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쓰촨성 지진 참사

[르포] 중국 땅이 흔들리다
- 중국 쓰촨성 지진 참사

2008년 5월 12일 중국시간 14시 28분 04초에 진도 7,9를 기록한 지진이 중국 남서쪽에 위치한 쓰촨성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축의 흔들림이 중국 주변국가인 태국, 베트남, 그리고 타이완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강도 높은 것이었다.

5월 13일 오후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에서도 여진이 발생했고 진도 6,1을 기록한 강진이었다. 5월 12일 진도 7,9를 기록한 이후로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 쓰촨성 지역의 지방도시와 마을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여진으로 인해 공포와 불안 속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관공서건물보다 피해가 큰 학교건물
5월 14일 파괴된 학교건물의 잔해에 매장된 수많은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의 희생에 관련해서 여론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진원지에서 제법 가까운 도시와 마을의 많은 학교건물들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희생된 것이다. 5월 14일 현재, 희생자의 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학교건물의 피해에 대해서 의문과 연루된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여론이 팽배해 졌다. “붕괴된 학교건물이 정부기관건물보다 왜 이렇게 많은가?” 언론과 여론은 끝임 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었다. 중국 중앙방송은 듀잔안 도시의 인구밀집지대에 위치한 쥬얀중학교의 건물붕괴를 보도하면서 많은 것을 숨기는 듯 했다. 900명의 학생들이 잔해 속에 갇혀있었고 이미 60명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수상이 현장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위로하였지만 헛되기만 했다. 이웃지방의 여러 학교건물 역시 붕괴되었다. 중국텔레비전의 보도에서 다루지 않은 것은 영국의 일간지 <The Guardian>의 기자가 보도한 쥬안중학교의 학생들의 부모들이 급속도로 격앙되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들도 이번 지진에 지탱하였는데 불과 10년밖에 안 된 학교건물이 아이들이 피신할 틈도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방행정 관리인들의 부패에 연루된 인재에 가까웠다: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의 참사이다. 그들은 일순간의 유흥을 위해 돈을 사용했지 우리 아이들의 좋은 학교를 짓기 위해 돈을 쓴 것이 아니다… “.


재정지원이 열악한 중국의 지방교육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수 1억9천3백만 명 중 70%가 농촌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도시와 시골의 증대되는 격차는 교육 분야에서 특히 그러했다. 시골 학교의 보잘것없는 보수를 받는 선생님과 열악하고 노화된 학교 건물들을 보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근래에 중앙정부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기하였다. 서부의 가난한 지방들에서는 무상교육이 실시되었고 학교의기초공사에 필요한 중요한 자금들이 유입되었다. 중국정부의 2008년 3월 보고에 따르면, “국가재무부는 시골의 22,000개 이상의 초, 중등학교의 낙후된 건물을 재건하고 7,000개의 초등학교를 건설할 목적으로 특별예산을 집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10년간의 방치상태의 지방교육환경을 개선하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지방 공무원들의 고질적인 부패였다. 건축사업은 부패와 쉽게 연결되었고 언론은 건축사업과정의 문제점들을 규칙적으로 고발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지방 공무원들은 업자들에게 돈을 받고 매수되고 국가에 의해 지급된 자금의 일부를 착복하여 건축의 질을 떨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번 학교 건물들의 잇따른 붕괴는 정부의 잘못과 공무원들의 부패를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재앙 속의 희망과 절망
새벽이 밝아오자 생존자들이 행방불명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재해 지역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전쟁터의 피난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진참사이후 그들의 격은 이야기들은 고난과 시련의 필사기 이었다. 하남 중부지방을 여행 중이던 여행객 Cai Hongwei는 그의 자동차가 지반 침하로 인해 정지되어 그의 5살 난 딸을 데리고 이틀 밤낮을 산길을 걸어왔다. “갑자기 자동차의 바퀴가 이상하게 움직였고 우리 눈앞에 늘어진 자락처럼 한 산의 모습이 보였다”고 기진맥진하여 울고 있는 그의 딸을 달래면서 그는 증언하였다.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4명의 사람들이 산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바위들을 피하면서 하얀 천으로 가린 시신 1구를 옮기고 있었다. “이 여자는 우리 마을의 병원 의사였다”고 그들 중 한 사람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진도 7,9의 지진으로 적어도 3개의 도시가 파괴된 원츄안 지역으로 가는 길은 엿가락처럼 꾸불꾸불한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도시의 2/3의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Yingxiu시의 전기공 3명은 부상당한 그들의 동료를 50km나 걸어서 부축해왔다. “땅이 흔들렸을 때 그는 고압전선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가 뛰어내려 다리를 다쳤다”, 라고 한 전기공이 이야기하였다. 붕괴로 인해 Yingxiu의 파괴된 길을 굴착기로 힘들게 정리를 하는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친지의 소식을 알고자 멀고 위험한 산길을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40살의 Chen Shihui라는 여자는 슬리퍼만 신은 채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고 15살 난 그의 아들이 무사한지만 걱정되어 무작정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머지않아 터널 가까이서 그녀는 완전히 지친 나머지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내 아들을 보기 원한다. 거기에 어떻게 갈지 알 길이 없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라고 흐느껴 울면서 그녀는 애원을 하였다.
