 비-핵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자는 생각들을 낳게 하였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단의 역동적인 힘은 1960년대에 모든 단체들과 기업들에서 펼쳐졌다. ‘토론’은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분열은 극도로 심화되어갔다. 독선적인 온정적 간섭주의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남녀공학고등학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교들은 남학교와 여학교로 구분되어 있었다. (심지어 여학생들은 바지를 입고 학교에 등교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는 1967년부터 피임약사용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사회관습적인 제약을 받았고 교육은 여전히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남아 있었다.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욕구와 사회적 도덕의 범주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 운동들의 국제적인 성격은 순수하게 프랑스의 그것과는 상대적으로 보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1965년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의 ‘홍위병’들의 출현은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정치권력을 소유할 수 있고 ‘어른’과 ‘권력’의 권위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1968년 독일에서 학생들과 시대를 책임지고 있는 ‘기성세대’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을 그 당시의 진행과 그 이후의 상황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여러 작가들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1964년 프랑스에서 발간되고 1968년 재판으로 나온「산업사회의 이념에 대한 숙고」라는 부제를 단 <Herbert Marcuse>의「일차원적 인간」; 1967년 출간된 <Raoul Vaneigem>의 「청소년이 살아가는 법」; 1967년 출간된 <Guy Debord>의 「광경의 사회」; 그리고 나중에 1972년에 발간된 <Gilles Deleuse>와 <F&eacute;lix Guattari>의 「반-에디프스」.
매우 가톨릭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 프랑스는 가톨릭주의와 특히 가톨릭 사회운동을 심하게 요동시켰던 ‘바티칸 종교회’를 열정적으로 추종하였다. 그러나 무시 못할 수의 젊은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되고 시대의 요구에 참여한 프랑스의 <보이,걸스카우트>는 1964년부터 군대조직의 모델을 재검토하고 결정사항들에 대한 집단체제를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조직 안에서 계급적 관계들을 수정하였다.

