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 돌았지만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어

지난 8월 14일 친일파 후손들이 상속받은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친일파 후손들로부터 상속 재산을 사들였던 제3자들이 귀속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판결이 나온 바 있지만 친일파 후손이 국가의 환수에 불복해 소송을 낸 데 대한 법원의 판단은 처음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성지용 부장판사)는 지난 8월 1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낸 조중응의 후손들이 그동안 선산과 위토로 사용해왔던 경기 남양주 일대의 토지 6천625㎡를 국가에 귀속시킨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후손들은 “친일재산환수특별법에는‘친일파가 러ㆍ일전쟁 후 광복 이전에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얻은 재산으로 추정한다’고 돼 있지만 남양주 땅은 선대인 조씨가 해당 시기에 소유권을 재확인한 것일 뿐 실제 (일제강점기) 이전에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조씨가 친일행위를 통해 자작 작위는 물론 각종 이권과 특혜를 누린 점으로 미뤄 귀속 결정한 토지 역시 일련의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하게 이루어 진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판결에 대해 친일재산조사위는 “광복 63주년이 되는 올해 8·15를 맞이하여 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충분히 살린 재판부 판결을 환영한다”며 “앞으로 더욱 친일과거사 청산의 핵심인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친일파 후손들은 서서히 침묵을 깨고 ‘땅 지키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2월에는 김 모씨는 옥현2리 주민 등 33명과 경기도, 학교법인 단국대학을 상대로 ‘원인무효로 인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및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 이전등기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냈다.
2년간 활동 통해 친일재산 908억원 규모 국가 귀속 결정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는 지난 2006년 7월 발족한, 임기가 4년인 대통령 소속의 한시조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조사 및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조사 및 친일재산 여부의 결정, 일본인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에 대한 조사 및 정리, 이의 신청 처리와 조사자료 보존 등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올해로 친일파들의 소유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작업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년째. 친일재산조사위가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 내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모두 45명의 친일인사 토지 638필지 474만1584㎡가 국가에 귀속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공시지가로 425억원, 시가로는 908억원에 달한다. 조사위는 그러나 “국가귀속 결정 토지 중 취소소송 제소기간이 만료돼 국가소유로 최종 확정된 토지는 259필지 35만4123㎡(공시지가 73억원)”이라며 “나머지 토지에 대해서는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거나 귀속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이해승의 토지가 192만㎡(시가 318억원)로 가장 큰 규모였고 민상호(43만㎡, 시가 110억원), 민영휘(32만㎡, 시가 71억원) 등의 토지가 뒤를 이었다. 조사위는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토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된 이완용(1572만㎡), 송병준(856만㎡)의 토지에 대해서 “각각 1만4000㎡, 6000㎡의 토지를 국가귀속 결정했다”며 “이미 대부분의 토지가 과거에 매각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조사위는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명의로 남아있는 군산지역 내 56필지, 2만5871㎡(공시지가 1억7700만원)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을 확정했다”며 “그 중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야기마사하루(八木正治)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완용으로부터 매입한 땅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친일파 후손은 ‘재산 찾기’에 몰두
친일재산조사위는 그동안 여의도의 두 배 넓이에 가까운 친일파 소유 토지를 환수했지만, 여전히 전체 친일파 소유 토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편 친일파 후손들은 서서히 침묵을 깨고 ‘땅 지키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의신청만 81.5%에 이른다. 한 친일파 후손은 국가에 192개 필지, 최소 300억 원 대의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시대 때 최고작위 후작 자리를 얻었던 조상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한일합방에 기여하지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도 아니다”라며 승소를 자신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김 모씨는 옥현2리 주민 등 33명과 경기도, 학교법인 단국대학을 상대로 ‘원인무효로 인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및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 이전등기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냈다. 김씨는 소장에서 1960년부터 2003년 7월까지 임종상의 아들과 며느리 등으로부터 상속포기와 매매약정 등을 통해 부동산 전부를 양도받았음을 제시했다. 또한 “임종상이 50년 4월11일 부동산 토지들을 단국대에 증여한 것과 관련, 단국대가 제기한 소유권 이전등기 절차 이행청구 소송의 1심에서 승소했다”며 “2심에서 패소해 상고를 취하하면서 위 판결이 확정됐지만 부동산이 단국대로 증여된 것은 원인무효라는 것이 1심 재판부의 판결내용이다. 따라서 단국대의 이전등기는 원인무효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피고들의 부동산은 모두 단국대로부터 이전받은 것으로 이 역시 원인무효에 터를 잡은 것이기에 말소청구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주장은 달랐다. 