반면에 이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노상에서 다행스럽고 극적인 재회들도 있었다. 31살의 Li Xiaoping은 그의 아내가 터널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지진으로 생이별을 했었고 내 아내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나는 어떤 심각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구조작업에 참여하여 군복을 입고 있는 그는 말하면서 “살든 죽든 나는 더 이상 내 아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외쳤다. 청두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 교사 Robert Weaver는 두 명의 친구들과 참사지로 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친구인 미국인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이 잘 있는지 보러 가고 있다”. 수백 명의 인민무력 경찰들도 적기를 흔들며 군가를 불어대며 진앙지역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붕괴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는 한 티베트 운전기사는 판매할 텔레비전을 가득 실은 트럭 안에서 복구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2주 동안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인스턴트 국수 이외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도 삶아 먹을 방법이 없다. 개울물을 먹고 있지만 매우 깨끗한 물도 아니고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후진타오의 지진참사지역 시찰
중국 주석 후진타오는 5월 16일 지진 희생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구조요원들은 2배의 노력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구조작업은 가장 중요한 단계로 도립했다”, 진도 7,9의 지진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도시 중에 하나인 Mianyang에 오전에 도착한 국가 주석은 위와 같이 말하였다. 국가관측소에 따르면, 진도 7,9의 이번 지진은 쓰촨성의 지방에서 5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었다. “우리들은 모든 노력을 다하고, 시간과 싸우고 구조작업의 마지막 승리를 확신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한다’, 라고 후진타오는 말했다. Mianyang 공항에 도착한 후지타오 주석은 쓰촨성에서 5월 12일부터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수상인 원지아바오와 회의를 하였다. Mianyang 시에서만 8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고 나서 많은 피해를 입은 다른 지역 Beichuan에 도착한 후진타오 주석은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부상자를 돌보고 기초시설을 복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도전은 여전히 중요하다, 해야 할 일도 여전히 어렵고 시간은 촉박하다”, 라고 그는 말했다. <중국 새 소식> 통신은 이번 지진은 1949년 건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것이었다고 수상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지진의 잔해 속에서 구출된 63명의 생존자(5월 17일)
중국 남서지역을 폐허로 만든 지진 발생 후 5일째에 구조대원들은 붕괴된 건물 잔해에서 적어도 63명의 생존자들을 구출하였다. 구출된 생존자들 중에 56명은 이번 지진의 진원지였던 Wenchuan주에 있는 Yingxiu에서 구조되었다. 57번째 생존자는 Yingxiu의 폐허 속에서 124시간이 지나서 구조되었다. 나이가 불투명한 젊은 남자였다. 6명의 다른 사람은 중국의 다른 지역인 Shifang과 Dujiangyan의 도시에서 지진 발생 후 거의 120시간이 지나서 구조되었다. 61살의 여성은 러시아 구조대원들에 의해 5월 17일 밤에 Dujiangyan에서 구조되었다. 이것은 외국인 구조대의 첫 번째 구조 활동이기도 했다. 그녀는 잔해 밑에서 127시간을 견디어 내었다. 또한 Dujiangyan에서 46살인 Zhang Xiaoping은 주택건물의 잔해더미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129시간 버티다가 구출되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두 다리 절단수술을 받았다. 지진에 의해 초토화가 된 쓰촨성 지방의 진원지인 Beichuan에서는 52살과 69살인 두 남자가 콘크리트 더미에서 빠져 나왔다. 60대 노인은 119시간 동안 더미에 묻혀 있었다. 지방 관료들이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보는 Deyang 도시에서 31살의 여성이 구출되었다. 33살의 한 남자는 Shifang의 이웃 도시에서 잔해들을 헤치고 스스로 살아 돌아왔다. 이 구출들은 기적과 다름없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72시간이 지나서는 생존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붕괴된 건물 아래에서 찾은 시신들은 그 후 수천 명을 헤아렸고 5월 17일 현재 중국정부가 집계한 사망자의 수는 5만 명 이상에 달했다.

