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전 대통령후보 베탕쿠르의 6년간의 인질생활과 석방

프랑스국적을 가진 남미 콜롬비아의 여류정치인 잉그리드 베탕쿠르는 1961년 12월 25일 보고타에서 태어났다. 2002년 2월 23일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2321일(6년)만에 2008년 7월 2일 3명의 인질과 포로가 된 11명의 콜롬비아군인들과 함께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결혼으로 프랑스국적도 소지한 잉그리드 베탕쿠르, 그녀의 정치적 행보와 그녀를 지지하는 단체는 지금 전 세계의 언론매체들에서 중요기사로 다루고 있다.

베탕쿠르의 가족관계과 생애
잉그리드 베탕쿠르는 독재자 Gustavo Rojas Pinilla 장군정권하에 교육부장관으로 지냈던 아버지 Gabriel Betancourt와 어머니 Yolanda Pulecio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유네스코에서 일을 할 때 프랑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파리에서 초등학교를 마쳤으며 중등교육과정은 보고타의 Louis Pasteur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입학자격시험을 거친 후 베탕쿠르는 정치학을 전공하기위해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그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유네스코의 콜롬비아대사를 지내고 있었고 그녀의 가정은 수많은 인사들과 광범위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베탕쿠르는 정치가이지 시인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와 알게 되었으며 1973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가족과 함께 깊은 우정을 유지하였다. 그녀의 누이인 아스트리드 베탕쿠르는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콜롬비아 주재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Daniel Parfait와 부부사이이다. 콜롬비아로 다시 돌아와서 그녀의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잉그리드 베탕쿠르는 파리로 다시 떠나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프랑스 남자 Fabrice Delloye를 알게 되고 1981년 결혼을 하였다. 그들 사이에 두 아이 메라니와 로렌죠 드로와이-베탕쿠르를 가졌다. 그러나 1990년 잉그리드 베탕쿠르는 이혼을 하고 보고타로 단신 귀국하여 콜롬비아 재정(財政)부에 들어갔다. 그녀는 1994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998년 콜롬비아 녹색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에 그녀는 상원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그녀가 2002년 2월 23일 녹색당의 선거준비위원장인 Clara Rojas와 함께 Florencia 근처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의해 납치되었을 때 대통령후보 자격으로 대통령선거를 준비 중이었다. 이 납치사건은 그녀의 석방을 위해 강력한 국제적 움직임을 유발하게 하였다. 그녀는 6년 이상 콜롬비아무장혁명단체의 인질로 잡혀 있다가 마침내 2008년 7월 2일 콜롬비아정부군에 의해 구출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2002년-2008년 6년간의 인질생활과 구출계획
▶ 2002년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함께 대변인들이 체포되었을 때 안드레 파스트라나 정부는 양보한 4만2천㎢ 지역을 다시 점령하라고 군대에 명령을 하였다. 2002년 2월 23일,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무장 세력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San Vincente del Caguan을 향해 헬리콥터를 타고 출발하였다. 콜롬비아 정부는 국가원수와 동반하여 기자들과 함께 비행기로 이동하려는 베탕쿠르를 거절하였다. 실제로 대통령이 대통령후보들과 같이 여행하는 행위는 콜롬비아 법률상 금지되어 있었다. 자유당 대통령후보였던 Horacio Serpa 역시 헬리콥터를 타려는 것을 거부당했다. 그래서 베탕쿠르는 그녀와 같은 당 소속의 San Vincente del Caguan 시장(市長)을 지원하러 대통령 일행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콜롬비아 정부가 도로의 어디에선가 진을 치고 있을 게릴라들의 출현의 위험성을 베탕쿠르에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San Vincente del Caguan로 이어져 있는 Florencia의 도로를 이용하여 강행했다. 정부군의 마지막 검문소에서도 베탕쿠르 수송차를 제지하였고 군인들은 몇km 내에 게릴라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음을 베탕쿠르 일원들에게 알렸지만 대통령후보인 베탕쿠르는 이러한 결정에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한 후에 그녀의 운전자에게 길을 따라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녀와 녹색당의 선거준비위원장인 Clara Rojas는 Paijil에서 체포되기까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여러 진지를 통과해 갔었다. 이 납치는 콜롬비아정치인들의 또 다른 납치들로 이어졌고 정치적 납치로 간주되었다.