마을주민 정 모씨는 “임종상은 일제 때 고리대금업과 친일행각을 통해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해방이 되면서 내려진 토지 몰수령을 피하기 위해 기부를 선택했다”며 “단국대에 기부를 했지만 6·25전쟁 등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임종상은 소송을 통해 일부 땅을 반환해 갔고 시골에 별 볼일 없는 땅은 남겨뒀는데, 요 근래 부동산 값이 오르면서 친일파 후손들이 그것도 찾아 먹겠다고 막가파식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분개했다. 실제로 주민들의 집과 농지 등은 최근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시가 수십억원에 달한다. 또 다른 소송피고인 단국대 측은 학교법인과 대외협력팀 모두 “담당이 아니라 모르겠다. 담당자가 휴가를 갔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청구가액이 3억이 넘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하고 있다”며 “경기도는 도로부지인데 실질적으로 26㎡밖에 안 되지만 공무원들은 대리를 할 수 없어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고 말했다. 주민들을 상대로 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반환 소송은 이번 한번만이 아니다. 지난 2005년에도 임종상의 후손과 이해관계인들은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에 단국대 측 토지소유주 4명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수원지법(2006.5)과 대법원(2007.1)에서 잇따라 기각된 바 있다. 정씨는 “친일파 후손들은 대법원까지 가서 패한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김씨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한 것은 정부의 ‘조상 땅 찾아주기’제도를 악용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러일전쟁 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의 친일행위로 축재된 재산에 대해 국가로 귀속시키도록 하고 있다. 단 선의의 목적으로 취득했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조상 땅 찾기’제도를 악용한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잇따르면서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친일파 재산 매입한 제3자, 재산 권리 인정되나
지난 7월 4일 서울행정법원 제3부(재판장 김종필)는 친일파 고희경의 후손에게서 친일 재산인 경기 연천군 백학면 땅 6576㎡를 매입한 한 종중이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낸 국가귀속결정 취소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의 쟁점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친일 재산인 줄 모르고 땅을 산 제3자가 이 땅에 대한 권리를 보호받아야 하는지 여부였다. 제3자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땅은 국가에 귀속되고 제3자는 땅을 판 친일파 후손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거나 매매대금 반환 청구소송을 내 돈을 되찾아야 한다. 반대로 제3자의 권리가 인정된다면 재산조사위는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해 친일파 후손들을 상대로 똑같은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재판부는 “(법 조항에서 보호하는 제3자의 범위와 관련해) 선의 여부, 정당한 대가의 지급 여부 등에 따라 제한하고 있을 뿐 ‘재산의 취득 시기’에 따라 범위를 정하지 않고 있다”며 제3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의정부지법 행정1부(재판장 최영룡)는 지난 7월 1일 친일파 민병석의 후손에게서 경기 고양시 땅 956㎡를 매입한 곽 모씨가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낸 국가귀속결정 취소청구 소송에서 “특별법에 보호받는 대상으로 명시된 제3자의 범위에 ‘특별법 시행 뒤 친일 재산에 대하여 권리관계를 형성한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한쪽 재판부는 “선의의 제3자의 법익을 침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또 다른 재판부는 “법 제정 취지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임기 4년의 한시조직, 시간적 여유는 없다
지난 2005년 12월29일 시행된 특별법에서는 “친일 재산은 그 취득·증여 등 원인 행위시에 이를 국가의 소유로 한다. 그러나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3조 1항)고 규정하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는 제3자의 요건으로 ‘선의’와 ‘정당한 대가’만 언급했을 뿐, 특별법 시행 전 취득한 제3자만 보호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재산조사위는 법 취지에 따라 여기에서의 제3자는 특별법 시행 이전에 땅을 매입한 제3자에 한정되는 것으로 해석해 일을 진행해왔지만, 법 시행 뒤 땅을 매입한 제3자 10여 명은 자신들도 특별법에서 명시한 보호 대상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재판부별로 갈린 것이다. 이렇게 ‘논란’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애매모호한 법조문과 관련해 당시 법안 제정 과정을 지켜본 한 인사는 “사실 이 법안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당시 국회 법사위에서는 법률 적용 대상을 최대한 좁히려는 쪽과 그대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고, 타협해나가는 과정에서 법조문의 상당 부분이 수정됐다”고 말했다. 반면 한 재산조사위 관계자는 “참고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만들어낸 법안임을 생각해보면 (법조문이 허술한 것이) 그렇게 무리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10여 건의 ‘제3자 관련 사건’이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재산조사위 패소로 끝난다면, 재산조사위는 친일파 후손들을 상대로 지루한 소송을 벌여 매각대금을 환수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시간이다. 4년 한시조직으로 만들어진 재산조사위는 벌써 활동 3년째를 맞고 있다. 그런데 제3자 사건들이 대법원 판단을 받기까지는 앞으로 길게는 1년 이상이 소요될 전망이다. 그 사이 특별법 시행 뒤 땅을 매입한 제3자 소유의 땅들에 대한 조사와 국가 귀속 결정은 강한 저항에 부딪혀 재산조사위 활동 자체가 심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또 만약 대법원에서 재산조사위가 패소할 경우엔 친일파 후손을 상대로 한 소송을 진행하느라, 친일 재산 조사 활동에 투입해야 할 역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별법상 국회의 동의를 거쳐 임기를 2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올 초 정부에서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 방침을 밝히면서 이마저도 불투명해졌다. 이제 반환점을 돌아선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해묵은 과거청산 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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