북한의 10만 달러 대중원조
중국의 혈맹국 중의 하나인 북한은 지진참사의 희생자들을 위해 10만 달러를 중국에 제공하였다. “북한정부는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의 인민들을 돕기 위해 중국정부에 1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라고 북한의 <조선통신>이 보도하였다.

미래는 쓰촨성의 피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다
재해지역 근처에 더욱 늘어나는 임시수용소의 피난민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정부의 후속대책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Mianzhu시의 출구에 자리한 종합운동장 가까이에 정부에 의해 설치된 푸른 천막들은 이번 지진에 완전히 파괴된 Hanwang시와 3개의 산촌들에서 온 7천명 이상의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 도로의 다른 쪽 다소 먼 거리에서는 불도저를 동원한 군인들이 또 다른 수용소를 설치하기 위해 작업이 한창 진행 중 이다. 중국정부에 의하면 이번 지진은 5백만 명의 이재민을 낳았다고 한다. “붕괴된 우리들의 집을 재건축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곳에서 임시지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라고 그의 가족과 친지 등 총 15명이 1개의 천막에서 기거하고 있는 39살의 광부인 Li Jinsong은 말하였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너무 많은 피난민들이 있다”. Li Jinsong은 Mianzhu에서 15km 떨어진 지진으로 ‘유령의 도시’로 변한 Hanwang 출신이다. 거기에는 지진 발생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 몇 명의 주민들만이 틈이 갈라지고 파괴된 자신들의 집에서 남아있는 것들을 분주하게 옮기고 있었다. 많은 이재민들은 지진으로 인해 평탄하게 되어버린 계곡 깊은 곳에 위치한 Qingping성 출신들이었다. 이곳은 군 구조대원들에 의해 구조되기 전 4일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부모, 내 조부모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의 소식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 수용소에서 그의 누이와 재회한 25살의 노동자인 Deng Yong은 말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더 이상의 일도 없고 집도 없다. 마침내 자신들의 힘에 의존해서 다른 곳에서 일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거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괴가 너무 심각하다”, 라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많은 피난민들은 주말에 Sichuan을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이 그들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그들의 주택과 도시를 재건축할 것을 기대하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지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가진 것이 없고 무슨 돈으로 우리들의 마을을 재건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완전히 정부에 일임한다”, Qinghua성 출신인 52살의 한 시골아저씨 Ma Jingsuan은 말하였다.