▶ 2003년
일명 7월 14일 작전은 베탕쿠르를 구출하려다 중도에 갑자기 좌절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와 콜롬비아, 브라질과의 외교관계에 긴장을 조성하였고 인질들의 몸값만 올려놓았다. 이 작전은 2003년 7월 9일 프랑스군용비행기 한 대가 브라질의 Manaus공황에 착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떤 불확실한 정보에 의거하여 베탕쿠르 석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여 인질의 상태를 미리 알아보려는 베탕쿠르의 가족의 요구로 인한 것이었다. 비행기에는 의료팀과 외교관들이 탑승하였고 프랑스 부-외무장관이 작전을 결정하였다. 기장은 Cayenne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연료를 가득 채워야한다는 구실로 착륙권한을 받았다. 프랑스인들의 거동이 브라질경찰관들의 눈에 의심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기내 검문도 거절하였다. 수상한 프랑스인들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7월 12일 받은 Celso Amori 브라질 외무부장관은 인질구출작전임을 감지하고 그들과 접촉하였다. 7월 13일 Luiz Inacio Lula da Silva 대통령의 명령으로 비행기는 Cayenne를 향해 이륙해야만 했다. 이 작전은 브라질일간지 Carta Capital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브라질과 콜롬비아 주재 프랑스 대사들의 소환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Dominique de Villepin은 7월 31일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다. 국방장관, 수상, 대통령에게도 알리지 않고 외무부장관 혼자서 결정한 이 임무는 논란을 야기 시켰다.

▶ 2007년
2007년 5월 17일: 탈출한 인질의 폭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인질이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콜롬비아 공무원이었던 John Frank Pinchao Blanco는 베탕쿠르의 억류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는 2007년 4월 28일 베탕쿠르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다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폭로는 베탕쿠르의 석방을 위해 또 다시 관심을 갖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 Alvaro Uribe 콜롬비아대통령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게릴라대장인 Rodrigo Granda를 조건 없이 석방하였다고 6월 4일 발표하였다. 게다가 콜롬비아대통령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인질들의 석방을 게릴라들에게 유발시키고자 150명이상의 전향한 반역자들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Rodrigo Granda의 석방 다음날, 그는 석방된 반역자들을 “패잔병” 그리고 “전력(前歷)이 모호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조치를 오히려 비판하였다. “내 석방을 위해 프랑스대통령의 칭찬할 만한 중재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분란을 도모할 좋은 기회로 여겼던 Uribe대통령과 다른 정부 관료들에 의해 호도되었다”라고 Rodrigo Granda는 말했다. 반면에 그는 니콜라 사르코지에게는 감사의 말을 전달했다. 그 이후 Rodrigo Granda는 Raul Cubas 파라구아 전(前) 대통령 딸의 납치와 살해에 연루된 용의자로 파라구아 판사의 요청에 따라 인터폴에 의해 수배되었다.