사건들
5월 3일, <소르본> 대학을 점령하고 극우학생운동의 돌발적인 공격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시위대학생들은 경찰의 물리적인 개입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에 학생회장인 <Jacques Sauvageot>도 포함되어있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한 경찰병력에 대항해서 격렬한 시위로 반응하였다: 투척과 바리키트치기가 반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위들로 인해 많은 시위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자유에 대한 ‘슬로건’들이 시위대를 장식하고 있었다. <고등교육조합>의 조합장인 <Alain Geismar>는 시위자들을 지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공산당과 급진주의자들은 이러한 시위들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혁명은 노동자계급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학생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3월 22일 학생운동’의 요구들은 ‘철없이 순진’ 하고 ‘소-부르주아’로 그들에게 보였다. 한동안의 소요사태가 있은 후, 어쨌던 그들은 혁신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한편 CGT(노동일반조합)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고 <노동일반조합>의 사무장인 <Georges S&eacute;guy>는 그 이유에 대해서 언론매체에 설명하였다. 그러나 좌파의 전통적인 조직들의 일반조합원은 그들의 책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파업과 자발적인 공장점유는 5월 중순까지 발생하였다. 첫 번째 파업과 공장점유는 2682명의 직원들이 참여한 5월 14일 <낭뜨>의 <쉬드-아비아씨옹> 공장에서 일어났다. 5월 22일, 천만 명의 직장인들이 파업과 출근방해를 하면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조건들은 전통적인 요구들(봉급인상, 최선의 노동조건)과 동시에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질적인 요구조건과 관련 된 것이었다.(기업의 공동경영방식으로 한 회사원들의 책임과 자율의 신장).
모든 나라의 국적에 관계없이 인력개방을 하고 발언권을 더 확대시켜나가려고 하였다. 격렬한 토론들이 세대를 넘어 누구던지 길거리에서 펼쳐졌다. 이러한 토론들의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는 <파리>의 <오데옹>극장이었다. <르노>회사의 노동조합대표들, 주부들, 학생들, 노동자거주 변두리에 위치한 고등학교 학생들 단체, 유명한 예술가들, 교수들,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시의회의원, 회사의 한,두 명의 간부들이 밤낮으로 매우 진지하게 토론을 하면서 서로 대치하였다. 한편 극장무대 뒤 출연자 대기실에서는 성적 자유와 해방을 호소하면서 열띤 논쟁을 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관계없이 공허한 집단의 힘으로 다소 엉망이 되었지만 여러 단체들의 투쟁자들은 국회에 동의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바레리 지스까르 데스뗑>은 그들의 공장을 점유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만나러 새벽에 혼자서 왔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의 정치인들은 소극적인 태도로 몸을 사리고 있던 상황에서 의외의 그의 행동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5월 13일 대규모의 시위대가 <파리>를 관통하였다. CFDT(프랑스민주노동조합)은 백만 명의 시위자들이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파리시경>은 20만 명의 시위자 조차도 허용하지 않을 태세였다. 파업은 한달 새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것은 역사상 첫 번째의 격렬하고 거친 총파업이었다. 공산당은 극좌성향을 띠고 있다고 본 학생운동을 널리 알렸다. 파리의 <라뗑>지역에서 대치상태 중에 한명의 시위자가 칼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경찰의 진압에 맞서 군중은 바리키드와 십 여대의 자동차의 파손과 도시건물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위해 진상과 원인을 밝히려고 하였다. 이런 사건들 발발 초기에 <루마니아>에 공식 여행 중이었던 <드골>대통령은 처음부터 이들 시위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드골>대통령은 이 시위문제는 수상인 <죠오지 뽕삐듀>에게 맡겼다. 마침내 <드골>대통령은 현 사태를 풀기 위해서 또 다른 여행 아프가니스탄 방문은 중단되게 되었다. 또한 <드골>대통령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병력에게 <소르본>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드골>대통령이 망설이다 양보했지만 사실 이 운동은 전략적인 것 이었다: 그는 학생들에 관련해서는 책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폭력행위들은 그들의 정당성을 잃게 하였다. <드골>대통령은 별도로 부득이 할 경우 개입할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드골>대통령은 몇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다수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죠오지 뽕삐듀> 수상은 새로운 입법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요구조건들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유도하는 학생운동은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올바르게 판단하였다. <드골>대통령도 수상의 의견에 동의하고 라디오방송을 통해 간략하게 국회의 해산을 알렸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드골>과 <죠오지 뽕삐듀> 사이가 급속하게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5월 30일, 작가 <안드레 말로>와 <미쉘 드브래>에 의해 주관된 ‘정부지지’ 가두캠페인이 열렸다. 이 가두캠페인은 시경에 따르면 30만 명의 시위자들이 집결했고 ‘드골파’들에 의하면 100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5월 혁명의 영향
▶ 정치
- <그르넬>의 동의
월 600프랑의 최저임금 35% 인상과 임금의 10% 인상, 1968년 12월 27일 법으로 실행된 기업내의 조합의 설립과 유급휴가 4주 등이 관철되었다. 이것은 고급 공무원이었던 이후에 대통령이 된 젊은 <쟈크 시락>에 의해 진행된 중재들에 따라 <그르넬>의 동의가 실행된 것이다. 파업과 시위에 참여한 직원들의 복직은 6월 초에 점차적으로 실행되었다. 경찰과 헌병은 점령된 다른 지역들에서 점차적으로 철수를 하였다. 운동에 관련된 사건들로 인해 직접적으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 1968년 5월 30일 국회해산
1968년 6월 입법선거는 ‘공화국의 수호를 위한 연합’이라 불리어진 당을 재조직한 ‘드골주의자’ 들의 매우 큰 승리로 보여졌다. 공포정치로 다시 돌아간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저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해답은 정치, 사회운동 밖에서 찾아야 했다.

- 지방자치제 관련선거와 1969년 4월 27일 상원의 역할과 <드골> 장군의 출발
<드골>장군은 1968년 5월 선거를 간절히 바랬다. <죠오지 뽕삐듀>는 <드골>을 옹호하였고 국회해산을 맞이하게 되었다. <드골>은 선거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5월은 국민에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를 바라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국가결정기관’들을 분산시키고 상원의원들의 자격기준도 바꾸면서 다시 재정비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이 선거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드골>은 이 선거에서 프랑스국민들이 ‘반대표’를 던져 부결된다면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자신의 모든 정치력을 시험하였다. 결국에는 투표율 80,13%에 유효투표 77,94% 반대 52,41%로 부결되고 말았다.