학생과 교사들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의 수가 9천명에 달한다
5월 24일 현재, 이번 지진의 총 희생자들 중 12%가 학생들과 교사이다. 적어도 6,581명의 학생들과 1,274명의 교사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고 Beijing News는 보도하였다. 약 1,107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잔해 속에 묻혀 있고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사망자로 발표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지진발생 후 중국인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무신론자들의 국가이지만 일부 중국인들은 이번 지진의 비극적 상황들이 발생한 후에 해답과 안식을 종교에서 찾고자 하였다. 지진으로 인해 쑥대밭으로 변한 Sichuan 지방의 도시인 Juyuan 중학교의 잔해 앞에서 Li Jianyun 부인은 불교신자의 상징인 백련화 잎을 바치면서 고인들을 애도하였다. 그녀는 5월 12일 지진이 발생하던 날 14살 된 딸을 잃었다. “나는 매일 여기로 온다. 정말로 일어난 모든 것이 믿기지를 않는다”, 잔해들 위해 그녀의 시선을 고정한 채 힘없이 말하였다. 1949년 공산주의자들의 정권장악 후 종교는 중국에서 30년 동안 금지되었다. 그 이후의 30년은 소비사회 안에서 유물론자들은 표면 안으로 잠수해 있었다. 그러나 종교는 불교와 도교와 같은 다른 믿음들이 혼합되어 중국인들에게 그리고 신앙심이 활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실제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가족 장례식이 Juyuan의 시체공시장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공시장 입구에는 즉석진열대를 설치하여 모든 종교의식용품들을 판매하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피우는 향, 화장(火葬)을 준비한 시신에 입히는 의복, 저 세상에서 고인들과 해후하기 위해 태우게 되는 가짜 돈.
“중국인 중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도 관습은 존중할 것이다”,라고 상하이의 <동중국사범학교>의 민간전통학과의 교수인 Tian Zhaoyuan은 설명하였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관습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관습을 따르는데 어떤 한 사람만이 관습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압력을 받게 된다”, 라고 이어서 말하였다.
시체공시장에서 45살의 한 남자가 일하고 있던 미장원의 붕괴로 인해 5월 12일 사망한 그의 누이의 시신 앞에서 묵상을 하고 있었다. Tang라는 성을 가진 이 남자는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망자들 주위에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사악한 영혼’을 쫓자내기 위해 터뜨리게 될 폭죽들을 손으로 집었다. “전통과 의식(儀式)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위안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Juyuan 중학교의 잔해들 위에 Liu씨(氏) 성을 가진 어떤 남자는 참사 이후 이곳에 촛불들을 바쳤다. 그러나 그 역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서구인들은 사후에 천당으로 간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죽음을 경애하고자 한다”. 라고 설명하였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지진 진원지 방문과 국제적 협력
5월 24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지방의 진원지지역인 중국 남서지역을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중국 총리인 원지아바오도 만났다. 방콕에서 출발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5월 24일 아침에 Sichuan의 수도인 청두에 도착하여 즉각적으로 헬기로 갈아타고 지진진앙지인 Yingxiu로 달려갔다. <중국 새 소식> 통신에 따르면 반기문 사무총장은 구조작업과 재건작업을 위해 유엔의 움직임을 약속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생존자 구조작업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Yingxiu성은 참담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AFP통신의 기자가 5월 23일 확인 취재하였다. 유엔 산하 여러 기구들은 지진으로 황폐화된 지역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물적, 인적 자원을 보내고 파견하였다. “6개의 기구와 유엔프로그림들이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유엔의 긴급센터의 지원 하에 움직이기 시작했고 800만 달러의 원조금을 지원하였다”,고 중국에 있는 유엔 재난관리팀의 Patricia Seghers가 밝혔다. 5월 23일 현재, 대다수가 Sichuan지방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수는 55,740명과 행방불명자수는 24,960명으로 각각 집계되었지만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원지아바오 총리에 의하면, 30년 이상 중국에서 가장 살인적인 이 지진은 6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고 하면서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를 포함시키면 “7만, 8만, 혹은 그 이상까지 껑충 뛸 수도 있을 것이다”. 베이징의 중국정부는 사망자의 수는 당분간 60,560명에 26,221명의 행방불명자수를 기록하고 있고 이재민은 5백4십7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Sichuan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지진 발생 후 신속한 대처를 한 중국정부에 경의를 표했다. “내 마음은 이 파괴된 것들을 보면서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동시에 상부상조, 협력, 결의와 용기의 정신으로 이 비극을 극복하고자 고된 일을 하고 있는 중국 관료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우리들이 고되게 일한다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당신들 뒤에 있고 당신들을 지지하고 있다”.