2007년 11월 30일: 베탕쿠르가 생존해있다는 새로운 증거
2007년 11월 30일, 콜롬비아정부기관은 베탕쿠르에 관련된 비디오를 공개하였다.(2007년 10월 24일 날짜가 분명한 그녀의 가족에게 보내는 베탕쿠르가 쓴 12페이지의 편지와 더불어 회수된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며 몹시 여위어보였고 머리카락은 오래 동안 깍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질은 거의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비디오영상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이라도 했던 2003년 8월에 베탕쿠르가 살아있다는 마지막 증거의 비디오와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없는 이번 비디오영상 사이의 차이에서 깊은 우려와 애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2007년 12월 1일 콜롬비아정부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이 인질들과 베탕쿠르의 운명에 관련하여 진행 중인 협상에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묵인하였다. 12월 6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인질들에게 보내는 2개의 메시지(하나는 라디오전파로 또 하나는 텔레비전전파로)를 보냈다. 프랑스대통령은 베탕쿠르를 가장 조속한 시간에 석방하도록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수장인 Manuel Marulanda의 인간적인 감성에 호소했고 크리스마스를 그녀의 가족과 함께 보내는 베탕쿠르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표현하였다.
비디오영상이 나간 다음날, 베탕쿠르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내용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편지 속에 그녀는 나날의 공허함, 일상적 모욕과 게릴라들의 항구적인 도피생활 때문에 강제로 걸어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서 온 피로감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휴대하고 있는 망가진 라디오를 통해 그녀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역시 설명하였다. 그녀는 3개의 일상적 메시지를 월, 화, 금요일마다 이 수단을 통해 그녀에게 보내줄 것을 명확하게 요청하였다. 콜롬비아 밀림 속에서도 청취할 수 있는 <프랑스국제라디오> 방송국은 <잉그리드 베탕쿠르 지지협회>의 요구에 화답을 하였다. 12월 7일 첫 메시지를 보낸 후 인질의 석방 때까지 작전은 연장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베탕쿠르는 인질협상에 활동적인 역할을 한 로마가톨릭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 2008년
2008년 초: 베탕쿠르의 위태로운 상황
최근에 석방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인질 한 사람이 베탕쿠르의 건강상태가 위태롭다고 2008년 1월 28일 프랑스에 알렸다. 그는 베탕쿠르가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B형 간염에 걸린 후에는 극도로 건강이 쇠약해졌다고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프랑스대통령 사르코지는 이제 베탕쿠르의 석방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었고 콜롬비아 국경으로 베탕쿠르를 구출하러 갈 준비를 하겠다고 하였다. 베탕쿠르의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의 위태로운 상황에 의해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2008년 3월 1일 콜롬비아 군에 의해 수행된 작전에 따라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제2인자로 알려진 Raul Reyes가 게릴라들의 비중 있는 다른 여러 명의 간부들과 함께 에콰도르 영토(콜롬비아 국경에서 1,8km 떨어진 곳) 안에서 살해당했다. 콜롬비아정부는 이러한 성과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것 중 하나로 간주하고 자축을 하였지만 베탕쿠르 가족은 이것은 불확실한 석방에 관련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불안해하였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제2인자의 살해상황들과 베탕쿠르의 운명에 관한 결과들에 관련해서 에콰도르 주재 프랑스대사는 Raul Reyes가 살해되고 며칠 후 아주 명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미국이 개입된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게다가 베탕쿠르의 전 남편인 Fabrice Delloye는 <프랑스 스와르>신문과 인터뷰에서 2월 26일 파나마에서의 회의를 위해 중재국들(스페인, 프랑스, 스위스)의 대표들과 <Luis Carlos Respreto 평화회>소속 콜롬비아 상원위원이 모였다는 것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대표들은 Raul Reyes를 만나러 갈 것으로 알려졌다. 콜롬비아 공무원은 그들에게 Raul Reyes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Fabrice Delloye 의하면, 3월 1일 밤에 Alvaro Uribe 콜롬비아 대통령은 중재국들 대통령들과 Correa 에콰도르 대통령에게도 미리 알리지도 않고 에콰도르 영토 내에서 Raul Reyes를 살해할 것을 의도적으로 결정하였다. <Cambio> 콜롬비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Piedad Cordoba 상원의원은 프랑스정부 보좌관인 노엘 사에즈가 Raul Reyes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의 친구들 중 한 사람에게 털어 놓았다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2008년 3월 7일 공식기자회견에서 Bernard Kouchner 프랑스외무부장관은 Raul Reyes 죽기 며칠 전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제2인자인 그와 접촉 중이었음을 밝혔다. 반면에 2008년 3월 5일 프랑스와 피롱 수상의 대변인인 Laurent Wauquiez가 베탕쿠르와 관련해서 Raul Reyes와 최근에 접촉한바가 없다고 단정한바 있다. 그때부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은 이러한 군사적 행위는 프랑스, 에콰도르, 베네주엘라 대통령들과 협상(이 세 나라들에 의해 다각도로 확인된 협상) 중이었던 베탕쿠르와 다른 인질들의 석방에 있어서 대단히 불운한 것으로 여겨졌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의하면 Raul Reyes는 사실 이 어려운 협상에서 중재국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와 주변국들 사이에 역시 위기를 좌초하는 것 이었다: 에콰도르영토에서 콜롬비아군의 군사작전에 반대하는 에콰도르정부와 Raul Reyes의 노트북컴퓨터에서 찾아낸 서류들에 근거해서 콜롬비아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을 두둔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았던 베네주웰라. 국제외교 전문가 집단의 소속인 하버드대학 Womack와 미국의 <지구반대쪽 국제협의회>의 Larry Birns 은 베네주웰라 <TeleSUR> 방송국에서 취재한 보고설명에서 콜롬비아정부는 이 노트북에 저장된 내용들을 너무 정치적인 목적으로 과장해석했다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연합사무총장인 Jos&eacute; Miguel도 특히 재정기획에 관련해서 “명백하게 베네주웰라와 콜롬비아 반군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다는 증거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2008년 3월28일부터 29일 밤사이에, 프랑스대통령에 의해 보내진 <팔콘 900>비행기 한대가 프랑스령 Guyane의 Cayenne의 활주로에 비빌리에 착륙하였다: 2008년 3월27일 목요일 콜롬비아 협상가가 베탕쿠르는 B형 간염과 레슈마니아병에 걸려있고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 직후에 베탕쿠르사건과 인질석방의 해결을 기다리며 군용기지에 머물며 대기하고 있던 의료비행기였다. 아주 긴박한 이 정보들에 따라, Alvaro Uribe 콜롬비아대통령은 인본주의에 반한 범죄들로 구속되어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인 포로들을 포함한 모든 게릴라들의 석방과 베탕쿠르의 석방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같은 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게 요청하였다. 그 이후 2008년 3월30일 일요일, 이 비행기는 파리로 귀환하기 위해 프랑스령 Guyane의 Cayenne에서 15Km떨어진 Rochambeau의 군사기지에서 이륙하게 되었다. 비행기는 빈 채로 다시 떠났다: 어떤 군사정보들은 프랑스대통령 사르코지에 의해 나중에 한달 지나고 명령을 하게 된 은폐해 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대항해서 싸우게 되는 작전명 “큰 수리”를 위한 보강작전임을 말해준다:36시간 Rochambeau에 머문 비행기의 실제기능들의 정확도에 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궁 <에리제>는 베탕쿠르사건을 풀게 될 경우 언제나 이륙준비가 된 파리근교에 위치한 군사기지 Villacoublay에서 또 다른 의료비행기가 항구적인 비상상태로 대기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몇 시간 후에 프랑스 수상인 프랑수아 필롱은 프랑스 TF1 텔레비전 20시 뉴스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베탕쿠르를 석방한다면 그는 그들을 투사로 인정하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게릴라들을 프랑스는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발표하였다. <France Iter>와의 인터뷰에서는 프랑수아 필롱 수상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게릴라들에게 정치적 망명도 제안하면서 한발 더 나아갔다. 프랑스망명협회는 평화에 반한 범죄, 전쟁 혹은 인본주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심각한 사유를 가진 정치범들에게는 동의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들 사건들에 대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대응과 파리에서 보고타로 이어진 제안은 고무적인 것인 것이었다.