▶ 문화
일반적으로 1968년 <5월 혁명>은 기존질서를 붕괴시킨 가장 큰 항거였다. 프랑스의 체재구조특성은 내재적인 지적 저항과 외재적인 노동자계층과의 사이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5월 혁명>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프랑스문화의 갑작스런 개방을 강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사회와 가정, 현대사회의 세계화에 대한 의식의 중요한 단계(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소비사회’의 서구모델에 대한 재검토 등 정신적, 사회구조적인 내적, 외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사실, <5월 혁명>의 중요한 영향 중에 하나는 <5월 혁명> 20주년 행사 시에 <프랑수아 미테랑>이 그것을 재인식하였던 사회-문화적인 분야에서였다.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분야와 일반적으로 통치체계의 전투적 태도는 프랑스 국민들의 민심이반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1981년 <프랑소아 미테랑>의 좌파연합이 집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월 혁명>은 지금은 정치적인 부분들과 선거진영들에서만 존재할 뿐인 ‘좌-우 갈등’의 최후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5월 혁명> 중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프랑스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주었던 정치적 분리를 낳게 하였다. 예컨대, <리용2대학교>의 이념대립에 의한 인문과학대의 분리를 들 수 있다. 1920년 <레닌>에 의해 지어진 ‘좌파주의자’에 대한 경멸적인 수식어(예: 공산주의의 소아병)가 일반언어 속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5월 혁명>의 결과로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가치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가치들을 나열하면, 자율권, 개인의 자아실현의 우수성, 창조성, 다영역성과 사회의 전통적 규범들의 거부와 권위에 대한 재검토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규범들에 대한 재정립은 조합의 자주관리와 공동체라는 이념의 범위에서 만들어졌다. 자주조합관리의 개념은 공동경영의 개념과 서로 경쟁을 하며 오늘날까지 집권정권의 정치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다.
성적 자유와 해방은 피임약의 사용과 상관적으로 <5월 혁명>의 큰 주제들 중에 하나였다. ‘페미니즘’ 역시 가장 기본적인 그의 운동과 함께 ‘여성행방운동’을 열어나갔고 ‘페미니스트’들의 주제를 가지고 전통적 보수주의와 내측파열을 일으키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주제는 ‘유산 허용’, ‘부부간 역할들에 대한 재검토’ 따위가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인 공산주의자들의 사회고발들이 확고히 되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한 동안 나타났던 극좌파와 <마오찌뚱 주의자>들의 격렬한 정치참여 후에 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프랑스 국민들은 가졌다. 그러나 좌파들에게서 ‘페미니즘’은 일반화되고 보편적 개념이었다.
<5월 혁명>의 영향은 프랑스의 교육제도 안에서도 나타났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은 교육의대상에서 주체로 바뀌고 이것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공동교육체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발언권과 토론의 영역은 확대되어나갔다. 자율학습권은 교육현장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교육자들은 자신의 직업 활동에서 때때로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너무 관대한 이 교육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 변화는 역시 학급회의에 학생과 학부모의 참여와 1968년 6월부터 교육기관들 내 학업규칙과 학업행정에 대한 재정립의 원천이 되었다.


5월 혁명의 평가
68혁명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동을 전개해나가지 못했고, 개혁의 청사진을 뚜렷하게 제시하지도 못했다. 68혁명이라는 커다란 위기가 있었음에도 1981년까지 우파정권이 계속 집권하였다. 이런 면에서 68혁명은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68혁명은 많은 함의들을 남겨놓았다. 우선 산업화된 국가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창설 이후 50년간 사회주의의 전망은 68혁명이전에는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다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의제가 다시 복귀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1968년 이후 권력 구조를 능률화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참여의 외관을 부여하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취업시장과 대학 커리큘럼에서 정부계획의 확대는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들과 대학 졸업자들의 수를 대폭 감소시켰다. 프랑스의 형식주의는 교실과 공장에서 완화되었고 학내문제는 학생을 포함하는 협의회에서 검토된다. 전체 대학시스템은 개별 학교들을 위해 다학제적 측면에 초점을 두어 공동 운영하는 것으로 재조직화되고 있다. 68혁명은 선진자본주의 내부의 투쟁의 중심이 노동자대중 내부의 혁명파와 질서파 사이에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보여주었다. 프랑스공산당, CGT에 의해 혁명이 조합적, 의회적 투쟁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이를 읽어낼 수 있다.

결론
5월 혁명 또는 '68년 5월 혁명 (프랑스어: Mai 68, 영어: May 68, 독일어: Mai 68), 또는 프랑스 5월 혁명은 프랑스 <드골>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을 뜻한다. 당시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좌익이었지만, 현재 좌익 정치단체나 노동조합은 이 운동과는 별개이다. 이 사건은 교육체계와 고용이라는 측면에서 ‘구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이 혁명 초기에는 파리의 몇몇 대학교와 고등학생, 대학 행정부와 경찰에 대한 학생 파업으로 시작했다. <드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파업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는 운동의 열기만 점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라틴 지구의 경찰과의 가두 전투를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과 파리 전 노동자의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파업으로 이어졌다. <드골> 정부는 이러한 반정부운동자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했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1968년 6월 23일에는 다시 총선을 실시했다. 이즈음의 정부는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드골>은 독일군 주둔의 비행 기지로 잠시 피하기까지 했으나, 혁명적인 상황은 시작될 때처럼 갑자기 몸을 감추고 말았다. 좌파 연합인 노동 총연맹과 프랑스 공산당의 기만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복귀했다. 6월에 총선이 이루어지고 나서 <드골>의 정당은 이전보다 더 힘을 얻게 되었다. 저항자들에게 68년 5월 혁명은 실패였으나,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에 대한 보수적인 경향이 평등, 성 해방, 인권 등의 진보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프랑스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 한달 동안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68년 5월 혁명은 이러한 가치의 이동의 싱징이 되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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