이번에는 원지아바오 총리도 국제 여러 단체들의 원조에 감사를 표했고 중국정부는 “이번 지진은 중국인민들만의 참사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그것이기 때문에 개방정책”을 이행했다고 밝혔다. 중국정부는 외국의 구조요원들과 의사들의 참여를 받아드렸다. 사실 이것을 결정하기 전까지 여러 날이 지연되었고 이것 때문에 여러 비판도 받은 중국정부였다.
5월 24일, Dmitri Medvedev 러시아 대통령이 이틀 동안 베이징을 방문 중에 러시아군대가 물자와 인력을 실은 8대의 비행기로 중국에 전달했다.
미국책임자들에 따르면, 미국은 Sichuan성의 수도인 청두에 원조물자를 가득 실은 3대의 군용비행기를 파견하였다.
Dujiangyan 시에서 독일 적십자대원들은 야전병원을 설치하여 최소한의 부상자들 가까이서 치료와 회복을 돕고 있다. “지진으로 인해 일부가 파괴된 Dujiangyan 병원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는 만큼 독일인의 도움은 더욱더 절실한 것이다”, 라고 Fu Tang 보좌관은 평가하였다. 사실, 독일인들의 도움 이전에 러시아, 일본의 의사들이 Sichuan에 이미 도착하였다. 13명의 팀으로 구성된 프랑스 분견대 1진도 5월 25일 청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Yingxiu에서는 생존자구조작업은 이미 5월 23일 마감을 하고 있었다. 새로 교체되는 의료팀들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싸워야 할 대상은 ‘전염병의 위험’, ‘피난처의 부족과 물 부족’ 그리고 ‘무더운 여름 기후’였다.
중국정부기관들은 ‘텐트’, ‘의료품’, 특히 ‘항생제’가 긴급요구 되는 실정이었다. 지진 이후에 지질적 위험 역시 지속되고 있었다. 지진 영향권 안에 형성되어있던 10여 개의 인공호수들이 범람의 위험을 고조시키며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지질발생 가능성의 고조
5월 25일에 알려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남서부를 강타한 최고 강도의 지진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여진의 빈도수와 강도를 더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 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지질연구팀이 1990년 이후로 발생한 진도 7 이상의 지진들에 대해서 연구를 해왔고 다른 대륙의 단층들을 따라서 소규모의 지진진동을 유발했던 지진파 15개 중 12개를 포착해 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진도 7,9의 이번 지진은 <Nature Geoscince> 영국잡지에 소개된 연구보고서에는 빠져있었다. “지진파들은 지구표면에까지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US Geological Survey>의 공동저작자 중 한 사람인 Tom Parsons 은 설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이번의 활발한 지반진동들은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어디에서나 규칙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으며 놀랄만한 사실 이었다”, 라고 그는 부연 설명하였다. 2004년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에서의 대지진은 알래스카, 캘리포니아와 에쿠아도루까지 여진이 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만약에 여진들이 진도 3에서 5까지의 최소한의 규모로 판명되었다면 첫 지진보다 더 격렬하지는 않는다. “지진의 강도는 예측할 수 없다”, Parson은 20세기 후반에 다른 것 보다 더 파괴적인 진도 7이상의 8개의 지진을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어떤 지진의 여진의 반응을 측정하기 위해, Parsons과 그의 연구팀은 지진감시 세계조직망의 500개 지역조직의 지진계를 연구한 바가 있다. “가장 큰 의문은 여진들의 반응이고 지진 발생 후 상황이다”,라고 하면서 지진들에 연관된 2가지 가설이 존재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진은 같은 체계 안에 결합되어있는 지층 사이의 여파의 결과로 인해, 최초 진원지의 100에서 200km의 영역 범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최초 진원지에서 매우 먼 거리에서의 강도 높은 진동의 발생은 지진파들의 전파의 역동성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밖에 없다. 지진파들은 매우 먼 거리에서 조차 그 강도를 잃지 않고 지구표면에까지 전달된다. 이번 중국을 강타한 지진과 같이 지진의 즉각적인 지진결과들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지진의 정체시동’과 ‘지진의 역동시동’을 분리하여 연구해야만 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우리는 연속적인 여진들을 연구하고 교육 자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순간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역동적인 모태의 지진들에 대한 가능성을 역시 알아야 한다”, 라고 Tom Parsons은 주장하였다. “일단 지진파들이 지나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사실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국이 한 가족으로 뭉쳤다