4월
2008년 4월1일 화요일 <La Tribune> 일간지는 베네주웰라에 주재하는 볼리비아 언론사를 통해 목요일 공포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공식성명서를 보도하였다. 3월20일 날짜로 씌어진 이 성명서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7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Ivan Marquez는 Raul Reyes사령관을 죽게 했던 공격 이후에 “베탕쿠르의 석방을 검토하기 위한 프랑스대표단과의 접촉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베탕쿠르 지지 위원회>와의 회담 후에 니콜라 사르코지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게 두 번째 메시지를 그리고 2008년 4월 1일 베탕쿠르를 즉각적으로 석방하도록 Manuel Maruland 에게 요청하기 위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녀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범죄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2008년 4월 2일 수요일, 프랑스정부는 베탕쿠르에 접근하기 위해 Noel Saez(보코타 주재 전영사), Daniel Parfait(외교관), 그리고 한 명의 의사가 포함된 인도주의적 임무수행자를 보낸다고 발표하였다. 콜롬비아 ANNCOL 언론사를 통한 공식성명 속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Manuel Maruland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순진한 행동을 꼬집었다.
4월 8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게릴라는 중재국의 압력 하에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주의적 임무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으로 규정지었다. 게다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은 콜롬비아 ANNCOL 언론사를 통해 방송된 공식성명과 프랑스는 자본주의국가이고 프랑스대통령은 우파이며 그들은 프랑스대통령의 진정성의 끝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4월3일자 주간지 <Le Nouvel Observateur>가 취재 보도를 확인시켰다.