지진 참사의 비극적 상황 앞에서 중국인들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결집되었다. 중국인 모두가 “우리들은 한 가족이다” 이라는 지상명령어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12일 쓰촨성 지방의 무시무시한 지진 이후, 재해지역의 비참한 모습의 사진들과 비디오 장면들이 텔레비전 화면과 인터넷상에서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올림픽 성화의 행진은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재해지역과 죽은 시체들의 끔찍한 장면들이 다양한 미디어매체들을 통해 보게 되었다. 5월 26일 현재 5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들이 발생한 상황에서 전체 중국인들은 슬픈 감정과 마음의 동요를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 5월 12일 이후로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임시방송들은 대중들에게 늘리 알리고 지진 진앙지 지역을 위한 모금을 받기 위해 연속적으로 방송되었다.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특별한 날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들을 부르기 위해 도착하였고 반면에 여러 기업들은 많은 공식 기부금들을 보내주었다. 시민들 역시 동참하여 적십자단체와 희생자들을 위해서 기금을 모우기 위해 조직된 다른 단체들에 ‘푼돈’, ‘목돈’을 기부하기 위해 줄을 섰다. 텔레비전 방송은 이 분위기에 적합한 음악과 함께 위안을 주는 영상으로 재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였다. 어디에 서던지 이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대중을 감동시키고 최대한 너그러움을 발휘하려고 애썼다.
국가 정부에서는 원지아바오 총리가 지난 시대의 총리였던 Zhou Enlai 만큼이나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중이다. 참사 이후로 원지아바오 총리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지역으로 시찰을 하러 다녔다. 5월 12일 이후로 밤마다 2시에서 3시 사이에 원지아바오 총리가 이곳저곳 시찰하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소개되고 있었다. 피해자들과 접촉하면서 위로하고 용기를 주면서 그리고 구조대원들에게는 목적의식을 주문하면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총리의 모습을 중국국민과 세계인들은 볼 수가 있었다. 게다가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온화하게 말을 건네는 총리의 모습에서 세계가 감동하였다: “아가야 울지 마라, 정부가 너를 보호해 주마”. 총리의 행동은 국민과 정부의 끈끈한 결합을 도모하였고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는 문구가 끝임 없이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수와의 또 다른 전쟁
5월 25일 현재 격렬한 여진이 발생한 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의 수가 88,000명 이상으로 증가된 상황에서 댐의 붕괴 위기와 홍수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구조대원들은 5월 12일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들을 구조하고 돕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지진 후에 등장한 무수한 지질학적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5월 12일 이후 가장 강력한 진도 6,4의 여진의 발생은 대표적인 예가 된다. 4개의 지역에 발생한 새로운 지층의 흔들림은 적어도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또 다른 수백 명의 부상자들과 수만 개의 집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여진의 진원지는 쓰촨성 북동쪽에서 탐지되었으나 지반의 진동은 사방 수백km에까지 퍼져나갔다. 중국정부는 역시 잠재적인 위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쓰촨성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댐들과 인공호수들의 붕괴와 범람의 위험들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25일 밤부터 26일까지, 1,800명의 군인과 경찰들이 2주전에 지진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은 Beichun지방의 호수들 중의 하나에 집결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강물의 흐름을 막는 지반밀림으로 쌓인 잔존물들을 다이너마이트로 제거하는 임무였다. 근처의 주민들의 일부를 대피시킨 정부는 쌓인 물들이 지진으로 이미 파괴된 지역에 범람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중국 새 소식>통신에 따르면, 1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별도로 이미 대피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호수가 갑작스럽게 붕괴되어 범람한다면 대략 120만 명이 추가로 위험에 빠지게 된다. 5월 25일 수력자원부의 부-장관인 E Jingping은 이런 유형의 인공호수들 30여개가 지진발생 후에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중국정부 책임자는 주초에 예상되는 많은 비가 모든 것을 악화시킬 것으로 알고 있고 지금의 이러한 상황은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E Jingping 역시 이번 지진들은 100여개의 댐들에 파손을 주었고 그 중 69개는 붕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지역들은 완전히 배수가 되었고 다른 지역들은 일부가 비어있다는 것을 그는 알려주었다.
5월 26일, 중국정부는 30년 이상 중국에서 가장 살인적이었던 이번 지진의 사망자수를 다시 수정하여 발표하였다. 확정된 사망자의 수는 65,080명이고 행방불명자는 23,150명으로 집계되었다. 정부는 임시피난처에 수용되어야 할 숫자가 1천4백만 명임을 조사하였다. 왜야하면 이재민들은 집을 잃었고 임박한 위험 앞에 대피되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절박해지면서 중국정부는 국제사회에 긴급요청을 보내고 특히 많은 ‘텐트’를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일본, 유럽, 또한 미국에서 발송되는 원조들은 늘어만 갔다. 원조들은 물적으로는 의료품, 식량, 의복들이 주를 이루고 인적으로는 프랑스, 독일 의사들이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재민들은 적합한 피난처와 음료수가 부족하다. 그리고 여름우기에 접어들면서 고조된 불안정한 그들의 상황은 전염병의 창발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의 여진으로 420,000채 이상의 가옥의 파괴
5월 27일 쓰촨성의 420,000채 이상의 가옥들이 연속적인 2번의 여진으로 파괴되었다. Qingchuang현에 위치해 있던 가옥들의 파괴로 인해 63명이 부상하고 그중 6명은 중상을 입었다. 중국의 남서부지역은 10여 차례에 걸쳐 강력한 여진으로 지반이 심하게 진동하였다. 5월 26일까지 진도4 이상의 182번의 여진들이 쓰촨성에 기록되었다고 <중국지진관측소>는 발표하였다. 5월 27일의 진동들은 진도 5,4와 5,7에 달했고 30분 내에 발생하였다.

도시를 버리고 떠난 부자들
5월 12일의 지진으로 시(市) 일부가 파괴된 Mianzhui에서는 가장 부유한 부자들은 도망을 갔고 남은 자들은 정부의 구조로 생존하고 있다. 상인들은 최우선의 필수품만 팔고 있었다. “여기는 오히려 안락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지역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났다, 단지 자신들이 운영하던 기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있었던 부자들만 제외하고”, Chengshi의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Tao Hong씨(氏)가 말하였다. 그녀가 설명하기를 “정부가 모든 사림들에게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라는 요구를 방송에다 하였고 길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쳤다”, 아이에서부터 증조부모들까지 4대가 들어찬 텐트 안에 살고 있는 이 30대 여자인 Tao씨(氏)가 말하였다. 한 가정에 2개의 방이 있는 조립식 막사 안에 새 숙소가 마련되기 전에 이런 상황들은 2,3주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슈퍼마켓이 있는 Dashu의 길에서는 도시의 대부분의 상점들처럼 모든 상가들이 문을 닫았다. 근처에 거의 모든 건물들은 각양각색의 피해를 입었고 도시의 ‘화이트 컬러’들이 거주하며 아주 최근의 신축건물들이라 더 잘 지탱될 것으로 보이더라도 다시 거주할 수 있기 전까지는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이전 수입의 1/3 정도 벌고 있다. 그리고 싼 가격의 상품들만 팔고 있을 뿐이다”,라고 Tao씨(氏)는 불평을 하였다. 수만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의 미장원들, 안경점들, 의류점들은 중국 남서쪽 지방들에서 온 특히 Zhejiang과 Jiangsu의 상인들에 의해 차지 당했다. 강변에 있는 Hebin 길에서만 상대적으로 활기를 띄며 남아 있다. 의류상점들은 취사도구들, 이불 혹은 싼 가격의 의복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장사는 끝장났다. 드물게 온 손님들도 최우선적인 필수품만을 사러왔을 뿐이다”, 의류점을 경영하고 있는 37살의 Peng Chaoyong씨(氏)가 불평을 늘어놓는다.