구출
2008년 7월2일 콜롬비아 현지시간 15시 16분에 Juan Manuel Santos 콜롬비아 국방장관이15명의 인질들이 콜롬비아군인들에 의해 콜롬비아 남부지역에서 석방되었다고 발표하였다.15명의 인질은 베탕쿠르를 비롯하여 미국인 3명과 11명의 콜롬비아 경찰관과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구출은 콜롬비아군인들에 의해 시행된 거대한 침투작전의 종착점이 된 것이다. 작전명 <쟈크>는 콜롬비아정부군이 행한 군사작전이었다. 이 군사작전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설 군 회사의 자문관들의 원조 덕분으로 실행되었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의해 유치된 인질들을 구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작전은 Guaviare 지역의 Apaporis강 근처에서 2008년 7월 2일 실시되었다. 구출된 15명의 인질의 자세한 명단이 공개되었다: 프랑스-콜롬비아 이중국적자이자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대통령후보였던 잉그리드 베탕쿠르, <Northrop Grumman> 미국 항공건설자로 계약된 3명의 미국군인 Thomas Howes, Keith Stansell과 Marc Gonsalves 그리고 11명의 콜롬비아 경찰과 군인들이었다. 작전명 <Jaque>는 스페인 언어로 ‘실패’라는 뜻이 담겨있는 단어이다. 작전은 콜롬비아 정보요원이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침투한 2008년 2월에 개시되었다.
Luis Gmez 대령에 따르면 같은 시기에 인질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Juan Manuel Santos 국방장관에 따르면 콜롬비아 정보요원이 Gerardo Aguilar Ramirez alias Cesar 인질책임사령관을 기만하여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상부지휘체계 안으로 침투하였다는 것이다. 베탕쿠르에 의하면 콜롬비아정보요원이 게릴라들에게 인질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하면서 비행기착륙지역을 향해 강을 가로질러 7월 2일 아침 일찍 인질들을 데리고 갔다고 하였다. Juan Manuel Santos 콜롬비아국방장관은 침투한 콜롬비아군인들이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을 믿게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들의 대장인 Alfonso Cano를 만나기 위해 인질들을 이동시키는 위장조직에 인질들을 맡기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사실 콜롬비아정부군들이었던 체 게바라의 초상이 박혀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을 수송하는 콜롬비아정부군의 비행기 MI-17 헬리콥터 2대가 수갑을 채우고 비행기에 태운 인질들을 맡게 되었다. 헬리콥터에 탄 인질책임사령관 Cesar와 다른 반군들은 즉시 제압을 당하고 곧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한편 기내에서는 군인들은 인질들에게 구출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우리들은 콜롬비아정부군이다. 당신들은 자유의 몸이다”. 베탕쿠르는 헬리콥터 바닥에 눕히고 눈가림을 한 벌거벗은 반군들을 보기 전에는 이것이 사실인지 믿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다른 국가들의 개입
미국국방기관들은 그들의 참여를 최소화하였고 콜롬비아군의 기획과 실행으로 이루어진 작전이라고 발표하였지만 <Los Angeles Times>의 Chris Kraul에 의하면 미국은 수송비행기와 구출인질들을 위한 의료팀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신문 <Der Spiegel>에 의하면 콜롬비아정부기관들은 인질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2008년 초부터 미국의 첩보위성을 사용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설 군용회사의 자문관들도 이 작전의 준비에 연루되었다. 사실 프랑스는 연루되지 않았고 외무부장관도 인질들의 석방이 공개되기 2시간 전에야 알았다.
베탕쿠르는 2008년 7월3일 보고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이들은 Bernard Kouchner 프랑스외무부장관과 함께 프랑스로 향했다. 7월 4일 베탕쿠르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이 직접 맞이하는 프랑스 Villacoulay를 향해 비행기를 탔다. 2003년 2월 마약퇴치 감시임무수행을 하다가 납치되어 풀려난 미국인 3명은 Texas의 Lackland 공군기지로 7월2일 미국으로 귀향하여 San Antonio의 군병원으로 옮겨졌다. 3명 중 두 명은 정글생활 속에 발병한 레슈마니아병을 앓고 있었다.

각국의 반응
아르헨티나
Cristina Fernandez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베탕쿠르의 석방을 ‘생명과 자유의 승리’라고 지칭하였다.