“예전에 도시민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시골사람들도 여기서 물건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의 구호로 살고 있는 피난민들로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물건을 살 능력이 없다”,라고 천과 이불가지를 팔고 있는 Li라는 여자가 설명하였다. Mianzhu의 모든 공장들처럼 지진 이후 문을 닫은 어떤 공장에서 일했던 40살의 노동자인 Chen Zhengquan은 “이것들이 언제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갈지 어떠한 생각도 없다. 기다리면서 정부의 식량구호로 살아갈 뿐이다”,라며 체념하였다. 그는 개인의 작은 주거지지역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2개의 커다란 비막이 덮개를 치고 그의 가족과 함께 길거리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주거지의 건축은 1만에서 2만 위안의 경비가 든다. 여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저축금을 사용하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나는 재건축을 하기 위해 돈을 마련할 능력이 없다”,라면서 그는 탄식을 하였다. 가금(家禽)과 삶은 돼지고기를 돌아다니면서 파는 가두상인인 Yao Yungqing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나는 평상시보다 좀더 손님들이 있다 왜야하면 취사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는 이재민들을 돕게 되어 공산당과 정부에 감사해했다. 다른 상인들과 같이 그는 이 비극적 상항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가격은 올리지 않았다고 서둘러 부연설명 하였다.

16일 지나서 군인들에 의해 구조된 40명
5월 12일 지진에 의해 세상과 단절된 40명의 촌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구조되기 전 가장 열악한 상태에서 16일을 버티며 생존하였다. 그들 중 지진발생 순간에 탄광의 창고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8명의 노동자들은 5kg의 쌀을 나누어 먹고 빗물을 먹으며 죽음과 맞서 싸웠나갔다.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20km 떨어진 Yangjiagou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는 지반의 밀림으로 인해 절단되었다. 이 마을에서 생존자들이 있음을 안 것은 평지에 고생 끝에 도달한 8명의 노동자들 중 4명의 동료들에 의해 5월 21일 구조작업 중인 군대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허약해 졌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40명의 촌사람들은 지역피난수용소로 헬기를 타고 옮겨줬다. Longmenshan(용문(龍門)의 산들이라 지칭) 산맥의 수백 개의 촌락들은 진도 8의 연속적인 지진들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었다.

결론: 중국은 새로운 재건의 도전을 받다
살인적인 지진발생 후 한달이 지난 아시아의 거인 중국이 재건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국정부에 따르면 지방수도 Chengdu의 산악지방에서 5월 12일 14시 28분의 진동에 의해 파괴된 도시들과 기초시설들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3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전문가들은 이보다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미래에 해야 할 일은 고되고 무거울 것이다.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지진발생 후 당신들은 5년에서 1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라고 국제적십자협회장인 Juan Manuel Saurez del Toro Rivero가 해설하였다. 북경 중앙정부는 우선적으로 도로, 학교, 주택과 통신망의 복구와 재건설을 위해 금년 한 해에만 대략 천억 달러의 투자를 한다고 하였다.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 중에 하나인 Beichun은 대표적인 재개발 지역이다. 골짜기에 위치한 이 도시는 거의 전체가 파괴되었으며 더욱 새롭게 재개발 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존자들의 재건을 돕는 일 역시 또 다른 전투가 될 것이다. 1천5백만 명이 지진 때문에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공식 언론매체에서는 수상인 원지아바오의 높은 지도력으로 신속한 결단을 보여준 것에 대해 칭찬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천막촌에 열악하게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당분간 정부는 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한다”, 고 Bai Tao는 말하였다. Hanwang시에 있는 그의 집과 그의 의류상점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진 후 그의 삶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상인들로써 우리는 절실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물과 인스턴트 국수뿐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싶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그는 설명하였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회시스템이 부족한 중국은 국민들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일련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정리하게 될 거라고 단언하였다. NP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