콜롬비아
15명의 인질들의 석방발표는 콜롬비아 전국을 환희로 뒤덮였다. 콜롬비아 주간지 <Cambio>의 Rodrigo Pardo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알아 온 것 중에 가장 큰 행복감이었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게는 가장 큰 타격”이었다고 기사화하였다. 일간지 <El Tiempo>는 “국가의 아주 큰 환희... 전국방방곳곳에서 경적의 울림, 박수갈채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하였다. 반면에 모든 신문, 잡지사설은 교환할 26명의 인질들(23명은 군인, 3명은 정치인)의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논조를 실었다.

에콰도르
Javier Ponce 에콰도르 국방장관은 15명의 인질들의 석방은 세계가 기다렸던 사건이었으나 군사작전보다는 중재협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고 발표하였다.

미국
George Bush 미국대통령과 Condoleezza Rice 국무장관은 “미국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남아있는 인질 역시 즉각적인 석방을 요청한다”과 공식성명을 통해 강조하면서 Alvaro Uribe 콜롬비아대통령과 콜롬비아정부군을 칭찬하였다. 미국대통령선거 후보들인 공화당의 John McCain과 민주당의 Barack Obama 역시 콜롬비아 정치지도자들을 축하하였다. Barack Obama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게 양보를 하지 않은 콜롬비아의 확고한 전략과 테러리즘에 대항하여 중요한 승리를 이끌어 낸 정보, 무기, 외교력과 정치력의 활용”을 높이 산다고 발표하였다.

프랑스
7월2일 23시 텔레비전 방송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은 콜롬비아정부와 다른 인질들의 석방을 위한 외교대표들(특히 스위스, 스페인과 미국)에게 축하를 전달하였다.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에게 감사를 전했던 베탕쿠르의 누이인 Astrid Betancourt와 가족들도 합석하였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해 유치된 다른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끝임 없이 투쟁하고 납치생활 중에 목숨을 잃은 인질들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론: 인질석방조건에 둘러싼 논란
프랑스-콜롬비아 2중국적을 소지한 콜롬비아 상원의원인 베탕쿠르를 포함한 15명의 인질들의 석방에 대한 논란이 여러 언론매체 특히 콜롬비아 언론에서 제기되었다. 인질석방은 콜롬비아정부, 프랑스정부와 미국정부가 부인하였지만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몇 명의 일원들을 매수하기 위해 2천만 달러를 지불하였다는 것이다. 베탕쿠르는 석방된 후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그녀의 납치생활에 대한 증언과 감회를 언론과의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고 연일 언론은 집중적으로 그녀에 대해 취재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과 프랑스정부의 기쁨과 감회는 그녀의 석방조건들에 관련해서 끝임 없이 커져가는 논란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석방의 조건들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Suiss Romande> 라디오방송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2명의 요원들에게 그들 조직을 배신하고 인질들이 탈출하도록 2천만 달러를 지불하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Suiss Romande>는 미국에 의해 조직된 거래는 단지 연출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금전 지불’, ‘연출’, ‘미국의 개입’, 이 3가지 의문점은 콜롬비아정부가 하나같이 부인한 것이지만 콜롬비아군부를 난처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1. 금전 지불에 대한 의혹
금전 지불에 대한 의혹에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라고 콜로비아 국방장관은 발표하였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위계질서가 분열상태였다고 콜롬비아 군사령관이 증거를 대며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미국과 프랑스도 금전 지불은 없었다고 부정하였다.

2. 연출의혹
이 상황에서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새로운 정황들이 나오면서 콜롬비아정부 쪽으로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헬리콥터로 인질들을 수송하는 순간에 콜롬비아 특공대에 의해 촬영된 비디오자료였다. 촬영된 비디오장면에서 인질들은 아예 비행기에 탑승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또한 헬리콥터에 탑승한 특수요원 한 사람이 “당신들은 자유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외쳤을 때 인질들은 믿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베탕쿠르 역시 이번 구출작전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3. 미국개입의 의혹
비디오장면에는 또한 체포되어 바닥에 눕혀진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인 중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이것은 다국적 인질구출작전이라고 외치면서 자신은 콜롬비아인 이라고 판사에게 자백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한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외국국적의 남자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근거로 미국개입의 의혹이 확산되었고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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